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04-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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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창시절
    1960년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4·19 혁명(1960년)을 거쳐 5.16 군사 정변(1961년)으로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에서도 여자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아갔다.   외갓집은 잘살았던 집안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계실 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을 가지고 다녔다. 2km를 걸어간 다음 6km를 기차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8km가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서 공부할 준비물을 샀다.   교복은 선배가 입었던 헌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스타킹 한 켤레로 3년을 지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전기다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로 된 둥근 다리미에 빨갛게 불이 붙은 숯을 넣고 옷을 다리다 보면 멀미를 해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모내기나 밭일을 해야 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농부들이 먹을 밥을 해놓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생이 주부가 하는 일을 다 해야 했던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약한 나는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이면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교실은 3층이었다. 나는 3층을 올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한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층 올라가서 쉬며 교실에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쉬어야 한다. 공부하랴 집안 일하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노는데 나는 그것까지도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은 외갓집에서 등록금을 주어서 공부했으나 2학년부터는 어머니가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나의 등록금 대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시험도 보지 못하게 했다.   종아리는 맞을 수 있었으나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종아리 몇 번을 맞고 난 다음에야 시험을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등록금 달라는 말을 겨우 꺼내야 했었다. 8km를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내 끈기를 보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아무리 고생이 돼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렇게나마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나의 꽃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학교생활 통지표의 통신란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똑같은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명랑함 부족”이란 문구였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는 그저 착한 아이였다. 착한 것이 아니라, 명랑함 부족과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자란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에서만 보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 아이로 비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던 내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이고 삶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나를 품어주는 보금자리였고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사신 어머니는 딸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위로요,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내 성품이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위로로 삼아본다.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4-16
  • 내 유소년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전라북도 김제이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대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지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난은 물질보다는 외로움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계셨고 태어난 지 8개월이 못 되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고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오빠가 나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 먹여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부르곤 했다. 허공에 대고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서른한 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남매를 기르며 사셨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땐 여자가 돈을 번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얼마 되지도 않은 논밭을 가꾸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여성이다가 보니 큰 힘이 필요한 일에 부닥치면 자장 힘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둡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는 어머니가 한번 말씀하시면 감히 “아니요”라는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동네 어른들은 내게 ‘착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머니는 늘 들로 일하러 가셨고, 열두 살 위인 오빠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외로움이 내 친구였던 셈이다. 오빤 청개구리처럼 항상 어머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옛날엔 겨울이 되면 시골에서는 일거리가 귀했다. 이렇다 보니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오빠는 어머니 몰래 집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가지고 나가 도박 자금으로 썼다. 그러니 집안 분위기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밤 시골길은 얼마나 어두운가? 얼마나 캄캄한지 앞뒤를 분간할 수도 없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딘가에서 도박에 빠져 있을 오빠를 찾아오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창호지를 붙여 만든 조그만 등에 등잔을 넣고 불을 밝히며 캄캄한 동네를 찾아다녀야 했다. 무섭기는 얼마나 무서운가? 어두운 밤길보다 어머니의 명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나는 손에 장갑도 없이 눈을 헤치며 오빠를 찾아 나선다. 온 동네 집집이 들러보면 불이 켜진 집이 있다. 나는 그 집 앞에 가서 가만히 들어본다. 그러면 영락없이 화투 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오빠” 하고 불러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부르면 누군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래도 오빠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불쌍해서 오빠를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아니 그다음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야 했다. 자연히 어머니와 오빠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지옥 같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얼마나 문밖에서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한창 뛰어놀 때인데도 뛰어놀지도 못하고 어른들 속에서 희생양으로 살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어려서부터 이런 아픔을 가져야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기쁨이었다. 교회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교회학교에서의 활동은 내 최고의 삶이었다. 성경퀴즈대회에서도 암송대회에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는 학용품을 거의 사서 쓰지 않았다. 모두가 교회에서 받은 상품이었다.   어둡게만 보였던 나는 항상 얌전하고 착하고 순종 잘하는 아이였다. 이런 모습 때문에 분에 넘치는 칭찬과 함께 애늙은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살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교회에서는 일꾼이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루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일깨워 새벽기도를 하게 한다.   새벽이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한번 불러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치우는 바람에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덕분에 나는 기도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나는 지금까지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었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건강은 항상 좋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병이 나면 어린 내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해야 했다. 죽을 쑤어드리고 밤새 온몸을 주물러드리며 잠이 드실 때까지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가 잠이 드시면 나도 옆에서 잠을 잤다.   반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일이 없어서 조금은 편히 지내신다. 그때면 어머니는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신다. 기도 중에 잠이 드신 어머니 모습을 보면 천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일어나면서 너무나 기뻐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정애야 나는 천국을 보았다. 그곳에서 내 집이 얼마나 좋은지 황금으로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집이더라.”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든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6
