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02-2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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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지로 말고 즐기며 할 수 있을까?
    속담에 “하기 싫은 일은 오뉴월에도 손이 시리다”라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열성이 나오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도 지난날 업무가 나에게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단체 생활에서 피하고 싶은 책임이 맡겨질 때면, 거부할 수도 없고 곤혹스러워 부담감에 속을 끓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억지로 하면 몸에 해롭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분명하다. 그래서 억지로 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방안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 원숙함 말이다.   나는 억지로 남의 일을 대신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스트레스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 그 사례의 주인공은 성경 속의 구레네 시몬이다. 그는 예수라는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젊은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생각과 모습은 추리하여 기술함을 전제한다.   우선 시몬이란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근처 시골 마을 키레네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축제를 즐기려고 예루살렘까지 1,600km나 되는 길을 아마도 수개월은 걸려 도착한 순례자로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 엉뚱한 일이 닥친 것이다. 골고다 언덕길에 많은 사람이 웅성대며 늘어서 있기에 헤집고 드려다 보니, 어떤 사람이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가다가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참담하고 측은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때 느닷없이 로마 병정이 창끝을 그의 어깨에 대고 지명하면서 대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나? 그는 로마의 식민지인이었기에 억울하지만, 그 죄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나도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담될 땐 영락없이 억지로 움직인다. 그러면서 “책임과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항변하며 못 마땅해 한다.   시몬도 십자가를 지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리라. 과연 그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메고 산 정상까지 올라갔을까? 억지로일까? 아니면 자원하는 마음일까?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리라곤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나, 예수께 병 고침을 받았거나, 보리 떡이라도 얻어먹은 사람이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하는데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시몬은 여행을 즐기려고 돈을 모아 먼 길을 왔는데 알지도 못하는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산 위까지 올라가야 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었을 것이다.   자기를 점찍은 로마 군인이 미웠고, 큰 키와 건강한 몸집 때문에 지명 당한 것도 억울하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 죄수에 대해서도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는 억지로 지게 된 치욕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투덜대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냥 걸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분노를 삼키고 땀을 흘리며 산을 향해 얼마간 올라가다가 문득 자기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그 죄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그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을 성찰해 볼 때가 있지 않은가?   그는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죄수를 원망의 눈초리로 뒤돌아보았을 것이며, 순간 죄수와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죄수의 사랑스러운 눈빛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과 원망은 경외함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죄수에 대해서 존경심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즐거웠을 것이고, 지금까지 억지로 메고 온 무거운 십자가는 당연히 자기가 져야 할 몫이고 책임이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힘들고 부담되는 일을 헌신적으로 해내는 것을 보면, 그 상대가 싫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 자신의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우리 역사의 선현 중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는 순간까지 책임을 다했던 위대한 분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스스로 해결하였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지도 않았고 책임을 면하려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물을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부담감과 거부감의 차이에 달렸다고 본다.   거부감이 평온함으로, 억울함이 경외함으로 바뀌면서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된 시몬을 상상해보자.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남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쳐보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자”라고 생각하면 시야도 더욱더 넓어지고 언어와 표정도 여유롭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들고 부담된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즐기며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즐기며 하는 일은 그 일 자체로 즐겁고 행복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일을 즐기며 할 때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스트레스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즐겁게 하여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어 큰일을 해냈다면 우리 마음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여기엔 반드시 겸손과 배려와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것은 그 일에 종이 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되고, 부담감과 거부감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에 주인이 되어서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최병우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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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2017년 인문학 개강을 맞으며
    오늘은 2017년 1월 12일 목요일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인문학 개강일이다. 나는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정리하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교육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강의실을 둘러보고 책상과 의자를 점검했다. 등록 숫자에 맞추어 38명이 수강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었다.   시간이 되자 강의실로 들어서는 교수님과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니 개강일이 더욱더 실감 났다. 교육시간이 되니 교실이 꽉 찼다. 강의가 시작되면서 6명이 더 참석하였다. 총 42명이 강의실을 찾아 인문학 강좌는 성황을 이루었다.   나는 지난해 인문학반 원우들을 대표해 경기도평생교육원에서 실시한 동아리 수기 공모에 응모했다. 이것이 우수상으로 평가받았다. 내 개인이 받은 상이 아니기에 관장님께서 인문학반을 찾아 수상식을 하기도 했다. 관장님이 인문학반을 찾아와 박 교수님과 인사를 나누고 시상식을 했다.         관장님은 경기도 31개 시·군·구에서 활동하는 모든 동아리 가운데 우수상을 받은 것은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의 자랑이라고 격려했다. 아울러 “우리가 발간한 《시니어들의 인문학여행》을 전국에 보급한 결과 ‘시니어 인문학’은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어 감사한다”며 “올해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시니어 인문학’의 대표 주자라는 자부심을 더욱더 드높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17년 1학기 등록 인원은 계속 수강 인원 25명, 처음 수강 17명으로 총 42명이다. 개강일인 오늘 눈이 내려 조금 걱정했지만, 푸근한 날씨에 내린 눈이어서 다들 하늘의 축복이라고 반가워했다. 수강 어르신들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더 해맑고 환해 보였다.   나는 1시간 강의를 끝내고 휴식시간을 이용해 출석을 확인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협조해주신 어르신들께 감사를 전했다. 이 시간 반장과 총무를 선출해야 하기에 반장선출 안건을 공지했다. 부족한 내가 2017년을 맡게 되었고 총무로는 우리 반 최연소 강정순 원우가 만정일치로 선출되었다. 나는 우리 인문학반의 마당쇠 역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총무도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겠다고 다짐함으로써 인문학반의 2017년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다.         교수님께서 강의 끝부분에 노사연의 <바람>이란 노래를 들려주었다. 멜로디도 좋았지만, “사막을 걷는다 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가사에 모두 큰 감동을 하였다.   우리 시니어들은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이 먹어 가는 삶을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가 배우는 시니어 인문학은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에서 출발해 도도한 물결처럼 전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일에 우리가 주역으로서 멋있고 힘 있게 쓰이기를 원한다. 책도 출간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도 실행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지난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최선을 다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시니어협회’로 꽃이 피었다.   나는 “정부에서 인문학 진흥을 위해 연간 2,000억 원을 투자하여 이공계 대학생들도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며 또 한 번 자부심을 품게 된다. 우리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인문학반은 시대를 앞선 계획과 실천으로 ‘시니어 인문학’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인문학반 시니어들은 인문학적 사고력과 통찰력을 갖춘 멋진 모습으로 새로운 청춘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런 시니어들을 잘 섬기며 700만 명이나 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희망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하려고 한다. ‘사람책도서관’ 활동을 통해 우리 시니어들의 경험과 지혜를 모든 국민이 공유하여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갈 계획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명랑하게 바꾸어 나가는데 우리 시니어들이 선구적 역할을 하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져본다. 유럽의 성당 첨탑에는 수탉모형이 바람개비와 함께 돌아간다. 이것은 닭이 울이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올해를 상징하는 동물이 상징이다.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을 잠에서 깨운다. 이처럼 우리 인문학반 시니어들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만인들을 깨우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힘찬 도약을 이루어 갈 것이다. 배영환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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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7
