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06-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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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욱더 아름다운 나날을 기대하며
    치료를 시작하고 어느덧 1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한두 달이면 낫겠지”라는 기대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두 달, 석 달이 지나서 일 년이 되었다.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시간을 맞춰 다니다 보니 점심시간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시간을 맞추어 먹어야 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통원치료를 받으러 갈 때도 도시락을 싸서 가야 했다.   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치료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이었다. 조금만 잘 못 먹으면 당장 탈이 나기 때문이었다. 약을 먹는 시간과 치료 시간을 맞추려면 점심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휴게소에 들러서 차 안에서 먹기도 했고, 어느 때는 안전한 곳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어느 때는 공원으로 가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옆에 다가와 멀리서 놀러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놓고 멋쩍어서 혼자 웃기도 했다.   젊었을 때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더라면 무척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라도 치료할 수 있고,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소풍 다니는 것처럼 즐기며 다녔다. 공원을 걸으며 운동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렇게 날마다 죽과 함께 일 년을 보냈다. 하지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1년이 다 되도록 김치를 못 먹었던 것이 무척 힘들었다. 또한, 누가 외식하자고 하면 그것도 참 곤란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마음 놓고 외식하게 될 날을 고대했다. 그렇게 6개월을 더 보내고 두 번째 추석을 보냈다. 나는 병원 약을 더는 먹지 않겠다는 용기를 냈다.   내 나름대로 지식을 얻어 약이 아닌 다른 식품으로 다스리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이제는 죽이 아니라, 질게나마 밥을 먹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단맛이 나고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동안 잘 참은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설날이 다가왔다. 아들네 가족이 이번 설에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어쩌면 음식 때문에 고생할지도 모르지만, 용기를 냈다. 그동안 외식을 금하고 나들이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가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맛있는 음식도 많을 것 같았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식사 시간이 되었다. 먼저 음식이 걱정되었다. 식당에 들어가 시금치 카레를 시켰다. 너무나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이렇게만 먹을 수 있다면 이번 여행은 아주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호텔에 들어가니 마침 내가 먹기 좋은 음식들이 많았다. 아들 내외가 나보다 더 좋아하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3박 4일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아들 내외가 내 음식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2년 만에 간 가족 여행은 지난날의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문제가 생겼다.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됐다. 또다시 죽을 먹으며 속을 달랬다. 이렇게 몇 번이고 밥과 죽으로 번갈아 먹으며 관리했더니 상당히 좋아졌다. 이제는 육류도 먹을 수 있다. 참으로 긴 여행을 마친 기분이다.   이제는 한 끼니만 안 먹어도 배가 고프다. 몸무게는 겨우 40kg 정도밖에 안 되지만, 사람들은 나를 보며 건강해 보인다고 말한다. 얼마나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인가? 새롭게 세상을 태어난 기분이다.   사람은 건강할 때 건강을 잘 지켜야 한다. 한번 잃은 건강은 무척 회복하기 어렵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라도 그것을 잃어보면 소중함을 알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지닌 것이 귀한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보다, 한번 잃어다가 회복함으로써 진한 감사 가운데 살 수 있다면, 이것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내가 그렇다. 이 질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의 기도와 격려의 덕택이다. 앞으로도 이 감사를 잊지 않고 더욱더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즐거운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6-05
  • 올바른 세계관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천차만별의 사람이 진료받는 곳이 병원이다. 좀 유명세가 있는 병원이라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렇다 보니 병원은 만물상과도 같다. 내가 치료받았던 병원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캐나다에서 왔다고 한다.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날 고등학생이 우리 방에 들어왔다. 너무나 음식을 잘 먹던 학생이 어느 날부터 탈이 나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입원하는 날부터 전혀 치료를 받을 생각조차 없는 눈치였다. 금식도 힘들어했고, 죽을 먹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랬기에 날마다 영양제로 버텼다.   이렇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져 간호하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옆에서 보노라니 병난 딸 간호하다가 엄마까지 병이 날 것 같았다. 이 여고생은 사흘을 못 견디고 퇴원해버렸다.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길든 젊은 아이들이 음식을 절제하고 가려야 하는 치료를 제대로 받기란 고행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조금만 참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인데 인내할 수 없어서 고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치료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치료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잘 다스리다가도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예전처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라고 한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치료할 때보다 그 후에 더 중요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 음식이다. 