  • 산책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호천 산책에 나섰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지난 일들을 성찰하며, 하루를 계획하며 실천을 그리며 걷는 이 길은 내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준다. 이런 생각과 함께 율목교를 내려선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친구들이 나를 반겨준다. 한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오늘은 시냇물 소리도 유난히 활기차다.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여러 가지 꽃들 곁으로 나비가 춤을 추고 물고기들은 내 발소리를 아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노루교에 가까워지자 급경사에 쌓아놓은 돌 틈으로 잔잔히 흐르던 시냇물이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활력이 넘친다.   옆에 있던 갖가지 꽃들도 제각각 자신을 봐달라며 자태를 뽐낸다. 나는 “그래 아이고, 다들 예쁘구나”라고 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푸르렀는지 온갖 식물들이 경쟁하며 푸른빛을 드러내고, 여름 냄새로 내 기운까지 북돋아 준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 나온 아들의 모습이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어떤 명화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저런 모습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언론을 통해 서로 다투고, 속이고, 싸우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침 산책길은 그런 후유증을 늘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내 샘내교에 이르니, 황새가 긴 다리와 가냘픈 목을 쭉 내밀고 어서 오라는 듯 고개를 든다. 오리 가족은 행사라도 하는 듯 자맥질과 유영을 뽐내며 나를 환영해준다. 이런 여름의 광경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인 양 행복에 젖는다.   여름의 길목이라 아침인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투명한 진주가 되어 송골송골 맺힌다. 이때쯤이면 동남교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우리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을 떠밀리듯, 억지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선택이고 자유다. 스스로 최적의 길을 찾아 즐겁게 걸으면 된다. 산책길에서 경주는 필요 없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 같은 산책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의 인생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걷고 있다. 안순모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멀리서 찾아온 벗님들
    지난주 어느 날 저녁 우리 부부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아침까지 이어져 둘이서 별로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일주일 후인 다음 주 월요일 인터넷으로 함께 영어를 공부하는 젊은 벗들이 멀리서 오게 되어서 그 접대 문제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밤에 Skype 전화로 영어공부를 함께하고 있는 사이다. 회원들은 모두 부산, 밀양 등에 흩어져 살고 있어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서로 얼굴도 볼 겸 만나서 친목을 다지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회원들이 경남지역에 살고 있으니 화성에 사는 나만 그리로 가면 쉽게 만남이 해결된다. 그러나 꽉 짜인 일정 때문에 좀처럼 기회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공부를 마치고 나서 하는 말이 이번에 그중 세 분이 오프라인 모임을 겸하여 화성으로 1박 2일 여행계획을 잡았다는 것이다. 2주 후인 3월 11일 점심때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화성 구경을 한 후 제부도로 가서 일박 후 다음 날 오후에 돌아가는 계획이라고 한다. 그날은 복지관 합창연습이 있는 날이었지만 하루를 빼먹고 점심때부터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아내에게 손님들과 수원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관광한 후 제부도에 가서 저녁을 먹고, 놀다가 집에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수원 구경만 함께하고 제부도는 가지 않았으면 했다. 이유는 팔십이 다 된 노인이 밤에 운전하는 것이 걱정되어 말리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데도 꼭 가야겠냐고 성화다. 나는 그래도 나를 만나려고 멀리 부산에서 1000리 길을 달려온다는데 그 정도 시간은 함께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내를 달랬다.       아내는 나의 고집에 화가 나는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너무 심한지 물어봐야겠다고 아들에게 전화했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훌쩍훌쩍 우는 것이다. 아들에게도 창피하기도 하고, 뭐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참 후 전화를 끊기에 아들은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두 분이 조금씩만 양보하시면 좋겠다고 난처해서 하더란다. 하기야 아들이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점심때 휴대전화에 문자가 하나 와있다. 열어보니 아내가 보낸 것이다. “여보 미안해요. 아침에 기분을 언짢게 해서요.” 마음이 누그러졌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오후에 복지관에서 집으로 오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안 받는데 엄마가 어디 가신지 아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말은 않았지만, 아침에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했던 터라, 걱정스러워 몹시 애가 타는 모양이다. 글쎄 어디 간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웬일이지? 나는 아들에게 아침에 엄마가 문자를 보낸 걸 보면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좀 불안하기는 했다.   다행히 집에 오니 아내가 있었다. 경로당에서 하는 밸런스 체조 강습을 받으러 가느라고 휴대폰을 놓고 나갔다가 왔다는 것이다. 다녀와서 보니 아이들의 전화가 여러 번 왔었던 모양이라고 한다. 아들, 딸이 몇 번씩 전화를 해주고 며느리가 점심을 하자고 졸라대고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고 아내는 흐뭇해했다.   며칠 후 손님들은 밀양에서 한 분을 태워서 오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각자 봉담으로 2시까지 오기로 계획을 바꾸자고 했다. 마침 그날 오전에 기자단 위촉식과 교육이 있다고 했는데, 나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잘된 셈이었다. 결국, 봉담읍사무소에서 부산과 밀양에서 출발하여 5시간 정도나 운전을 했다는 손님들과 만났다. 부산에서 오신 분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운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 속에는 이 만남을 그만큼 기대하며 왔다는 의미가 배어 있었다.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만난 분들이지만, 매주 한 번씩 목소리를 들어온 사이라 금방 친숙해졌다.       전에 영어 듣기 인터넷방송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던 세라님은 요즈음도 합창단원, 산악자전거 동호회원, 영어여행가이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영어공부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케런님은 맛있는 전복 버섯 밥을 만들어 가져오셨다. 역사학 교수님인 남편과는 캠퍼스 연인이었다는 모야님은 수원화성 행궁에 관한 모든 것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함께 수원화성과 박물관도 구경한 다음 AK백화점에서 저녁을 먹은 후 실컷 얘기를 나눴다. 봉담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방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도 보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니 밤 11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손님들은 제부도에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집에 오니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제부도에서 돌아오는 야간 운전을 하지 않아서인지 아내는 밝은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다음 공부시간에는 화성 여행 이야기로 꽃을 피우리라. 동년배도 아니고 성별도 다르지만, 그들은 나의 친구임이 틀림없다. 이런 좋은 만남이 구석구석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앞으로도 영어를 매개로 학구적인 친교를 나누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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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3
  • 아! 옛날이여