  •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가치 있게 산다
    어떤 보석상이 수석 전시회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한 돌멩이 앞에 매겨진 값은 15달러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돌멩이는 원석이었다. 전시회 주인에게 정말 15달러인가를 재확인했다. 그러자 주인은 오히려 5달러를 깎아주어 그 원석을 10달러에 샀다.   보석상은 10달러에 사 온 원석을 다듬어 목걸이, 팔찌, 반지 등으로 아름다운 보석으로 디자인했다. 이 원석을 가공해서 판 보석상은 무려 228만 달러 (약 26억)을 벌었다. 만 원짜리 돌멩이가 26억 원으로 변한 것이다.   보석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보석을 귀하게 여긴다.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고 값진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한다.   가치는 좋음과 나쁨·옳음과 그름·아름다움과 추함 등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과 감성의 체계를 가리킨다. 어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그 건물이나 다른 물건은 잃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구조작업을 한다.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20대에 나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때가 있었다. 이런 탓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때도 있었다. 그제야 내 가치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건강을 잃고 난 후에야 건강이 귀한 줄 알고, 돈을 잃고 난 후에야 돈이 귀한 줄 안다.   사람을 잃고 난 후에야 그 사람이 귀한 줄 알고 좋은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그것이 좋은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것이 바로 어리석은 모습이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정한다. 나 자신의 가치가 소중함을 알 때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진다.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삶의 책임도 내가 진다. 일과 직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놀고먹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그만 일이라도 그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맡은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자부심을 길러야 한다. 이런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책임을 전가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는다.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며 기쁨을 나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며 긍정적인 삶을 산다. 욕심을 버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비생산적이고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조화를 이루며 기쁨을 창출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는데 자아실현의 욕구가 가장 상위에 있다고 했다. 그 아래에 계층적으로 존경, 소속과 애정, 안전, 생리적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이 이론은 하위에서 상위로 욕구가 옮겨가고 단계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자신이 괜찮은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인문학반에 출석하면서 여기에 소속된 자부심으로 굉장한 힘을 얻으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소속감이 없는 사람은 외롭다. 외로움 속에 사는 사람은 항상 우울하다. 우울증이 오래되면 치매가 된다. 공동체라는 소속감을 느끼고 살 때 외로움을 이길 수 있고 치매를 극복할 수 있다. 소속감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곧 행복을 꽃피우고 누리는 일이다.         이제는 60~70세는 노인이 아닌 시대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노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좋은 소속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귀한 소속감을 위하여 열심히 뛰고 있는 박요섭 교수님은 시니어들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시니어 자신들이 국가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재능을 가치 혁신하여 아름다운 삶을 펼치도록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시스템에 몰려와 소속감을 누리며 좀 더 나은 삶을 실현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모든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행동의 원인은 소속감의 결여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람들은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핑계를 댄다. 그러나 핑계를 찾기 전에 대안을 찾아야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많은데 왜 고독할까? 소속감이 없을 때 고독을 느낀다. 소속감은 자존감을 높여준다. 자존감이 높아질 때 정서가 밝아지고 감정의 기복이 사라진다. 자존감은 자신감으로 연결되어 긍정의 힘을 창출하게 한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도전과 열정이 분수처럼 힘차게 솟구친다. 자신이 소속되어있는 곳에서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봉사의 삶이 꽃핀다.   하고 싶어지고 만족함을 누린다. 가치 있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가치 혁신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보급하며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아인슈타인은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고 말했다.    시각 장애인으로 미국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강영우 박사는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안 그의 삶은 <빛은 내 가슴으로> 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다.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보다 성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살아갈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돈이 없다고,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넋두리하지 말라. 대신 자신의 평범한 삶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생각에 따라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누구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본래성을 인식하고 알아갈 때 가장 자신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만 하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찬란한 행복과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유정애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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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7
  • 내가 한 단 한 번의 결혼 주례사와 아픈 기억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결혼식 주례 사연이 적혀있는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책갈피 사이에 누렇게 바랜 채 끼어있는 그 쪽지는 나를 40대의 추억으로 빠져들게 했다.   1980년대 결혼식은 지금에 비하면 소박하고 촌스러웠다. 그때 나는 남들처럼 결혼식에 자주 참석한 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신랑·신부와 하객들 앞에서 주례사를 멋지게 해 봤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유명인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 누가 주례사를 부탁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주례 예약에 밀려 동분서주하는 남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아내와 어린 자식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것 같아 괜한 심술이 났다.   내 평생 한 번 만이라도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어 보았지만, 그냥 세월만 갔다. 그러다가 1984년 내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하늘의 별 따기 같은 평생소원을 이룬 셈이니 이만저만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사람은 고향 후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졌다가 입대 전에 잠깐 만났었을 뿐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전화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40세였고 학부형인데, 39세인 그 친구는 아직도 노총각이었다. 지금이야 그 나이가 뭐 별거냐 하겠지만 그땐 홀아비나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자기 결혼식이 4월 29일이니 참석해 달라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참석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결혼식 사회를 꼭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내 나이에 아무래도 어색하긴 했지만, 이유를 달지 않고 알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게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식을 성수동 자기 형 집에서 전통방식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자신이 없어 못 하겠다고 거절했으나 하도 조르는 바람에 응낙하고 말았다.   