먹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자신과 치르는 싸움이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참을 줄 아는 힘을 길러야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어떤 환경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병원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온갖 시선과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곳에서 뚜렷한 관점과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흔들리게 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분별하여 올곧게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늘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을 일깨우며 정의롭고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추석이 다가왔다. 추석에 가족들이 모이면 음식 때문에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아 병원에 더 남아있기로 했다. 장담할 수 없다면 피하는 것도 지혜가 아니겠는가. 퇴원을 하고 몇 달이 지나 설날이 되었을 때도, 병원을 선택했다.   환우들은 병원으로 도망 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나 혼자만 그렇게 지낸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같은 처지의 환우들이 있었기에 서로가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이겨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묽은 호박죽을 먹고 나니 배가 고팠다. 이제야,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신호였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치료가 된다는 뜻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이이고 배고파.”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대로 가면 제대로 된 치료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환우들과 운동하러 홍릉을 찾았다. 관광차 일부러 오기도 할 텐데 이렇게라도 자주 들르게 되니 감사하지 않은가. 모든 것에 감사하며 치료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점점 더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 예전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더욱더 아름답게 보이고, 감사가 넘친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판단력과 인내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올바른 시야를 확보하고, 흔들림 없이 올곧게 걸어야, 바른 결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6-04
  • 아파도 소중한 삶이다
    치료과정에서 금식하다 보면 힘이 없어 젊은 사람들도 영양제 주사를 맞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도 이겨나갔다. 워낙에 금식하는 것이 단련되어서 웬만큼 아프거나 굶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간호사부터 한 방에서 치료받는 사람들이 모두 내 의지에 놀라워했다.   힘이 없을 것이라며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하게 했다. 70세가 넘었고 머리까지 하얀 할머니이니, 혹시 힘이 없어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운동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렸다. 어느 때는 살그머니 병원을 빠져나와 나와 근처에 있는 학교 마당을 돌기도 했다.   정신력이 약해지면 어떤 병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더 강한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이 약해지면 어떤 병도 이기지 못한다. 마음이 강할수록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다. 감기도 무서워하면 죽는다고 한다. 나는 옛날에 이미 유방암을 이긴 적이 있어서 이까짓 것쯤이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혼자서 아침 운동을 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치료에 들어갔다. 한방과 양방으로 통합적인 치료를 받았다. 얼마나 위벽이 굳었는지 등에 침을 놓으면 침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주치의도 침을 놓으며 무척 놀랐다. 간신히 침을 놓으면 등과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3주간의 입원을 마치고 일주일에 3일씩 통원치료를 받았다.   너무나 힘이 들었다. 이런 과정에서도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꼈다. 환우들끼리 서로 만나면 빨리 건강해서 맛있는 음식 실컷 먹어보자는 것이 인사였다. 이렇게 꾸준하게 치료를 받으며 걷는 운동이라도 열심히 했다.         치료하는 동안에는 죽을 먹어야 했다. 비록 죽을 먹어서 힘은 없었지만, 운동과 독서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치료받는 동안이라도 무의미하게 보내기는 싫었다. 삶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을 실천하는 데에도 충실해지고 싶어서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간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니, 이 고난도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배고파서 먹고, 먹고 싶어서 먹는 그런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매 순간을 소중하게 가꾸는 심정으로 살았다. 밝고 따뜻한 봄날처럼 나에게도 건강하게 활기찬 삶을 사는 날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으로 힘든 시간을 이겨나갔다.   치료가 잘되어 음식을 먹을 때까지는 모든 음식을 절제해야 했다. 치료단계와 함께 증상에 따라 음식도 맞추어 먹게 했다. 음료, 과일, 육류, 생선, 채소, 모든 것을 치료단계에 맞춰 먹어야 했다. 생선은 튀겨도 안 되고 구워도 안 된다. 무조건 찜으로 먹어야 했다. 여름철에 먹는 상추쌈이 얼마나 맛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치료 기간이 여름철이었기에 상추쌈. 오이. 풋고추 등을 된장에 찍어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것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고역이었다. 우유도. 요구르트도. 음료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도토리묵을 먹었다. 그런데 그날로 설사가 나서 축 처지고 말았다.   부드러운 음식이기에 먹어도 될 줄 알았는데 바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외식하게 되었는데 내가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간장게장을 먹었다. 역시나 설사를 하고 말았다.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말아야 했는데 먹고 싶은 생각에 지고 말았던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명은 천하보다 귀중하다고 한다. 죽은 사람에게 천하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고, 음식도 귀하게 여겨지고, 주변의 사람들도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보자. 순간 모든 것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28