    인문학반에서 강의를 듣노라면,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우님들의 글을 접하며 감동을 하곤 한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설렘과 부끄러움이 교차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유독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시절 우리들의 모습은 누구나 다 비슷한 형편이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늘 일에만 매달리는 부모님에 비하면 그래도 선생님들은 깨끗한 차림에 비교적 하얀 피부와 고운 손을 지녔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황 선생님은 예쁜 얼굴에 하얀 피부가 빛나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음악을 가르치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뒷동산에서 야외 수업을 하실 때도 있었다. 이때 손수건 돌리기 놀이를 했는데 벌칙은 노래 부르기였다. 그때 나는 벌칙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동요가 아니라, 대중가요를 불렀다. 우리 집에 라디오와 축음기가 있었던 덕택에 나도 모르게 대중가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일곱 살 어린 꼬맹이가 유행가를 제법 잘 부른 것이 소문이 나서 그 후 학교에서 나는 노래 잘 부르는 아이로 통했다.       청소시간에는 다른 반 선생님들도 오셔서 노래를 시키곤 하셨다. 어떤 때는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기도 하고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를 유희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소문이 나는 바람에 우리 동네 오빠들이 읍내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여러 번이나 나를 출전시키곤 했었다. 그때마다 상을 탔는데 3등 안에는 꼭 들어서 상장과 함께 양은 주전자며, 와이셔츠 같은 상품을 받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MBC TV ‘유쾌한 청백전’에 직장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땐 방송국이라고 해도 그리 넓지 않은 공개홀에서 5인조 밴드가 반주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혹여 자랑이 되지나 않을까? 망설여지긴 했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아 슬쩍 꺼내놔 보았다.   꿈 많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마음에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올 사연, 아니면 발그레 얼굴이 상기될 이야기,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리움을 선사해주는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잘 살아온 인생이고,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강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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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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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창시절
    1960년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4·19 혁명(1960년)을 거쳐 5.16 군사 정변(1961년)으로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에서도 여자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아갔다.   외갓집은 잘살았던 집안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계실 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을 가지고 다녔다. 2km를 걸어간 다음 6km를 기차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8km가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서 공부할 준비물을 샀다.   교복은 선배가 입었던 헌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스타킹 한 켤레로 3년을 지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전기다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로 된 둥근 다리미에 빨갛게 불이 붙은 숯을 넣고 옷을 다리다 보면 멀미를 해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모내기나 밭일을 해야 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농부들이 먹을 밥을 해놓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생이 주부가 하는 일을 다 해야 했던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약한 나는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이면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교실은 3층이었다. 나는 3층을 올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한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층 올라가서 쉬며 교실에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쉬어야 한다. 공부하랴 집안 일하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노는데 나는 그것까지도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은 외갓집에서 등록금을 주어서 공부했으나 2학년부터는 어머니가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나의 등록금 대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시험도 보지 못하게 했다.   종아리는 맞을 수 있었으나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종아리 몇 번을 맞고 난 다음에야 시험을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등록금 달라는 말을 겨우 꺼내야 했었다. 8km를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내 끈기를 보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아무리 고생이 돼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렇게나마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나의 꽃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학교생활 통지표의 통신란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똑같은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명랑함 부족”이란 문구였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는 그저 착한 아이였다. 착한 것이 아니라, 명랑함 부족과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자란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에서만 보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 아이로 비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던 내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이고 삶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나를 품어주는 보금자리였고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사신 어머니는 딸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위로요,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내 성품이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위로로 삼아본다.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4-16
  • 내 유소년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전라북도 김제이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대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지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난은 물질보다는 외로움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계셨고 태어난 지 8개월이 못 되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고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오빠가 나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 먹여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부르곤 했다. 허공에 대고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서른한 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남매를 기르며 사셨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땐 여자가 돈을 번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얼마 되지도 않은 논밭을 가꾸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여성이다가 보니 큰 힘이 필요한 일에 부닥치면 자장 힘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둡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는 어머니가 한번 말씀하시면 감히 “아니요”라는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동네 어른들은 내게 ‘착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머니는 늘 들로 일하러 가셨고, 열두 살 위인 오빠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외로움이 내 친구였던 셈이다. 오빤 청개구리처럼 항상 어머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옛날엔 겨울이 되면 시골에서는 일거리가 귀했다. 이렇다 보니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오빠는 어머니 몰래 집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가지고 나가 도박 자금으로 썼다. 그러니 집안 분위기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밤 시골길은 얼마나 어두운가? 