어느덧 결혼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막상 사회를 맡아 진행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보통 예식장에서 하는 것이라면 사회자는 그냥 정해진 순서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전통결혼식은 구경한 지도 오래되어 자신도 없는 데다 주례자가 사회까지 맡아 모두 진행해야 하니 큰일이었다. 지금이야 관련 자료를 쉽게 얻어낼 수 있지만 그때는 누구한테 조언도 들을 수 없어서 큰 고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쉽게 풀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게 가정대백과사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1년도에 삼중당에서 출판한 1,600쪽의 두꺼운 책이다. 넉넉지 못한 신혼살림임에도 꼭 가져보고 싶어 큰맘 먹고 거금을 주고 할부로 구매한 나의 유일한 지식 보물창고였다. 지금도 낡고 빛바랜 채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데 꺼내서 책갈피 줄을 위로 당겨보니 곧바로 구식결혼에 관한 내용이 펼쳐졌다. 33년 전에 여러 번 읽고 고심했던 흔적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책에 보니 전통혼례에 대하여 상세히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 송나라의 4례 예식을 따랐다. 신랑 집에서 신붓집으로 사주를 보내는 납채(納采), 신붓집에서 택일단자를 보내는 연길(涓吉), 신랑 집에서 신붓집으로 예물과 폐백으로 청실홍실을 보내는 납폐(納幣), 신랑이 친히 신붓집에 장가갔다가 예식을 치른 후 신부를 맞아 오는 친영(親迎)의 4례다. 그렇다면 친구가 내게 결혼식 사회를 부탁한 의도는 결국 신랑 집에서 친영의식인 초례식을 진행해 달라는 셈이었다.     나는 그 초례식을 상상하며 주례로서 진행해야 모든 것들을 꼼꼼히 메모했다. 볕가리개와 병풍, 신위 상과 정화수를 준비하고, 신랑은 사모관대, 신부는 나삼에 칠보 족두리를 하고 연지를 찍는다. 신랑이 신부에게 한번 절하면 신부가 두 번 절하고 답례로 신랑이 한번 절한다. 이어서 신부가 일어나 재배하면 신랑이 답례로 한번 잘함으로 상견례를 마친다.   이후 향을 피우고 재배하므로 하늘에 부부 됨을 알리고 맹세를 한다. 이어서 청실홍실을 감은 축복의 술잔을 신부가 신랑에게 건네면 조금 마시고 신부에게 건네서 마시게 한다. 다음 반대로 한 번 더한다. 이어서 맞절을 하고 축하객에게 인사한 후 신위에 재배하면 초례가 끝난다는 것 등을 메모했다. 그리고 친구에게도 설명하고 준비하게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뭔가 허전했다. 내게 제일 중요한 관심사인 주례사가 빠진 것이었다. 전통예식에는 별도의 주례사가 없다. 평생소원이 주례자가 되어 품위 있게 주례사 한번 멋지게 해 보는 것인데 고작 사회자로만 끝낼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웠다. 모처럼 굴러온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조바심에 생각을 바꿔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주례사를 순서에 넣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주례사라는 말이 격에 맞지 않을 것 같아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아냈는데 주례사를 축사로 바꾸면 되겠다 싶었다. 내 잣대로 정했지만, 기분은 최고였고 마음도 편해졌다.   내친김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축사를 근사하게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글쓰기가 맘대로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종이쪽지에 내 나름대로 요점만 간단히 적어 철저히 준비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이발은 물론, 정장까지 차려입고 한껏 모양을 내고서 결혼식을 할 장소에 도착하니 모두 반겨 주었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넉넉지 못한 형편임에도 마당에 볕가리개를 쳐서 햇빛을 가려놓고, 병풍이며 초례상 등을 그런대로 잘 차려놓았다.   친구인 신랑과 눈인사를 한 후 메모한 순서대로 맞절도 시키고, 술잔도 오가게 했고, 반지도 서로 끼우게 하며 잘 진행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반예식장에서 하는 성혼선언문까지 낭독한 것은 좀 과했나 싶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례사였다.   이윽고 기다리던 주례사를 할 시각이 되었다. 주례사가 아닌 축사로 격하되어 좀 아쉽기는 했다. 나는 약 5분 동안 주례사를 하는 기분으로 축사를 위엄 있고 힘차게 외쳤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적어본다.   축사 우리는 1년을 기대하며 곡식을 심고, 10년을 기대하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기대하며 사람을 심는다고 한다. 오늘 100년을 위해 사람을 심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며 가는 것이다. 한자 사람 인(人)자의 모양을 설명하며 서로 의지하며 살라고 했다. 신랑과 신부를 두 개의 질그릇으로 비유하며 사용하기에 좋은 그릇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해야 한다. 용서와 이해로, 상대의 좋은 것은 빨리 보고 나쁜 것은 더디 보라. 또 서로 관심을 가지라는 뜻에서 악의 두목 선거에서 무관심이 전쟁과 질병을 물리치고 선출된 예화를 들려주었다. 2. 씻어낸 질그릇에 사랑을 담으라 했다. 혹자는 자신, 돈, 쾌락, 지식, 지위, 권세를 담으나 희생적인 사랑을 담아라. 또 목표와 꿈을 담아라. 꿈이 없으면 실패한다고 강조했다.   여기 까지다. 그다음은 메모한 쪽지가 없어져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축복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라고 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마치고 마루에서 국수 한 그릇을 대접받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자랑하니 아내도 덩달아 좋아하며 아이들한테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그 후 열흘 정도 지났을 즈음 친구에게 전화하여 신혼 재미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그들은 나를 크게 실망하게 하고 말았다. 결혼 일주일 만에 헤어지고 만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기억될 나의 보람을 그들이 한순간에 날려 보낸 것이다. 친구가 하는 말이 신부가 가정이 있는 유부녀였고 나이까지 속여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나름대로 마음을 다해 위로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그들이 너무 미웠다. 잘 살기를 바라며 축사 아니, 주례사까지 했는데 사기 결혼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결혼식 진행을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며 열흘 동안이나 정성껏 준비했던 나의 수고가 일순간에 사그라진 것 같아 너무 공허했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고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그냥 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33년이 지난 요즘의 결혼식 주례자들은 어떤 마음일까? 세대 구분 없이 이혼하는 가정이 너무 흔하다 보니 주례를 부탁받으면 선뜻 두려운 마음부터 들 것 같다. 그래서 주례 없는 결혼식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주례 덕분에 행복한 가정을 꾸몄다는 보람과 성취감에 많은 주례자는 그 임무를 계속 이어갈 것 같다.   주례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결혼식 끝나기가 무섭게 여행을 떠나는 요즘의 신랑·신부들이 성혼선언을 해준 주례자의 이름과 주례사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주례자와 주례사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주례자는 성혼선언만 한 것이 아니라 이혼을 막아낼 책임도 있다.   이제껏 단 한 번 한 결혼식 주례사인데 그만 아픈 추억이 되고 말았다. 33년이 흘러간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그 일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진다. 물론 그 일은 애당초 남을 속인 잘못된 일이었기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진 결혼이라면 이혼은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며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는 매우 성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최병우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1-27
  • 자신을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지혜
       사람들이 함께 무엇을 하려면 기쁜 일도 있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이 생긴다. 여러 사람이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성품과 생각이 다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만 양보하고 조화하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 생각만 고집하면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옆자리에 앉아 웃고 즐기며 음식도 함께 나누어 먹다가도 내 생각과 다른 상대와는 충돌한다.         관계성은 사람의 매우 주요한 특성이다. 우리는 어울리는 사람과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가족끼리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갈등도 공감으로 바꾸면 조화로 꽃이 피게 된다.   사람 관계는 삶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좋은 관계는 좋은 번짐으로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쁜 관계는 나쁜 번짐으로 상대방을 인생의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용서와 양보와 배려가 꽃피면 관계를 아름답게 변화한다.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다. 그동안 옆자리에 앉아 서로 챙겨주며 재미있게 지냈던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았다.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본의와는 다르게 뜻이 잘못 전달되어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과 바른 소통은 이런 문제를 잠재울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잘못을 지적당하면 싫어한다. 아니 분노한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양보와 타협, 조화와 협력은 평화의 밑거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이기심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더 적극적으로는 조화를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아울러 타인을 존중하며, 배우려는 생각과 실천을 게을리 지하지 말아야 한다.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유연하고 따뜻한 자세를 보인다. 이런 사람은 봄에 피는 꽃처럼 주변의 사랑을 받으며 기쁨을 주게 된다.         누가 알려주지 않음에도 식물은 자신이 꽃피울 때를 정확하게 알고 꽃을 피운다. 이것이야말로 식물의 원천적인 메커니즘이다. 이와 비교해보자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때에 드러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며 가치를 발현하는 지혜를 아낌없이 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가치를 복되게 드러내며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길이라고 할 것이다. 유정애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12-20

실시간 나의인생 기사

  • 억지로 말고 즐기며 할 수 있을까?
