국가유산청(청장 허민)은 익산시(시장 정헌율)와 함께 6월 23일 오전 10시 미륵산성, 오후 3시 오금산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개최한다. 설명회는 희망하는 국민 누구나 현장 접수를 통해 참여할 수 있으며, 실제 조사단의 설명을 들으며 유적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이번 설명회가 열리는 익산은 백제 사비기 왕도의 위상을 보여 주는 핵심 유적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왕궁리 유적을 비롯해 미륵사지, 제석사지, 쌍릉 등이 확인되어 왔고,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도 고대 집수시설 등 다양한 성과가 축적되며 익산이 단순한 지방 거점이 아니라, 왕도급 위상을 가진 공간이었다는 것을 입증해 왔다.
특히, 미륵산성, 오금산성, 금마도토성, 낭산산성 등 백제 성곽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방체계(關防體系, 나라나 도시를 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성곽, 산성, 요새, 군사 시설 등을 서로 연결해 만든 방어체계)가 확인되면서 익산은 백제 왕도로서의 역사적 위상을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적은 종종 과거의 침묵처럼 보인다. 흙과 돌, 무너진 성벽의 흔적은 말을 하지 않지만, 발굴의 손끝이 닿는 순간 그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증언한다. 전북 익산의 미륵산성과 오금산성은 바로 그런 장소다.
겉으로는 오래된 산성의 흔적이지만, 그 안에는 백제가 왕도를 어떻게 지키고 운영했는지, 어떤 토목기술과 축성기법으로 국가의 질서를 세웠는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국가유산청과 익산시가 6월 23일 두 산성의 발굴조사 성과를 일반 국민에게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여는 것은 그동안 학계와 조사단 안에서 축적한 성과를 시민의 눈앞에서 직접 풀어내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왕도는 궁궐과 사찰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권력의 중심지를 어떻게 방어하고, 물과 사람, 행정과 군사를 어떻게 조직했는지까지 확인될 때 비로소 왕도의 구조가 보인다. 익산의 성곽 발굴은 바로 그 빈칸을 채우는 작업이다. 왕궁과 사찰이 ‘보이는 권위’를 보여 준다면, 산성과 관방체계는 그 권위를 지탱한 ‘보이지 않는 질서’를 보여 준다.
익산 미륵산성은 그동안의 조사에서 동문지와 남문지, 치성(적의 접근을 관측하고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시설), 건물지, 집수시설 등이 통일신라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2022년부터 시작된 정상부 평탄지 발굴조사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백제 사비기에 축조된 원형의 석축 물통(빗물을 바로 모아 저장하는 집수 시설)이 확인됐고, 이곳에서 삼국시대 토기류와 목부재, 그리고 ‘병신년정월기’ 명문이 적힌 목간이 발견되었다.
이는 미륵산성이 단순히 후대 산성이 아니라, 백제 시기부터 이미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공간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특히, 이번에 미륵산 정상 아래에서 확인된 추정 토루(土壘), 즉 성토대지는 백제의 토목기술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로 주목된다. 조사 결과 이 구조물은 흙으로 쌓은 토축부와 돌로 쌓은 석축부로 나뉘어 있었다.
풍화암반을 계단식으로 고르게 다듬은 뒤 다져 쌓은 토축부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흙둑을 설치해 구조를 보강한 흔적이 드러났다. 또, 바깥쪽 석축부에서는 붕괴를 막기 위해 계단식 석축과 외곽석축을 조성한 뒤 점토와 풍화암반토를 추가로 성토한 흔적도 확인됐다.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옛사람도 성을 쌓았다”라는 수준을 넘어선다. 백제는 지형을 읽고, 암반을 다듬고, 흙과 돌을 구분해 배치하며, 구조적 약점을 보강하는 매우 정교한 공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미륵산성은 자연 지형 위에 수동적으로 얹힌 방어시설이 아니라, 산의 조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공학적으로 활용한 국가 차원의 토목기술이 반영된 산성이라는 뜻이다. 이 점은 백제 사비기 미륵산의 운영 성격과 전략적 위상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드는 단서가 된다.