얼마나 캄캄한지 앞뒤를 분간할 수도 없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딘가에서 도박에 빠져 있을 오빠를 찾아오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창호지를 붙여 만든 조그만 등에 등잔을 넣고 불을 밝히며 캄캄한 동네를 찾아다녀야 했다. 무섭기는 얼마나 무서운가? 어두운 밤길보다 어머니의 명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나는 손에 장갑도 없이 눈을 헤치며 오빠를 찾아 나선다. 온 동네 집집이 들러보면 불이 켜진 집이 있다. 나는 그 집 앞에 가서 가만히 들어본다. 그러면 영락없이 화투 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오빠” 하고 불러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부르면 누군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래도 오빠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불쌍해서 오빠를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아니 그다음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야 했다. 자연히 어머니와 오빠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지옥 같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얼마나 문밖에서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한창 뛰어놀 때인데도 뛰어놀지도 못하고 어른들 속에서 희생양으로 살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어려서부터 이런 아픔을 가져야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기쁨이었다. 교회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교회학교에서의 활동은 내 최고의 삶이었다. 성경퀴즈대회에서도 암송대회에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는 학용품을 거의 사서 쓰지 않았다. 모두가 교회에서 받은 상품이었다.   어둡게만 보였던 나는 항상 얌전하고 착하고 순종 잘하는 아이였다. 이런 모습 때문에 분에 넘치는 칭찬과 함께 애늙은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살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교회에서는 일꾼이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루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일깨워 새벽기도를 하게 한다.   새벽이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한번 불러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치우는 바람에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덕분에 나는 기도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나는 지금까지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었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건강은 항상 좋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병이 나면 어린 내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해야 했다. 죽을 쑤어드리고 밤새 온몸을 주물러드리며 잠이 드실 때까지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가 잠이 드시면 나도 옆에서 잠을 잤다.   반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일이 없어서 조금은 편히 지내신다. 그때면 어머니는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신다. 기도 중에 잠이 드신 어머니 모습을 보면 천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일어나면서 너무나 기뻐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정애야 나는 천국을 보았다. 그곳에서 내 집이 얼마나 좋은지 황금으로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집이더라.”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든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6
  • 산책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호천 산책에 나섰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지난 일들을 성찰하며, 하루를 계획하며 실천을 그리며 걷는 이 길은 내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준다. 이런 생각과 함께 율목교를 내려선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친구들이 나를 반겨준다. 한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오늘은 시냇물 소리도 유난히 활기차다.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여러 가지 꽃들 곁으로 나비가 춤을 추고 물고기들은 내 발소리를 아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노루교에 가까워지자 급경사에 쌓아놓은 돌 틈으로 잔잔히 흐르던 시냇물이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활력이 넘친다.   옆에 있던 갖가지 꽃들도 제각각 자신을 봐달라며 자태를 뽐낸다. 나는 “그래 아이고, 다들 예쁘구나”라고 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푸르렀는지 온갖 식물들이 경쟁하며 푸른빛을 드러내고, 여름 냄새로 내 기운까지 북돋아 준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 나온 아들의 모습이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어떤 명화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저런 모습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언론을 통해 서로 다투고, 속이고, 싸우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침 산책길은 그런 후유증을 늘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내 샘내교에 이르니, 황새가 긴 다리와 가냘픈 목을 쭉 내밀고 어서 오라는 듯 고개를 든다. 오리 가족은 행사라도 하는 듯 자맥질과 유영을 뽐내며 나를 환영해준다. 이런 여름의 광경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인 양 행복에 젖는다.   여름의 길목이라 아침인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투명한 진주가 되어 송골송골 맺힌다. 이때쯤이면 동남교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우리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을 떠밀리듯, 억지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선택이고 자유다. 스스로 최적의 길을 찾아 즐겁게 걸으면 된다. 산책길에서 경주는 필요 없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 같은 산책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의 인생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걷고 있다. 안순모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희망을 희망하라
    1. 어딘가에 희망은 있다    극한 고난과 마주한 환경에 처해도 어딘가에 희망은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사람에게 고난은 무엇일까? 고난이 고난으로 끝난다면 고난은 슬픔의 모태일 뿐이다. 그러나 고난은 반드시 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시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가에는 온통 펄들로 가득하다. 검게 펼쳐진 개흙은 죽은 듯 고요하다. 생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드러누운 갯벌에는 밀려오는 고난을 양식 삼아 수많은 생명이 살아간다. 그 가운데는 조개의 아픔으로 탄생하는 진주도 있다.    나의 인생도 어두운 갯벌 속 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런 나의 인생이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을 조금이라도 지켜본 사람은 모두 불운이라고 혀를 찼다. 불운도 이 정도면 지나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비신앙인들이 볼 때는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의 처지였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택하는 길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이 삶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힘든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죽음을 택할 그 마음으로 사세요. 죽을힘을 다해 살다 보면 인생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해답과 보상과 내놓고 만다는 것이다. 먹구름은 비를 뿌린다. 때로는 폭우를 쏟아내며 많은 종류의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한없이 비를 뿌리지는 못한다. 먹구름 뒤에는 반드시 밝은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구름이 가로막고 있는 하늘의 본 모습은 언제나 푸르고 푸른 하늘이다.  그래서 고난은 잠깐이라고 한다. 때로 이 잠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난의 긴 터널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터널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이 끝나는 지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지치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다.    사람의 삶에서 돈과 건강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다. 여기에 더하여 행복한 가정과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삶의 질은 심각한 훼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이 세 가지가 모두 겹쳐서 찾아온다면 상상조차 어려운 환경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고난과 맞서야 했다. 이것은 고난이라기보다 생사의 문제였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를 반복해야 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사치였다. 이 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이다. 인간에게 희망은 고난과 맞서 싸울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내 인생은 극한 고난과 절대 희망의 치열한 전투였다.   유정애 목사의 삶의 증언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초·중·고교를 거쳐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장합동개혁 소속 목사로 복된 교회를 일구어낸다. 옥상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가 수백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고,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목회를 하다가 이제는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산다. 현재는 박요섭 박사와 함께 시니어들의 두 번째 청춘을 응원하며 희망을 쏘아 올리는 가운데 글을 쓰며 또 한 번의 청춘을 꽃피우고 있다. 이 글은 한국의 미우라 아야코로 불리는 유정애 목사의 치열했던 삶의 증언이고, 앞으로 펼쳐질 빛나는 세계에 대한 서막이다. 이 글을 통해 모두가 위로받고 용기를 내, 행복한 삶을 일구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멀리서 찾아온 벗님들