    속담에 “하기 싫은 일은 오뉴월에도 손이 시리다”라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열성이 나오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도 지난날 업무가 나에게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단체 생활에서 피하고 싶은 책임이 맡겨질 때면, 거부할 수도 없고 곤혹스러워 부담감에 속을 끓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억지로 하면 몸에 해롭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분명하다. 그래서 억지로 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방안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 원숙함 말이다.   나는 억지로 남의 일을 대신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스트레스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 그 사례의 주인공은 성경 속의 구레네 시몬이다. 그는 예수라는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젊은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생각과 모습은 추리하여 기술함을 전제한다.   우선 시몬이란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근처 시골 마을 키레네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축제를 즐기려고 예루살렘까지 1,600km나 되는 길을 아마도 수개월은 걸려 도착한 순례자로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 엉뚱한 일이 닥친 것이다. 골고다 언덕길에 많은 사람이 웅성대며 늘어서 있기에 헤집고 드려다 보니, 어떤 사람이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가다가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참담하고 측은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때 느닷없이 로마 병정이 창끝을 그의 어깨에 대고 지명하면서 대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나? 그는 로마의 식민지인이었기에 억울하지만, 그 죄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나도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담될 땐 영락없이 억지로 움직인다. 그러면서 “책임과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항변하며 못 마땅해 한다.   시몬도 십자가를 지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리라. 과연 그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메고 산 정상까지 올라갔을까? 억지로일까? 아니면 자원하는 마음일까?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리라곤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나, 예수께 병 고침을 받았거나, 보리 떡이라도 얻어먹은 사람이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하는데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시몬은 여행을 즐기려고 돈을 모아 먼 길을 왔는데 알지도 못하는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산 위까지 올라가야 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었을 것이다.   자기를 점찍은 로마 군인이 미웠고, 큰 키와 건강한 몸집 때문에 지명 당한 것도 억울하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 죄수에 대해서도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는 억지로 지게 된 치욕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투덜대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냥 걸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분노를 삼키고 땀을 흘리며 산을 향해 얼마간 올라가다가 문득 자기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그 죄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그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을 성찰해 볼 때가 있지 않은가?   그는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죄수를 원망의 눈초리로 뒤돌아보았을 것이며, 순간 죄수와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죄수의 사랑스러운 눈빛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과 원망은 경외함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죄수에 대해서 존경심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즐거웠을 것이고, 지금까지 억지로 메고 온 무거운 십자가는 당연히 자기가 져야 할 몫이고 책임이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힘들고 부담되는 일을 헌신적으로 해내는 것을 보면, 그 상대가 싫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 자신의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우리 역사의 선현 중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는 순간까지 책임을 다했던 위대한 분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스스로 해결하였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지도 않았고 책임을 면하려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물을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부담감과 거부감의 차이에 달렸다고 본다.   거부감이 평온함으로, 억울함이 경외함으로 바뀌면서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된 시몬을 상상해보자.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남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쳐보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자”라고 생각하면 시야도 더욱더 넓어지고 언어와 표정도 여유롭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들고 부담된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즐기며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즐기며 하는 일은 그 일 자체로 즐겁고 행복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일을 즐기며 할 때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스트레스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즐겁게 하여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어 큰일을 해냈다면 우리 마음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여기엔 반드시 겸손과 배려와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것은 그 일에 종이 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되고, 부담감과 거부감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에 주인이 되어서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최병우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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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내 인생의 봄날
    우리 어머니는 매우 엄했고 아버지는 아주 자상했으니 보통의 경우와는 반대였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늘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나는 스물넷에 스물아홉 신랑을 만났다. 부모님이 배필로 정해준 신랑감은 철물점을 운영하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신랑감의 사진을 보니 눈이 부리부리하고 조금 거칠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혹시나 거친 성격일까 봐 주춤거렸지만, 그런 내 생각은 마음에서만 일어났을 뿐 달라질 건 없었다. 아버지가 슬쩍 신랑감이 운영하는 철물에 들러보니 매우 성실하고 친절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 이런 신랑은 처음 만난 날 핸드백과 화장품을 선물로 사 줄 정도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의 만남은 한 달 만에 열매를 맺어 음력 10월 27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결혼식 날부터 며칠을 술에 취해 있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찍 나가서는 늦게 돌아와 얼굴조차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의 결혼생활은 시댁 식구들과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5남 1녀의 형제 중 막내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머님을 모시고 큰 시숙 내외와 가까이 지냈다. 그 당시 나는 흰 피부에 야리야리한 외모로 예쁜 신부라고 많은 칭찬도 받았고, 나이 꽉 찬 노총각에게 시집온 것에 대해 수시로 고맙다는 말도 들곤 했다. 이 시절 내게는 동서와 시숙들의 칭찬과 격려가 큰 힘이 되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잘 극복할 수 있었다.   근처에 살던 셋째 시숙은 이른 아침 조용히 부엌에 들러서 무딘 칼을 갈아 놓기도 하고 장작도 먼저 마련해 주길 마다치 않았다. 결혼 후 4년 만에 분가했을 때도 섭섭했던 이유는 시댁 식구와 지낸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분가하면서부터는 남편이 눈에 띄게 살가워졌다. 이런 걸 보면 시댁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기에 내게 좋은 내색을 하지 못했던 같다.   셋방을 얻어 시작한 분가 생활은 내게 더 고생이었다. 우선 우물이 멀어 물을 길어 오기가 매우 고된 일이었다. 그러면서 둘째 딸을 낳고, 또 셋째 딸을 낳으며 이사를 했다. 이후로는 가게도 잘되었고 아이들도 잘 커 주었으니 기쁜 나날이었다.   큰아들은 공부를 잘했기에 남편은 아들을 도시로 보내 공부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넷째 시숙이 있는 도시로 보냈다. 자녀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니 남편은 매우 뿌듯해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늘 자상하게 대하고 정성을 다해 키웠다. 두 딸을 날마다 자전거로 등교시켰고 생일파티도 빠짐없이 챙겼다.   그런 남편이 49세 때 위암 판정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 큰아들은 고3이었고, 둘째 딸은 중3, 막내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나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둔 돈은 물론 모든 것을 동원해 남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수술하고 미국에서 수입하는 약과 주사를 써 보기도 하고 몸에 좋다는 영지버섯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좋다는 것이면 다 해보며 날마다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남편은 진단받은 지 2년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신이 아프면 아들이 시험공부 하는데 신경 쓰이게 된다고 극구 소식도 전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달래며 투병했던 남편은 아들의 대학 입학을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무섭고 두려웠다. 