오금산성의 발굴 성과도 이에 못지않다. 오금산성은 2016년부터 이어진 연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시기의 서문지와 석축 성벽, 집수시설을 비롯해 수부명(수도의 별칭) 인장와, 칠피(옻칠을 한 가죽) 갑옷편 등이 출토되며 축성 및 사용 시기와 군사적 성격이 점차 구체화해 왔다.
특히, 2024년 집수시설 조사에서는 ‘정사 금재식’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축편(두루마리 형태의 문서를 보관하고 분류할 때 사용한 목재 막대기)이 출토되어, 백제의 문서 보관과 분류 방식 연구에 대해서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오금산성에서도 흙을 사용한 토축성벽과 돌로 쌓은 석축성벽이 함께 확인됐다. 토축성벽은 원지형을 점토로 고르게 만든 뒤 일정한 간격으로 판재를 세우고, 물성이 다른 흙을 교대로 다져 쌓는 판축기법(판을 대고 물성이 다른 흙을 교대로 다져 쌓는 방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다시 바깥쪽을 돌과 흙으로 보강한 흔적까지 확인됐다. 이는 백제가 단순히 성벽을 높게 세우는 데 집중한 것이 아니라, 성벽의 재료와 구조를 복합적으로 조합해 안정성과 지속성을 높였다는 점을 보여 준다.
또한, 7~9단 정도가 남아 있는 석축 성벽에서는 20~30센티미터 안팎의 잘 다듬어진 사각형 석재들이 매우 정교하게 쌓인 양상이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 성벽에서 착암기법(자연 기반석에 석재를 맞닿아 쌓는 방법)과 그렝이기법(맞닿는 면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쪽 부재를 다른 부재 모양대로 따내는 방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축성 방식은 인근 백제왕궁인 익산 왕궁리유적의 동서축대와 같은 수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오금산성의 축성이 단순한 지방 산성의 수준을 넘어, 왕궁과 연결된 동일한 기술 체계 속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왕궁과 산성에서 비슷한 축성·석축 수법이 확인된다는 것은 두 유적이 물리적으로만 가까운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정치적·기술적 체계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왕궁은 권력의 중심이고 산성은 그 권력을 보호하는 구조였으며, 둘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 시스템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금산성은 그런 백제 왕도의 방어 논리를 실제 성벽의 구조를 통해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이번 현장 설명회는 그래서 단순한 유적 공개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백제 왕도 익산의 실체가 구체적인 발굴성과를 통해 어떻게 점점 더 드러나고 있는지를 시민들이 직접 확인하는 자리다.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단순히 돌과 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백제의 기술과 행정, 군사와 도시 운영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설명회가 미륵산성과 오금산성 두 곳에서 각각 열리는 이유도, 익산의 왕도 체계가 하나의 유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고 여러 성곽과 유적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유산청은 앞으로도 익산시와 함께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해 백제왕도 핵심 유적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규명하고, 진정성 있는 보존·정비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국민이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체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 나가는 등 현장 중심의 적극 행정을 이어가겠다고 설명했다.
문화유산은 발굴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해석되고 공유되어, 시민의 기억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이번 설명회는 그런 의미에서 발굴성과를 공개하는 기술적 절차를 넘어, 백제 왕도 익산이라는 역사적 상상력을 시민의 삶 가까이 끌어오는 공공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미륵산성과 오금산성은 더 이상 무너진 옛 성의 잔해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백제가 산을 다루고 흙과 돌을 쌓으며 왕도를 지켜 낸 방식, 곧 국가 운영의 정교함을 증언하는 현장이다. 성벽은 무너졌지만, 기술은 남았고, 시간은 흘렀지만, 흔적은 아직 말을 하고 있다. 이번 발굴 현장 설명회는 그 오래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리로 기억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