    지난주 어느 날 저녁 우리 부부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아침까지 이어져 둘이서 별로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일주일 후인 다음 주 월요일 인터넷으로 함께 영어를 공부하는 젊은 벗들이 멀리서 오게 되어서 그 접대 문제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밤에 Skype 전화로 영어공부를 함께하고 있는 사이다. 회원들은 모두 부산, 밀양 등에 흩어져 살고 있어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서로 얼굴도 볼 겸 만나서 친목을 다지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회원들이 경남지역에 살고 있으니 화성에 사는 나만 그리로 가면 쉽게 만남이 해결된다. 그러나 꽉 짜인 일정 때문에 좀처럼 기회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공부를 마치고 나서 하는 말이 이번에 그중 세 분이 오프라인 모임을 겸하여 화성으로 1박 2일 여행계획을 잡았다는 것이다. 2주 후인 3월 11일 점심때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화성 구경을 한 후 제부도로 가서 일박 후 다음 날 오후에 돌아가는 계획이라고 한다. 그날은 복지관 합창연습이 있는 날이었지만 하루를 빼먹고 점심때부터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아내에게 손님들과 수원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관광한 후 제부도에 가서 저녁을 먹고, 놀다가 집에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수원 구경만 함께하고 제부도는 가지 않았으면 했다. 이유는 팔십이 다 된 노인이 밤에 운전하는 것이 걱정되어 말리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데도 꼭 가야겠냐고 성화다. 나는 그래도 나를 만나려고 멀리 부산에서 1000리 길을 달려온다는데 그 정도 시간은 함께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내를 달랬다.       아내는 나의 고집에 화가 나는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너무 심한지 물어봐야겠다고 아들에게 전화했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훌쩍훌쩍 우는 것이다. 아들에게도 창피하기도 하고, 뭐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참 후 전화를 끊기에 아들은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두 분이 조금씩만 양보하시면 좋겠다고 난처해서 하더란다. 하기야 아들이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점심때 휴대전화에 문자가 하나 와있다. 열어보니 아내가 보낸 것이다. “여보 미안해요. 아침에 기분을 언짢게 해서요.” 마음이 누그러졌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오후에 복지관에서 집으로 오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안 받는데 엄마가 어디 가신지 아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말은 않았지만, 아침에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했던 터라, 걱정스러워 몹시 애가 타는 모양이다. 글쎄 어디 간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웬일이지? 나는 아들에게 아침에 엄마가 문자를 보낸 걸 보면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좀 불안하기는 했다.   다행히 집에 오니 아내가 있었다. 경로당에서 하는 밸런스 체조 강습을 받으러 가느라고 휴대폰을 놓고 나갔다가 왔다는 것이다. 다녀와서 보니 아이들의 전화가 여러 번 왔었던 모양이라고 한다. 아들, 딸이 몇 번씩 전화를 해주고 며느리가 점심을 하자고 졸라대고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고 아내는 흐뭇해했다.   며칠 후 손님들은 밀양에서 한 분을 태워서 오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각자 봉담으로 2시까지 오기로 계획을 바꾸자고 했다. 마침 그날 오전에 기자단 위촉식과 교육이 있다고 했는데, 나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잘된 셈이었다. 결국, 봉담읍사무소에서 부산과 밀양에서 출발하여 5시간 정도나 운전을 했다는 손님들과 만났다. 부산에서 오신 분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운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 속에는 이 만남을 그만큼 기대하며 왔다는 의미가 배어 있었다.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만난 분들이지만, 매주 한 번씩 목소리를 들어온 사이라 금방 친숙해졌다.       전에 영어 듣기 인터넷방송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던 세라님은 요즈음도 합창단원, 산악자전거 동호회원, 영어여행가이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영어공부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케런님은 맛있는 전복 버섯 밥을 만들어 가져오셨다. 역사학 교수님인 남편과는 캠퍼스 연인이었다는 모야님은 수원화성 행궁에 관한 모든 것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함께 수원화성과 박물관도 구경한 다음 AK백화점에서 저녁을 먹은 후 실컷 얘기를 나눴다. 봉담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방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도 보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니 밤 11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손님들은 제부도에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집에 오니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제부도에서 돌아오는 야간 운전을 하지 않아서인지 아내는 밝은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다음 공부시간에는 화성 여행 이야기로 꽃을 피우리라. 동년배도 아니고 성별도 다르지만, 그들은 나의 친구임이 틀림없다. 이런 좋은 만남이 구석구석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앞으로도 영어를 매개로 학구적인 친교를 나누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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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9-03-23
  • 아! 옛날이여
    인문학반에서 강의를 듣노라면,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우님들의 글을 접하며 감동을 하곤 한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설렘과 부끄러움이 교차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유독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시절 우리들의 모습은 누구나 다 비슷한 형편이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늘 일에만 매달리는 부모님에 비하면 그래도 선생님들은 깨끗한 차림에 비교적 하얀 피부와 고운 손을 지녔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황 선생님은 예쁜 얼굴에 하얀 피부가 빛나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음악을 가르치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뒷동산에서 야외 수업을 하실 때도 있었다. 이때 손수건 돌리기 놀이를 했는데 벌칙은 노래 부르기였다. 그때 나는 벌칙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동요가 아니라, 대중가요를 불렀다. 우리 집에 라디오와 축음기가 있었던 덕택에 나도 모르게 대중가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일곱 살 어린 꼬맹이가 유행가를 제법 잘 부른 것이 소문이 나서 그 후 학교에서 나는 노래 잘 부르는 아이로 통했다.       청소시간에는 다른 반 선생님들도 오셔서 노래를 시키곤 하셨다. 어떤 때는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기도 하고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를 유희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소문이 나는 바람에 우리 동네 오빠들이 읍내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여러 번이나 나를 출전시키곤 했었다. 그때마다 상을 탔는데 3등 안에는 꼭 들어서 상장과 함께 양은 주전자며, 와이셔츠 같은 상품을 받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MBC TV ‘유쾌한 청백전’에 직장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땐 방송국이라고 해도 그리 넓지 않은 공개홀에서 5인조 밴드가 반주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혹여 자랑이 되지나 않을까? 망설여지긴 했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아 슬쩍 꺼내놔 보았다.   꿈 많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마음에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올 사연, 아니면 발그레 얼굴이 상기될 이야기,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리움을 선사해주는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잘 살아온 인생이고,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강정순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억지로 말고 즐기며 할 수 있을까?