나에게는 울고 있을 날도 허락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남편이 남기고 간 가게 문을 열었다. 남편이 없는 일상은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채 허무함의 바람이 그칠 줄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달리고 또 달렸다.   아들은 대학에 합격했고, 둘째 딸 역시 고교생이기에 눈물은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남편이 떠난 뒤, 나는 철저히 혼자서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다. 남편의 따뜻한 위로나 칭찬은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이 외로움이었다. 새벽에 동이 트면 하늘에 있는 남편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게를 열고 해가 지면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곤 했다.   철물점에는 여자가 다루기에는 크고 무거운 물건이 많아서 무척 고된 나날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남편의 도움으로 가게는 오히려 번창했다. 이런 시간은 흘러 지금은 철물점을 아이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제 큰아들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나이었던 49세를 훌쩍 넘었다. 둘째 딸은 동국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거쳐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에서 특허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내게 이젠 편히 쉬라고 성화를 한다. 난 크게 불편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놀아보지 못한 나는 노는 것이 참으로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런 내가 2015년부터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에 나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든 생각이 진작 나올 걸 그랬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늘 마음으로만 염원했던 공부를 시작했다. 2016년 5월에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 해 우연히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내 이름이 들어간 책도 출판하고 공저자가 되는 기쁨과 영광도 누렸다.   2017년에는 중졸 검정고시에 도전하고 있다. 자식들은 지금 그걸 해서 무엇하겠느냐며 즐겁고 가벼운 걸 하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어려워서 힘들긴 하지만, 하는 데까지 도전해볼 작정이다. 나에게 남은 힘이라 할까? 자랑이라 할까? 내 이름을 찾은 것 같다.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학생으로 지내는 내가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다.   나는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삼 남매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의 격려와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요즘은 두 번째 청춘을 외치며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박 교수님의 외침으로 큰 힘을 얻고 있다.   비록 대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박사과정의 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한 나날을 살며 행복을 맛보고 있다. 이만 하면 나도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요즘이야말로 우리 인문학반 동우들 모두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고 자부한다. 이희남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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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에반젤린의 고향 아카디아의 슬픈 역사
    나는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를 수년 전에 4개월간 여행한 적이 있다. 이 주는 캐나다 동남부 끝 대서양 연안의 반도로서 면적(5.5만㎢)은 남한(10만㎢)의 절반이 넘지만, 인구는 고작 9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주 인구분포는 영국계가 80%이고 프랑스계가 18%이다. 공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환경 지역이고 주요 산업은 어업과 제지업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은 경쟁하듯 북미대륙을 탐험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세기 후 1604년에 프랑스인들이 현재의 노바스코샤 주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서로 도우며 척박한 땅을 땀 흘려 개간했다. 그리하여 캐나다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어업에 종사하며 평화로운 뉴 프랑스 마을을 건설하였다. 이들이 아카디언(Acadian)이고, 이 지역을 아카디아(Acadia)라고 한다.   그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1755년에 영불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이곳에 영국군을 보내 자국의 영토로 선포하고 뉴스코틀랜드(New Scotland)란 뜻의 프랑스어인 노바스코샤(Nova Scotia)로 지명을 바꿨다. 그리고 14세 이상의 남자에게 프랑스를 대적하여 싸우든지 아니면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아카디안’들은 중립을 고수하였으나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마을은 영국군에 의해 불타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뿔뿔이 흩어져 살던 ‘아카디안’들의 일부가 고향을 다시 찾아와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주도 할리팩스에서 서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해안가 시골 마을(쇼냐빌)의 처제네 집에서 지냈다. 약 120년이나 된 나무집이다. 처제의 소개로 그곳 아카디안 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순박함과 친절함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랑프레 유적지를 꼭 여행해보라고 권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의중을 이곳의 역사를 알고 난 후에야 감지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에반젤린 동상이 있는 곳을 갈 것이라고 처제가 말하기에 나는 그 이름이 생소해서 그가 캐나다의 유명인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웃음으로 눈총을 주며 그것도 아직 모르냐고 반문했다.   <에반젤린>은 미국 작가 롱펠로의 작품이다. 젊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인데 이 시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날 호기심 가운데 에반젤린 동상을 향하여 떠났다. 그곳은 핼리팩스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펀드만 연안의 울프빌 근교에 있는 ‘거대한 초원’이란 뜻의 ‘Grand Pre’지역이다. 풍경이 너무나 넓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우리나라 평야 지대나 천수만을 연상케 한다. 귀국 후 롱펠로의 에반젤린을 읽어보니 그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광활한 초원은 동쪽 멀리까지 뻗쳐있고, 그것은 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어 수많은 양 떼들이 풀을 뜯는 목장이 되었네. 농부들의 흐르는 땀으로 세워 올린 제방들은 바다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고, 철에 따라 열리는 수문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와 초원을 촉촉이 적셔주었네. 서쪽과 남쪽으로는 삼밭과 과수원 그리고 옥수수밭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산이 높이 솟아올라 원시림을 이루었네. 대서양에서 피어오른 바다 안개가 산꼭대기를 뒤덮어 평화스러운 이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 초원 한가운데에 아카디아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네.”   조상 아카디안 들이 이루어 놓은 넓고 아름다운 마을은 영국군에 의해 사라졌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그 벌판 한가운데 유적지를 세워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기념하고 있다. 박물관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영어와 불어로 나란히 쓰여 있었다.   “Statue of Evangeline, Longfellow's heroine” This statue of Evangeline, heroine of Longfellow's epic poem, Evangeline : A tale of Acadia, is a powerful, emotive symbol of the Deportation. It connects the story of Evangeline to the history of Grand Pre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관람한 후 밖으로 나와 에반젤린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인 초원을 보며 이 땅이 얼마나 전원적이고 평화로웠는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한가운데 에반젤린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교회가 있다.   에반젤린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이 교회가 당시의 교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방 벽면에 영국군에 의해 추방당하는 아카디언들의 그림과 방화로 불타는 집들의 그림이 게시되어있다. 순간 일제가 제암리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인들을 학살한 사건이 생각나 연민을 느꼈다.   며칠 전 쇼냐빌에서 프랑스계 주민들이 그랑프레를 꼭 여행해보라고 권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이 그들 조상의 얼이 담긴 슬픈 유적지이며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작가 롱펠로우가 이를 배경으로 쓴 <에반젤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반젤린이라는 처녀와 가브리엘이라는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이 서사시는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 흩어져 강제 이주를 당하고, 이후 에반젤린이 남편 가브리엘을 찾아 평생을 방랑하는 슬픈 이야기다.   아카디언들은 우리 민족만큼이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꿋꿋하게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들은 캐나다 국기와는 별개로 아카디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깃발을 함께 단다. 프랑스 국기에 아카디아의 별을 그린 깃발로 아카디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4개월 동안 아카디언들을 겪고 느꼈다. 우리도 마음을 같이하여 옛것을 되찾아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 그리고 서로 인정하고 아껴주는 선진사회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에반젤린>의 일부를 되새겨 본다.   