  •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이를 넘어 인간의 수명을 150세로 내다보는 견해도 있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소망이다. 이렇다 보니 몸에 좋다는 식품이며 의약품의 개발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동마저도 건강관리를 위해 한다. 장수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사는 물론, 의료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우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장수도 좋지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산업 분야가 날로 성장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젖을 빨게 된다.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부족하면 울어서라도 부족함을 채워나간다. 허기를 채우는 식욕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본질적 욕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입맛이 없다면 그것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음식이 너무 맛있다. 무엇을 먹든지 맛있다. “맛있다”라고 하면서 먹으니 먹는 즐거움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사람이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져서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폭식도 하고 야식도 하고 간식도 한다. 대부분 사람에게서 위장병이 생기는 이유가 음식과 관련이 있다.         나는 지금이야 맛있게 잘 먹지만, 예전에는 밥을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나는 간식도 야식도 폭식도 하지 않는다. 급하게 먹지도 않고 아주 천천히 먹는다. 마냥 씹고 있다. 어떤 장소에 가서도 항상 가장 늦게까지 먹는다. 그러니 어떤 모임에 가서 식사할 때면 나는 최대한 앞에 서서 빨리 들어간다. 일찍 들어가서 먹기 시작해도 항상 늦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먹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모르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먹지 않으면 배고파야 정상인데, 나는 배고픔을 모르는 것이 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을 때는 일부러 맛있게 먹는 척했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영양분을 흡수하는 차원에서 먹어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인간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니,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나이가 들면 밥의 힘으로 산다고 한다. 정말이다. 젊어서는 하루에 한 끼니를 먹으나, 두 끼니를 먹으나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한 끼니만 먹지 않으면, 손발이 벌벌 떨리고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그래서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일 년에 2kg 정도나 살이 빠졌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어지럽고 구토가 나오고 머리는 쪼개질 것같이 아팠다.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나 뇌에 이상이 있는가 싶어서 병원에 가 검사받아 봐도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점점 메스껍고 구토 증상이 심해졌다.   혹시 위암은 아니겠냐는 의심이 생겼다.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위암은 아니고 위염이라고 했다. 위염은 보통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자꾸만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 위장병 전문병원을 알게 되어서 무조건 찾아갔다. 머리 아픈 것도, 온몸의 통증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내가 겪는 증상 모두가 위장병 탓이라는 것이었다.   위가 쪼그라들고 말라버려서 위암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내시경으로는 위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 위는 신경이 마비되어 밥이 들어가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00명 중의 한 사람인 챔피언급 환자라고 했다.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치료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검사한 후 입원을 하라는 결정이 났다. 젊어서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해 치료도 하고 수술도 했던 경험 탓에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냥 지내다가 세상과 작별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삶을 어찌 그렇게 쉽게 여길 일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려면 입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3주간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병원 생활은 모두 청산한 줄 알았는데 또다시 시작됐다. 무척 창피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병원 생활을 자주 해야 하는지, 이제는 병원 생활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번에는 수술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생활이 꽤 길었다. 입원하니, 무조건 금식을 시켰다. 금식하면서 간에 쌓인 독소를 모두 빼내는 작업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금식 후에는 미음으로 위를 다스리고, 후에는 날마다 묽은 죽을 번갈아 가며 먹게 했다.   신생아처럼 음식을 섭취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맛있게 먹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맛있게 먹을 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치료받는 데 집중했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27
  • 일상에서 피어나는 행복
    요즘은 모든 것이 너무나 흔한 시대여서 손주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무얼 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그렇게 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특별하지 않은 학용품은 싫증 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잊어버리더라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들은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어떤 것을 선물해 주어야 할지 무척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편하게 현금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황금만능주의 시대가 된 것일까?   어린이날이 지나면 곧 어버이날이다 보니, 어느 하루를 정해서 함께 식사하거나 놀이동산을 찾기도 한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나 역시 손녀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이 됐다. 내가 자라던 시대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작은 것이라도 생길라치면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새록새록 추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크레파스를 사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상으로 받은 크레파스가 있어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 3년 동안에는 물감을 사 본 일이 없다. 그러니 물감이 필요한 미술 시간이 내게는 아주 고통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억이 떠올라서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손녀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다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샀다. 