    속담에 “하기 싫은 일은 오뉴월에도 손이 시리다”라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열성이 나오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도 지난날 업무가 나에게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단체 생활에서 피하고 싶은 책임이 맡겨질 때면, 거부할 수도 없고 곤혹스러워 부담감에 속을 끓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억지로 하면 몸에 해롭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분명하다. 그래서 억지로 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방안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 원숙함 말이다.   나는 억지로 남의 일을 대신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스트레스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 그 사례의 주인공은 성경 속의 구레네 시몬이다. 그는 예수라는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젊은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생각과 모습은 추리하여 기술함을 전제한다.   우선 시몬이란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근처 시골 마을 키레네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축제를 즐기려고 예루살렘까지 1,600km나 되는 길을 아마도 수개월은 걸려 도착한 순례자로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 엉뚱한 일이 닥친 것이다. 골고다 언덕길에 많은 사람이 웅성대며 늘어서 있기에 헤집고 드려다 보니, 어떤 사람이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가다가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참담하고 측은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때 느닷없이 로마 병정이 창끝을 그의 어깨에 대고 지명하면서 대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나? 그는 로마의 식민지인이었기에 억울하지만, 그 죄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나도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담될 땐 영락없이 억지로 움직인다. 그러면서 “책임과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항변하며 못 마땅해 한다.   시몬도 십자가를 지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리라. 과연 그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메고 산 정상까지 올라갔을까? 억지로일까? 아니면 자원하는 마음일까?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리라곤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나, 예수께 병 고침을 받았거나, 보리 떡이라도 얻어먹은 사람이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하는데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시몬은 여행을 즐기려고 돈을 모아 먼 길을 왔는데 알지도 못하는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산 위까지 올라가야 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었을 것이다.   자기를 점찍은 로마 군인이 미웠고, 큰 키와 건강한 몸집 때문에 지명 당한 것도 억울하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 죄수에 대해서도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는 억지로 지게 된 치욕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투덜대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냥 걸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분노를 삼키고 땀을 흘리며 산을 향해 얼마간 올라가다가 문득 자기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그 죄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그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을 성찰해 볼 때가 있지 않은가?   그는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죄수를 원망의 눈초리로 뒤돌아보았을 것이며, 순간 죄수와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죄수의 사랑스러운 눈빛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과 원망은 경외함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죄수에 대해서 존경심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즐거웠을 것이고, 지금까지 억지로 메고 온 무거운 십자가는 당연히 자기가 져야 할 몫이고 책임이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힘들고 부담되는 일을 헌신적으로 해내는 것을 보면, 그 상대가 싫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 자신의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우리 역사의 선현 중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는 순간까지 책임을 다했던 위대한 분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스스로 해결하였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지도 않았고 책임을 면하려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물을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부담감과 거부감의 차이에 달렸다고 본다.   거부감이 평온함으로, 억울함이 경외함으로 바뀌면서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된 시몬을 상상해보자.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남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쳐보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자”라고 생각하면 시야도 더욱더 넓어지고 언어와 표정도 여유롭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들고 부담된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즐기며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즐기며 하는 일은 그 일 자체로 즐겁고 행복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일을 즐기며 할 때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스트레스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즐겁게 하여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어 큰일을 해냈다면 우리 마음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여기엔 반드시 겸손과 배려와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것은 그 일에 종이 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되고, 부담감과 거부감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에 주인이 되어서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최병우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내 인생의 봄날
    우리 어머니는 매우 엄했고 아버지는 아주 자상했으니 보통의 경우와는 반대였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는 늘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 나는 스물넷에 스물아홉 신랑을 만났다. 부모님이 배필로 정해준 신랑감은 철물점을 운영하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신랑감의 사진을 보니 눈이 부리부리하고 조금 거칠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혹시나 거친 성격일까 봐 주춤거렸지만, 그런 내 생각은 마음에서만 일어났을 뿐 달라질 건 없었다. 아버지가 슬쩍 신랑감이 운영하는 철물에 들러보니 매우 성실하고 친절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 이런 신랑은 처음 만난 날 핸드백과 화장품을 선물로 사 줄 정도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의 만남은 한 달 만에 열매를 맺어 음력 10월 27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결혼식 날부터 며칠을 술에 취해 있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찍 나가서는 늦게 돌아와 얼굴조차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의 결혼생활은 시댁 식구들과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5남 1녀의 형제 중 막내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머님을 모시고 큰 시숙 내외와 가까이 지냈다. 