이곳은 태고의 원시림. 하지만 사냥꾼의 발소리에 놀란 사슴같이 이 숲속에서 가슴 설레던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상의 생활에서도 천국의 모습처럼 보이던, 숲속을 여울져 흐르는 강물처럼 덧없이 생애를 흘려보내고 있던 아카디아 농부들의 고향이었던 그 초가 마을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름답던 농장들은 황폐해지고, 농부들은 영영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월의 세찬 바람이 먼지와 나뭇잎들을 휘몰아 하늘 높이 끌고 올라가 멀리 바다 위에 뿌리듯이, 그들은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다만 아름다운 그랑프레 마을의 전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최병우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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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사노라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나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보냈다. 어제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약간의 날씨가 다를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그날이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그럼 과연 무엇이 다르겠다는 것인가.   그 다름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적당한 때에 뜨는 것으로 생각했던 달이 지난밤에는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부모님의 얼굴이 달에 비춰 내 가슴에 달처럼 떠올랐다.   둥근달이 비친 내 마음은 그 옛날 부모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졌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금세 열아홉 꽃 같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그 시절은 비록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넉넉했던 것 같다.   사실인즉 그때가 어떻게 지금보다 풍요로웠겠는가. 하지만 이런 마음이 바로 추억이 가져다주는 풍요이다. 요즘이야 자식이 한둘이지만 그 시절에는 10남매를 둔 가정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우애가 좋았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에 대해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70여 년을 살아오다가 보니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때로는 저 달이 슬펐을 때도 있었고, 외로울 때도, 괴로울 때도 있었다. 그랬던 달이 희망 가득할 때도 있었고, 행복하게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다가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보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나는 요즘 인문학을 배우는 강의를 듣고 있다. 참으로 행복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괴테가 말하기를 사색이 자본이라고 했다. 나는 인문학적 상상력도 곧 사색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괴테는 사색의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나는 특히 ‘나이가 나를 떠나게 하라. 무엇이든 긍정하라. 그리고 실행하라’는 세 가지를 좋아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나도 물처럼 어디를 스며들든 다투지 않고 조용히 이롭게 하리라고 생각을 다듬어 본다.   누군가 진정한 지성인은 도구적 인간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의 유혹에 물들어 이기주의의 노예로 빠져들지 말자고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나를 다독여 본다. 사노라니 이렇게 인문학을 배우며 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루하루 착한 실천을 힘쓰는 행복도 누리게 되었다. 윤인수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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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칠순에 맞은 새내기 대학생
    3년 전 나는 지인을 따라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을 찾아왔다. 맨 먼저 찾은 곳은 탁구장이었다. 그곳의 첫인상은 열정과 활력이었다. 전혀 탁구를 할 줄 몰랐던 나였지만, 이 광경을 보면서 매력에 빠졌다. 나도 곧 이들과 동화되었고, 이젠 어느 정도 탁구를 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뿔싸, 잘 나가다 사고를 만났다. 탁구장에서 넘어지는 일을 당해 팔의 골절과 탈골 그리고 갈비뼈 골절까지 일어났다. 병원에 입원한 나는 우울하고 짜증스런 나날을 보냈다.   2017년 1월 10일 퇴원을 하면서 어떻게 살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후퇴보다는 전진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퇴원한 다음 날 복지관을 찾았다. 사무실에서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문의하는 가운데 문득 예전에 지인이 인문학반 수강을 권유했던 생각이 났다. 인문학반 교수님의 명강의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에 이끌리듯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인문학반에 등록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강의실로 들어섰다. 마침 2년 동안 키보드를 배웠던 강의실이었기에 심적으로 도움이 되긴 했다. 긴장감도 잠깐이었고 여기저기에서 아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금세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인문학반의 다정다감한 분위기가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가운데 교수님의 명강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강의 속으로 빨려들어 울고 웃으며 두 시간을 보냈다. 상상 이상의 기쁨과 행복이 나를 감싸며 그동안의 모든 상처를 말끔하게 치유하는 것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콧날이 시큰하게 했다. 배움과 깨달음이 주는 신비롭고 행복한 감흥이었다. 교수님은 인문학의 토대는 삶이고 그 방법은 이해와 해석이라고 하셨다. 엄청난 공감이 한순간에 밀려들며 그동안 막혔던 배움과 깨달음을 순식간에 뚫어 주는 것 같은 통쾌함을 맛보게 했다.   사실 나는 인문학에 대해 큰 거리감을 느꼈었던 터라 두렵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지나친 기우였다. 인문학이야말로 우리의 삶이고 내가 바로 인문학의 주체이고 대상인 것이다.   교수님은 우리의 삶이 담긴 대중가요도 들려주었고, 시도 해석하고 인문학 동우들이 쓴 글도 읽어주며 인문학을 풀어나가셨다. 그야말로 오십 년 만에 다시 새내기 대학생이 된 기분이 나를 행복하게 휘감고 돌았다.   그 시절에는 철없이 어울려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그때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혁신하여 보상한다는 마음이 들어서 가슴이 뿌듯했다. 얼굴에 주름이 자리 잡은 칠순의 나이에 나는 두 번째 대학생이 되었다.   교수님께서 시니어들의 삶은 보물과 같다고 하시는 말씀이 공감되었다. 이런 공감 속에 밀려오는 깨달음과 기쁨이 나를 다시 청춘으로 회복시켜주었다. “이런 것이 바로 인문학이구나!” 인문학적 상상력이 내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며, 이 황혼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실하게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가슴으로 스며들어 아름답게 물들었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기쁨에 빠진 나를 향해 다가오시며 “한 송이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라고 말씀을 건네셨다. 정말로 그랬다. 내 마음에서 싹이 튼 행복의 씨앗이 얼굴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던 것이다. 교수님의 강의와 위로의 말씀이 영화 <러브 스토리>의 배경음악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명화를 감상하는 듯, 명곡을 듣는 듯, 이 강의를 들으며 이곳,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행복에 온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아직은 팔도 시원치 않아 글씨도 예쁘지 않고, 비록 글솜씨도 좋지는 않지만, 이것이 인문학을 배우며 얻게 된 기쁨과 감동을 억누르게 할 수는 없기에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반에서 함께 인문학 강의를 듣고 계시는 동우 여러분! 저와 함께 모두 새내기 대학생의 마음으로 멋지게 사십시다. 여러분 모두의 행복과 건강을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 화이팅! 나제숙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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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고독은 아픔이 아니라 역전의 기회이다
    어둠을 물리치고 온 하늘이 불타오르는 하늘은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어둠이 지나가고 찾아오는 찬란한 빛은 마치 캄캄한 무덤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 같은 감격을 맛보게 한다.   어둠은 쉼과 긴장의 쌍곡선이다. 캄캄한 밤이 지나고 떠오르는 밝은 아침 해는 가장 가깝고도 먼 만남과 헤어짐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없으면 쉴 수 없다. 그래서 어둠은 나쁜 것만이 아니다. 곧 쉼이고 준비의 기간이며 새날을 만드는 아름다운 모태이다.   사람마다 각가지의 어둠의 시간을 지낸다. 고난의 밤은 어둠과 한숨과 눈물로 지내야 하는 아픔의 시간이다. 혼자만의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어둠에 갇혀 일어날 힘조차 없을 때도 있다. 가난이라는 어둠, 질병이라는 어둠,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배신이라는 어둠, 이혼이라는 어둠, 자녀의 문제로 발생하는 어둠 등 다양하다.   어둠 속에서 낙심하던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밝게 떠오르는 태양이다. 이것은 희망이다. 어둠이 없으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밤하늘에서만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모든 것은 어둠에서 잉태된다. 씨앗도 흙 속에서 싹을 틔우지 않던가?   그래서 어둠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어둠은 영원하지 않다. 어둠은 어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침을 낳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아침의 참된 기쁨을 아는 사람은 어둠의 시간을 원망하지 않는다. 아침이 밝아왔다고 해도 언제나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것도 인생의 묘미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느냐에 따라 삶은 그만큼 아름답게 변화된다. 절망에서 희망을 꿈꾸며 싹을 틔워야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고독의 시간 속에서 공존의 아름다움은 싹을 틔운다. 