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청장 허민)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에 위치한 「완주 남계리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이 유적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두 번째 대규모 박해사건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때 순교한 윤지헌의 유해와 관련 유물이 확인된 묘역 유적이다.
역사는 문헌에만 남지 않는다. 때로는 땅속에 묻힌 유해와 이름이 적힌 작은 표지석, 그리고 오랜 구전 끝에 다시 드러난 묘역이 더 직접적으로 시대를 증언한다. 전북 완주 남계리에서 확인된 묘역 유적은 바로 그런 경우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해박해와 그 뒤를 이은 신유박해의 핵심 순교자들이 한 공간 안에서 다시 확인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천주교의 초기 역사가 단지 기록 속 사건이 아니라, 실제 인물과 장소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유산청이 「완주 남계리 유적」을 국가지정유산 사적으로 지정 예고한 것은 이 공간이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신앙의 도입과 충돌, 박해와 공동체의 지속을 함께 증언하는 역사 현장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적의 의미는 먼저 인물의 상징성에서 비롯된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순교자들이다.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조선 후기 유교 질서 속에 학문으로 유입된 천주교가 신앙으로 자리 잡으며 기존 사회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역사적 전환점과 맞닿아 있다. 윤지헌 역시 신유박해 시기의 순교자로서, 남계리 유적은 1791년과 1801년이라는 두 차례의 결정적 박해를 한 공간에서 이어서 보여 주는 매우 드문 사례가 된다.
남계리 유적은 예전부터 천주교 관련 묘지가 있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던 곳이었다. 그러다 2021년 3월 천주교 전주교구가 묘역 성역화를 위해 무연고 무덤 이장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후 정밀 발굴조사에서 피장자의 이름과 출생연대 등이 적힌 ‘백자사발 묵서명 지석’이 출토됐고, 수습된 유해에 대한 분석과 유전자 검사 등을 통해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묘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는 종종 전승이나 전설의 형태로 전해지지만, 그것이 학술적·과학적으로 확인될 때 사실이었음을 통해 사회적 공신력을 갖게 된다. 남계리 유적은 단순히 “그런 곳이라고 전해져 온 장소”를 넘어, 출토 유물과 인골 분석, 유전자 검사라는 다층적 검증을 통해 실제 인물과 연결된 묘역으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종교사 연구뿐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사, 장례문화, 공동체 형성 과정까지 함께 해석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발굴조사 결과도 매우 흥미롭다. 유적에서는 총 21기의 분묘가 3차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봉분의 크기가 클수록 조성 시기가 이른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신해박해와 신유박해라는 약 10년의 시차를 두고 발생한 사건 이후, 핵심 순교자들이 먼저 매장되고 뒤이어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이 추가로 묻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곳은 단순히 개별 순교자의 묘역이 아니라, 박해 이후에도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남계리 유적의 가치를 한층 높인다. 한국 천주교 초기사는 흔히 박해와 순교의 역사로 요약되지만, 그 이면에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삶이 있었다는 의미다. 남계리 유적은 바로 그 ‘지속’의 흔적을 보여준다. 박해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종교사의 서술을 단순한 탄압과 순교의 기록에서, 공동체의 생존과 계승의 역사로 확장해 읽게 만든다.
국가유산청은 이 유적이 조선 후기 전통적인 유교 중심 사회에서 천주교가 학문으로 들어와 신앙으로 자리 잡으며 기존 질서와 충돌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역이 갖는 상징성은 물론, 조선 후기 천주교의 유입과 전개 과정, 그리고 박해의 역사를 한 공간에서 살펴볼 수 있는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실제로 남계리 유적은 종교사적 상징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의미를 품고 있다. 이곳은 단지 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얼마나 큰 긴장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유교적 예제와 조상 제사를 중시하던 사회에서 천주교는 단순한 외래 종교가 아니라, 기존 가치체계 전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기에 박해는 특정 종교에 대한 탄압이면서 동시에 조선 사회가 자기 질서를 지키려 했던 방어적 충돌의 양상이기도 했다. 남계리 유적은 바로 그 충돌이 인간의 죽음과 공동체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역사적 현장이다.
또한, 이 유적은 ‘한 공간성’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한국 천주교의 초기 순교자들, 그리고 서로 다른 박해 시기의 희생자와 공동체의 흔적이 한 장소에서 함께 확인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보통 역사는 사건별, 인물별, 시기별로 나뉘어 기억되기 쉽지만, 남계리 유적은 그 분절된 기억을 하나의 공간에 모아 놓는다. 이 점에서 남계리는 단지 발굴 성과를 넘어, 한국 천주교 초기 역사를 입체적으로 읽게 하는 장소로 평가할 수 있다.
국가유산청은 6월 17일부터 30일간 지정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뒤, 국가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사적 지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아울러 앞으로도 우수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 행정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적 지정 예고는 문화유산 행정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좋은 유산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그것을 찾아내고, 검증하고, 사회적으로 해석하며,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는 제도적 의지가 필요하다. 남계리 유적이 지닌 의미는 종교계 내부의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충분히 살아날 수 없다. 그것이 국가적 보존 체계 안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한국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할 역사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완주 남계리 유적」의 사적 지정 예고는 묘역 하나를 보호 대상으로 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후기 신앙의 도입과 박해, 순교와 공동체의 지속이라는 복합적인 역사를 한 공간 속에서 다시 읽어 내는 일이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지만, 문화유산은 그 기록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마주하게 만드는 통로다. 남계리 유적은 바로 그 통로의 하나이기에 한국 천주교 초기사의 상징적 장소이자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현장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