그 당시 나는 흰 피부에 야리야리한 외모로 예쁜 신부라고 많은 칭찬도 받았고, 나이 꽉 찬 노총각에게 시집온 것에 대해 수시로 고맙다는 말도 들곤 했다. 이 시절 내게는 동서와 시숙들의 칭찬과 격려가 큰 힘이 되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잘 극복할 수 있었다.   근처에 살던 셋째 시숙은 이른 아침 조용히 부엌에 들러서 무딘 칼을 갈아 놓기도 하고 장작도 먼저 마련해 주길 마다치 않았다. 결혼 후 4년 만에 분가했을 때도 섭섭했던 이유는 시댁 식구와 지낸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분가하면서부터는 남편이 눈에 띄게 살가워졌다. 이런 걸 보면 시댁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기에 내게 좋은 내색을 하지 못했던 같다.   셋방을 얻어 시작한 분가 생활은 내게 더 고생이었다. 우선 우물이 멀어 물을 길어 오기가 매우 고된 일이었다. 그러면서 둘째 딸을 낳고, 또 셋째 딸을 낳으며 이사를 했다. 이후로는 가게도 잘되었고 아이들도 잘 커 주었으니 기쁜 나날이었다.   큰아들은 공부를 잘했기에 남편은 아들을 도시로 보내 공부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넷째 시숙이 있는 도시로 보냈다. 자녀들이 모두 공부를 잘하니 남편은 매우 뿌듯해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늘 자상하게 대하고 정성을 다해 키웠다. 두 딸을 날마다 자전거로 등교시켰고 생일파티도 빠짐없이 챙겼다.   그런 남편이 49세 때 위암 판정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 큰아들은 고3이었고, 둘째 딸은 중3, 막내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나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둔 돈은 물론 모든 것을 동원해 남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수술하고 미국에서 수입하는 약과 주사를 써 보기도 하고 몸에 좋다는 영지버섯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이라도 좋다는 것이면 다 해보며 날마다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남편은 진단받은 지 2년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신이 아프면 아들이 시험공부 하는데 신경 쓰이게 된다고 극구 소식도 전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달래며 투병했던 남편은 아들의 대학 입학을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무섭고 두려웠다. 나에게는 울고 있을 날도 허락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남편이 남기고 간 가게 문을 열었다. 남편이 없는 일상은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채 허무함의 바람이 그칠 줄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달리고 또 달렸다.   아들은 대학에 합격했고, 둘째 딸 역시 고교생이기에 눈물은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남편이 떠난 뒤, 나는 철저히 혼자서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다. 남편의 따뜻한 위로나 칭찬은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이 외로움이었다. 새벽에 동이 트면 하늘에 있는 남편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게를 열고 해가 지면 쓰러지듯 누워 잠이 들곤 했다.   철물점에는 여자가 다루기에는 크고 무거운 물건이 많아서 무척 고된 나날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남편의 도움으로 가게는 오히려 번창했다. 이런 시간은 흘러 지금은 철물점을 아이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제 큰아들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나이었던 49세를 훌쩍 넘었다. 둘째 딸은 동국대학교에서 학사, 석사를 거쳐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에서 특허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내게 이젠 편히 쉬라고 성화를 한다. 난 크게 불편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놀아보지 못한 나는 노는 것이 참으로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그런 내가 2015년부터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에 나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든 생각이 진작 나올 걸 그랬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늘 마음으로만 염원했던 공부를 시작했다. 2016년 5월에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 해 우연히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내 이름이 들어간 책도 출판하고 공저자가 되는 기쁨과 영광도 누렸다.   2017년에는 중졸 검정고시에 도전하고 있다. 자식들은 지금 그걸 해서 무엇하겠느냐며 즐겁고 가벼운 걸 하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어려워서 힘들긴 하지만, 하는 데까지 도전해볼 작정이다. 나에게 남은 힘이라 할까? 자랑이라 할까? 내 이름을 찾은 것 같다.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학생으로 지내는 내가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다.   나는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삼 남매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의 격려와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요즘은 두 번째 청춘을 외치며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박 교수님의 외침으로 큰 힘을 얻고 있다.   비록 대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박사과정의 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가슴 뿌듯한 나날을 살며 행복을 맛보고 있다. 이만 하면 나도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요즘이야말로 우리 인문학반 동우들 모두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나날을 보내고 있으리라고 자부한다. 이희남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에반젤린의 고향 아카디아의 슬픈 역사
    나는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를 수년 전에 4개월간 여행한 적이 있다. 이 주는 캐나다 동남부 끝 대서양 연안의 반도로서 면적(5.5만㎢)은 남한(10만㎢)의 절반이 넘지만, 인구는 고작 9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주 인구분포는 영국계가 80%이고 프랑스계가 18%이다. 공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환경 지역이고 주요 산업은 어업과 제지업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은 경쟁하듯 북미대륙을 탐험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세기 후 1604년에 프랑스인들이 현재의 노바스코샤 주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원주민들과 서로 도우며 척박한 땅을 땀 흘려 개간했다. 그리하여 캐나다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어업에 종사하며 평화로운 뉴 프랑스 마을을 건설하였다. 이들이 아카디언(Acadian)이고, 이 지역을 아카디아(Acadia)라고 한다.   그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1755년에 영불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이곳에 영국군을 보내 자국의 영토로 선포하고 뉴스코틀랜드(New Scotland)란 뜻의 프랑스어인 노바스코샤(Nova Scotia)로 지명을 바꿨다. 그리고 14세 이상의 남자에게 프랑스를 대적하여 싸우든지 아니면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아카디안’들은 중립을 고수하였으나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마을은 영국군에 의해 불타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뿔뿔이 흩어져 살던 ‘아카디안’들의 일부가 고향을 다시 찾아와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주도 할리팩스에서 서쪽으로 약 250km 떨어진 해안가 시골 마을(쇼냐빌)의 처제네 집에서 지냈다. 약 120년이나 된 나무집이다. 처제의 소개로 그곳 아카디안 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순박함과 친절함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랑프레 유적지를 꼭 여행해보라고 권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의중을 이곳의 역사를 알고 난 후에야 감지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에반젤린 동상이 있는 곳을 갈 것이라고 처제가 말하기에 나는 그 이름이 생소해서 그가 캐나다의 유명인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웃음으로 눈총을 주며 그것도 아직 모르냐고 반문했다.   <에반젤린>은 미국 작가 롱펠로의 작품이다. 젊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인데 이 시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날 호기심 가운데 에반젤린 동상을 향하여 떠났다. 그곳은 핼리팩스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펀드만 연안의 울프빌 근교에 있는 ‘거대한 초원’이란 뜻의 ‘Grand Pre’지역이다. 풍경이 너무나 넓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우리나라 평야 지대나 천수만을 연상케 한다. 귀국 후 롱펠로의 에반젤린을 읽어보니 그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광활한 초원은 동쪽 멀리까지 뻗쳐있고, 그것은 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어 수많은 양 떼들이 풀을 뜯는 목장이 되었네. 농부들의 흐르는 땀으로 세워 올린 제방들은 바다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고, 철에 따라 열리는 수문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와 초원을 촉촉이 적셔주었네. 서쪽과 남쪽으로는 삼밭과 과수원 그리고 옥수수밭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산이 높이 솟아올라 원시림을 이루었네. 대서양에서 피어오른 바다 안개가 산꼭대기를 뒤덮어 평화스러운 이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 초원 한가운데에 아카디아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네.”   조상 아카디안 들이 이루어 놓은 넓고 아름다운 마을은 영국군에 의해 사라졌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그 벌판 한가운데 유적지를 세워 자신들의 슬픈 역사를 기념하고 있다. 박물관 앞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영어와 불어로 나란히 쓰여 있었다.   “Statue of Evangeline, Longfellow's heroine” This statue of Evangeline, heroine of Longfellow's epic poem, Evangeline : A tale of Acadia, is a powerful, emotive symbol of the Deportation. It connects the story of Evangeline to the history of Grand Pre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관람한 후 밖으로 나와 에반젤린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막히는 것 없이 탁 트인 초원을 보며 이 땅이 얼마나 전원적이고 평화로웠는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한가운데 에반젤린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교회가 있다.   에반젤린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이 교회가 당시의 교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방 벽면에 영국군에 의해 추방당하는 아카디언들의 그림과 방화로 불타는 집들의 그림이 게시되어있다. 순간 일제가 제암리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인들을 학살한 사건이 생각나 연민을 느꼈다.   며칠 전 쇼냐빌에서 프랑스계 주민들이 그랑프레를 꼭 여행해보라고 권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곳이 그들 조상의 얼이 담긴 슬픈 유적지이며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작가 롱펠로우가 이를 배경으로 쓴 <에반젤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반젤린이라는 처녀와 가브리엘이라는 청년의 사랑 이야기다. 이 서사시는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 흩어져 강제 이주를 당하고, 이후 에반젤린이 남편 가브리엘을 찾아 평생을 방랑하는 슬픈 이야기다.   아카디언들은 우리 민족만큼이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꿋꿋하게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들은 캐나다 국기와는 별개로 아카디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깃발을 함께 단다. 프랑스 국기에 아카디아의 별을 그린 깃발로 아카디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4개월 동안 아카디언들을 겪고 느꼈다. 우리도 마음을 같이하여 옛것을 되찾아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동체 그리고 서로 인정하고 아껴주는 선진사회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에반젤린>의 일부를 되새겨 본다.   이곳은 태고의 원시림. 하지만 사냥꾼의 발소리에 놀란 사슴같이 이 숲속에서 가슴 설레던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상의 생활에서도 천국의 모습처럼 보이던, 숲속을 여울져 흐르는 강물처럼 덧없이 생애를 흘려보내고 있던 아카디아 농부들의 고향이었던 그 초가 마을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름답던 농장들은 황폐해지고, 농부들은 영영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월의 세찬 바람이 먼지와 나뭇잎들을 휘몰아 하늘 높이 끌고 올라가 멀리 바다 위에 뿌리듯이, 그들은 산산이 흩어져 버렸고, 다만 아름다운 그랑프레 마을의 전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최병우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사노라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나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보냈다. 어제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약간의 날씨가 다를지는 모르지만, 그날이 그날이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그럼 과연 무엇이 다르겠다는 것인가.   그 다름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적당한 때에 뜨는 것으로 생각했던 달이 지난밤에는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부모님의 얼굴이 달에 비춰 내 가슴에 달처럼 떠올랐다.   둥근달이 비친 내 마음은 그 옛날 부모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졌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금세 열아홉 꽃 같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그 시절은 비록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마음만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넉넉했던 것 같다.   사실인즉 그때가 어떻게 지금보다 풍요로웠겠는가. 하지만 이런 마음이 바로 추억이 가져다주는 풍요이다. 요즘이야 자식이 한둘이지만 그 시절에는 10남매를 둔 가정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가 있었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우애가 좋았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에 대해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70여 년을 살아오다가 보니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때로는 저 달이 슬펐을 때도 있었고, 외로울 때도, 괴로울 때도 있었다. 그랬던 달이 희망 가득할 때도 있었고, 행복하게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다가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보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나는 요즘 인문학을 배우는 강의를 듣고 있다. 참으로 행복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괴테가 말하기를 사색이 자본이라고 했다. 나는 인문학적 상상력도 곧 사색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괴테는 사색의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나는 특히 ‘나이가 나를 떠나게 하라. 무엇이든 긍정하라. 그리고 실행하라’는 세 가지를 좋아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나도 물처럼 어디를 스며들든 다투지 않고 조용히 이롭게 하리라고 생각을 다듬어 본다.   누군가 진정한 지성인은 도구적 인간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본주의의 유혹에 물들어 이기주의의 노예로 빠져들지 말자고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나를 다독여 본다. 사노라니 이렇게 인문학을 배우며 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루하루 착한 실천을 힘쓰는 행복도 누리게 되었다. 윤인수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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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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