고독은 미움, 다툼, 시기, 질투를 승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시간은 무엇 때문에 울어야 했고, 가슴 아파했으며, 왜 낙심하고 절망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이때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추스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고요한 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겨울 역시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인생의 겨울이 지나고 있다면 그것은 봄을 맞이할 준비이기에 가슴 설레는 꿈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인생에서 원치 않는 안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희망의 햇빛이 비치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행복을 선물한다. 긍정의 마음은 나만을 위한 이기주의를 버릴 때 가을 하늘처럼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드넓어진다.   성경에서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한다. 저녁과 아침은 분리가 아니라 하나이다. 삶의 터전에서 이것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진정한 행복을 꽃피울 수 있게 된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거대한 날개로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앨버트로스의 비상도 시련이 만들어낸 거대한 아름다움이다.   그대여! 우리 함께 어둠을 통해 거대한 울림과 비상을 창출하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보자.   유정애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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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나의 봉담 정착기
    나는 서울 잠실에서 40여 년 동안 살았었다.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그때 잠실은 한강 변 모래벌판이었다. 여기에 대단지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이렇다 보니 아파트 후문 옆이 시내버스 종점일 정도였다.   종점은 곧 차고지를 의미하니, 얼마나 한적했을지 짐작될 것이다. 도심인 종로나 을지로에서 밤늦게 택시를 세우고 잠실로 가자고 하면 기사는 번번이 핑계를 대고 승차거부를 하는 일이 많았다.   그 먼 곳에 갔다가 승객이 없어 빈 차로 올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주변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어 서울에서도 번잡하고 공기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동네가 되고 말았다.   나는 결혼 후 장항제련소에서 근무하다가 4년쯤 되었을 때 말레이시아에 취업할 기회가 생겨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5년을 살았었다. 귀국하여 내가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곳이 잠실이었다.   내가 장만한 집은 4단지 아파트였는데 연탄보일러로 난방하는 17평형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아내는 보일러 아궁이에서 부서진 연탄재 부스러기를 긁어내느라 땀과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나를 맞이할 때가 많았다.   여동생은 우리 집 부근 2단지 19평형에 살았는데 그 아파트는 석유로 난방했다. 아내는 은근히 그곳에 사는 여동생 집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매제는 은행원이었다. 그러니 이재에도 밝았을 것이고 그런 덕택에 연탄도 때지 않는 쾌적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사람을 위해서는 어서 빨리 연탄에서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에는 아파트값이 계속 오를 때여서 모두 은행대출을 받아 집을 옮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재에는 주변머리가 없던 나는 내 손에 현금이 모이지 않으면 집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이런 탓에 여러 해 뒤에야 2단지로 옮겨 연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 2, 3, 4단지에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아파트값은 턱없이 뛰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던 2단지 19평형도 당시 재건축 계획이 없던 34평형 5단지 값보다 더 올라서 오히려 수리비를 제하고도 남는 가격이었다.   애들도 대학에 다니는 나이가 되어서 좀 더 넓은 집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2단지 아파트를 팔고 5단지 아파트를 사서 수리를 했다. 오래된 난방 파이프도 교환하고 바닥은 긁히지 않는다는 소재로 깔고 싱크대도 교체하는 대수리를 감행했다.   내가 살던 주공 5단지는 롯데월드 바로 건너편이어서 잠실에서도 제일 번잡한 곳이었다. 어느새 이곳도 재건축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40년 전에 지은 낡은 아파트가 5년 전 살 때보다 5배가 넘는 가격으로 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노후자금도 마련하지 못한 채 퇴직한 주변머리 없는 나를 신께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리라. 이참에 차라리 아파트를 팔고 공기 탁하고 번잡한 잠실을 떠나 애들이 사는 수원 근방으로 집을 옮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부동산에 전세로 집을 내놓았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 수원은 서울과 별반 차이 없는 대도시가 되었으니 그 부근 어딘가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니 봉담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지만, 순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성당에 다녀야 하니 우선 인터넷에서 봉담성당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가까운 곳에 성당도 있었다.   직접 답사도 필요 없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으니 정말로 편리한 세상이다. 일단 한번 가보기로 하고 내비게이션에 봉담성당을 입력하고 차를 몰고 나섰다. 현지에 도착해보니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여러 군데 있어서 이 정도라면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바로 옆에 나 있고 수원도 20~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통이 편리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아파트를 찾아 부동산에 전세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당장 전세로 나온 것은 없었다. 전세가 나오면 바로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잠실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집을 알아보러 봉담 부근 여러 부동산사무소를 방문하며 돌아다녔다.   며칠 후 호매실에서 전세 나온 게 있어 가보았으나 너무 낡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고 있는데 봉담에서 전세가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지은 지 10년 정도였는데 비교적 깨끗해서 바로 계약을 했다.   이렇게 하여 2011년에 지금 사는 봉담의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주 만나던 친구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는 사람들 가까이 살아야 하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데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고 만류가 대단했다.   그러나 성당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에게 교리도 가르치다 보니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 기간이 끝나는 2년이 되어 아예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서울 아파트를 정리했다. 그리고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에서 위치가 더 나은 아파트를 장만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합창도 하고 서예도 배우면서 탁구와 당구도 즐기고 있다. 특히 인문학 강의를 듣다 보면 이제 활발한 중년의 시작이라는 교수님 말씀에 새로이 힘이 솟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강사교육까지 받으라고 하신다. 이렇다 보니 내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며 행복에 젖어 든다. 내가 전혀 계획해보지도 못했던 이곳 봉담에서 누리는 나의 두 번째 청춘은 그야말로 소박하고 알찬 나날이다.   이런 내 삶은 어쩌면 모든 인간이 바라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지는 최상의 가치이고 행복이 아닐까? 내 마음에서는 어느새 깊은 감사가 맑고 싱그러운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   아! 이제 나는 이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 행복을 더욱더 주변과 나누며 풀밭으로 꽃밭으로 바꾸며 살려고 노력한다. 김상태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유자식 상팔자와 함께 누리는 두 번째 청춘
    이제 와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 행복한 것이었다. 어려웠던 일, 기뻤던 일이며 온갖 일들이 뒤섞인 하나의 묶음이 인생이리라. 그 가운데 유독 자식들에 관한 일은 가장 큰 아픔이자, 최고의 기쁨이 아니던가.   나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수유리에서 신일중학교를 나와 유한공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고2 때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창 녀석과 함께 가출을 해버렸다. 그때의 좌절과 상실감은 말로다 할 수 없다.   그랬던 아들이 돌아왔다. 아비로서 학교에 찾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학교에 다니도록 조치를 했다. 그러나 아들과 그 친구 녀석은 둘 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두 녀석은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예비고사에도 합격했다. 아들의 친구는 국민대학교에 진학했고 내 큰아들은 교사가 되겠다며 인천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점수보다 조금 하향지원을 한 것 같아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으나 참으로 기뻤다.   아뿔싸, 대학진학 후 폐렴으로 3개월이나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대구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수리조합에 다니는 아가씨를 만나서 제대한 다음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착한 며느리를 보게 되어서 매우 기뻤다.   아들의 첫 발령은 양평초등학교였다. 학교 관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아들은 손녀를 안겨주었다. 지금, 큰 손녀는 안산시청에 근무하고, 작은 손녀는 제 아버지 뒤를 이어 교사가 되었다. 큰아들도 이제는 내년이면 환갑이다.   둘째 아들은 동대문상고를 나와서 사업을 했으나 시원치 않았다. 군에서 제대하여 주유도매상으로 취업하여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여 내 속을 태웠다. 어느 날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한다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나는 무척 반대했다. 괜한 거부감으로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모른다. 화성시 남양동에서 살고 있는 둘째는 딸 둘을 낳고 화목하게 살고 있다. 둘째 며느리는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여 상장과 함께 상금을 무려 500만 원이나 받았다. 베트남 대사까지 축하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제는 다문화 시대가 아닌가? 박요섭 교수님은 늘 ‘너’와 더불어 ‘나’를 강조하신다. 나는 요즘 지난날 며느리와 나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별하려 했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반성한다.   만약 그때 박요섭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지금처럼 배우고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렇게 배우고 깨달으니, 그만큼 행복하고 며느리에게도 더 잘해주게 된다.   박요섭 교수님은 늘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합리적 의사소통 능력, 조화, 나눔, 배려, 사랑의 중요성을 쉼 없이 깨우쳐 주신다. 이런 배움과 깨달음으로 복된 나날을 꽃피워가는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인생이다.   내 막내딸은 성암여중․고를 졸업하고 미도파백화점에서 근무하다가 결혼을 해서 1남 1녀를 두었다. 큰 손녀는 경기대학교 4학년이고, 아들은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군 복무를 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내 삶의 결실이 아닌가? 나는 지금 두 번째 청춘을 살고 있다. 이 행복을 더욱더 아름답게 승화하며 가장 빛나는 하루하루를 살려고 한다. 나이에 눌리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없이 복 되고 아름다운 오늘 하루를 영원한 현재로 누릴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청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은 미래라는 욕망에 이끌려가는 제자들을 향해 구원을 부르짖는다. 바로 영원한 현재인, 오늘에 충실함으로써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내일을 맞이하라고, 그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우리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인문학반을 지도하시는 박요섭 교수님도, 우리의 키팅 선생님이고, 이 시대의 키팅 선생님이 아닌가. 인문학반 동우 여러분, 우리 모두 두 번째 청춘을 영원한 현재로 멋지게 꽃피웁시다. 김기원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목련꽃과 함께 피어날 소망의 새봄을 맞이하며
    아직은 겨울이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꽃 소식은 남쪽에서나 들려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집 앞에 서 있는 목련 나무가 나지막하게 내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한 생각에 문을 열고 나무를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벌써 목련의 꽃망울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내일을 바라보면서 하늘 보고 웃음 짓고/ 함께 피고 함께 지니 인생의 귀감이로다./ 그대 맑고 향긋한 향기 온 누리 적시네./ 그대처럼 우아하게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   경희대학교의 설립자 조영식 박사가 작곡한 <목련화>라는 노래이다. 구구절절 공감되는 가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를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유독 흰색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이리라. 순수함은 윤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생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수많은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나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해석을 함으로써 살아간다.   윤리가 배제된 삶이라면 경제적으로 크게 넉넉해도,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그것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올봄도 흰 꽃을 피워 우리를 순수하게 회복시키라고 무언의 깨우침을 주게 될 목련꽃의 봉우리를 보고 있다.   그리고 <목련화>의 가사를 음미하며 우리 모두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으로 생각한다. 박 교수님은 늘 우리에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토대에서 살아야만 최상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부론》의 저자이자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류가 축적한 경험을 통해서 모두가 공감해온 것으로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적합한 승인을 할 수 있는 마음속 가상의 판단자를 ‘공정한 관찰자’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순수’라고 생각해본다. 사랑도 순수해야 한다. 순수라는 것은 윤리의 바탕 아래 인간 본래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본다. 나는 피어날 준비를 하는 목련꽃 봉우리를 보면서 이 봄을 가장 순수하게 살아볼 작정이다.   그래서 어느 해 봄보다 2017년의 새봄을 설렘 속에 맞이하고 있다. 우리 인문학반 동우들에게도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2017년의 새봄이 가장 벅찬 기쁨과 행복을 선물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권영춘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생각을 바꾸면 삶이 행복해진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어떻게 하면 새롭게 맞이한 이 해를 이전보다 더욱더 잘 살 수가 있을까? 그 방법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다.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고 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오히려 달려간 만큼이 손해가 된다. 그래서 나는 먼저 올 한해를 살아갈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아름답게 달려갈 작정이다.   돌아보니 작년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 년이었다. 내 생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모든 지식과 지혜의 가치를 혁신하여 새롭게 열매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과를 얻었다. 내가 책을 출간하는데 동참하고 나도 저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우리 인문학 동우들과 《시니어들의 인문학 여행》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벅찬 감동과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정말 보람 있는 한 해였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60세를 넘어 70세가 되는 나이에 쉽게 꿈꾸기 어려웠던 일이 아닌가. 열심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 것이다.   지난날 60세를 맞으며 왠지 모를 우울함 속에 허무함에 시달렸다. 이런 괴로움의 흐름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큰 아픔이 찾아왔다. 나와는 늘 소통하며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던 큰 올케를 찾아온 암은 끝내 나와 올케의 사이를 영영 갈라놓고 말았다. 아픔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마저 나를 떠나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나는 삶의 의욕마저 추스를 길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슬프고 허무했다. 그저 우울한 시간이 연속이었다.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겨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냈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바로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이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의 통로였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깨달으며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2년 전과 비교해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때는 늙어가는 초라함이 내 마음을 짓눌렀고, 더는 아무것도 추구할 수 없다는 허무함과 우울함에 슬펐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 삶이 환경에 휘둘리는 대로 이끌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희망으로 내 삶을 역동적으로 움직여 나가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 라틴어로 “나도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는 말이다. 나는 우리 동우들을 향해 “희망을 희망하라”는 말을 외쳐본다. 나는 내 생각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행복하다.   이곳에서 만난 동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때, 또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분들을 만나면 그 순간 나는 매우 행복해지고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요즘은 사람들은 가족이라고 해도 일 년에 몇 번도 못 만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웃이 사촌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마음으로 요즘 이곳에서 만나는 분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나의 이 모든 변화는 인문학 박 교수님의 명강의가 가져다준 결과이다. 한 말씀 한 말씀 들으면서 깨달음을 얻으며 마음속으로 깊은 감명을 받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변화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좋은 강의를 더 많은 사람과 같이 듣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소개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똑같은 현실이지만 생각을 바꾸면 삶이 변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써본다. 그 우울하고 슬펐던 생각이 변하여 이제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은혜를 베푸시어 이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주시고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올 한 해도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롭고 아름다운 일들을 기대하며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강정순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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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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