아들네 가족과 함께 바람도 쐬고 식사도 하려고 독산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나는 자동차 안에서 손녀에게 선물을 주며 나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손녀야 부족한 것도, 크게 부러울 것 없겠지만, 특별히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선물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학창시절 12년 동안 사보지 못했고,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손녀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들을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이 손녀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독산성에 오른 우리는 산책 가운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우리처럼 3대가 모여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러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도 3대가 어울린 가족들로 붐볐다. 손녀는 내가 사준 크레파스가 정감이 가는가 보다. 손에서 놓지 않고 만지작거리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그리고 난 후 할머니를 그리겠다고 내 앞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계속하여 나를 바라보면서 손놀림을 했다. 탁자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그리더니 한쪽으로 가서 무엇인가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는 그림과 그 옆에 쓴 글을 내 앞에 내놓았다.   “할머니 사랑해요. 4살 때 산에 가서 술래잡기, 숨바꼭질 같은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했던 것이 8살이 돼서도 생각나요. 다리 아플 때는 할머니가 어부바해주어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하진 올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감춰 두었던 향기처럼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피로가 싹 사라졌다. 흐뭇한 마음이 몸 맘에 가득해지며 행복이 출렁거렸다.   특히 노인들은 자식들이 자주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점점 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행히도 노인복지관이나 경로당이 있어서 외로운 노인들을 챙겨주기도 한다. 이런 처지를 바라보노라며 가정의 달이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서글프다.   뉴스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버이날 무료급식소에 제일 먼저 나온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자녀가 없습니까?”라고 기자가 묻는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4형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 살면서 어버이날인데도 무료급식소에 나와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들이 바빠서 명절 때만 본다고 한다. 정말 바빠서일까? 왠지 마음이 씁쓸하다.   그뿐인가? 듣고 싶지 않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서 자살하는 사건 등 말로 표현하기조차 곤혹스럽고 부끄럽다.   효의 민족이라고 불리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랑도, 정도, 사라지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지만 행복지수는 높아 가는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에 드는 나라인데 행복하다는 말보다 불만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누구의 탓이 아니다. 모두가 우리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너를 보기 전에 먼저 나를 본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보지 않고 너를 보고 있다. 나를 보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   수십억 원을 들인 행사가 끝난 다음, 그 자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는 일도 다반사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탓일까? 수십억 원의 유발 효과가 겨우 쓰레기란 말인가.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을 배우고 익히지 못한 탓이다. 나를 돌아보며 우리를 생각하는 성찰적 실천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읽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면 서로가 행복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작은 것이나 소소함에서도 사랑과 행복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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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욱더 아름다운 나날을 기대하며
    치료를 시작하고 어느덧 1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한두 달이면 낫겠지”라는 기대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두 달, 석 달이 지나서 일 년이 되었다.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시간을 맞춰 다니다 보니 점심시간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시간을 맞추어 먹어야 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통원치료를 받으러 갈 때도 도시락을 싸서 가야 했다.   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치료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이었다. 조금만 잘 못 먹으면 당장 탈이 나기 때문이었다. 약을 먹는 시간과 치료 시간을 맞추려면 점심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휴게소에 들러서 차 안에서 먹기도 했고, 어느 때는 안전한 곳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어느 때는 공원으로 가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옆에 다가와 멀리서 놀러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놓고 멋쩍어서 혼자 웃기도 했다.   젊었을 때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더라면 무척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라도 치료할 수 있고,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소풍 다니는 것처럼 즐기며 다녔다. 공원을 걸으며 운동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렇게 날마다 죽과 함께 일 년을 보냈다. 하지만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1년이 다 되도록 김치를 못 먹었던 것이 무척 힘들었다. 또한, 누가 외식하자고 하면 그것도 참 곤란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마음 놓고 외식하게 될 날을 고대했다. 그렇게 6개월을 더 보내고 두 번째 추석을 보냈다. 나는 병원 약을 더는 먹지 않겠다는 용기를 냈다.   내 나름대로 지식을 얻어 약이 아닌 다른 식품으로 다스리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이제는 죽이 아니라, 질게나마 밥을 먹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단맛이 나고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동안 잘 참은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설날이 다가왔다. 아들네 가족이 이번 설에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어쩌면 음식 때문에 고생할지도 모르지만, 용기를 냈다. 그동안 외식을 금하고 나들이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가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맛있는 음식도 많을 것 같았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식사 시간이 되었다. 먼저 음식이 걱정되었다. 식당에 들어가 시금치 카레를 시켰다. 너무나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이렇게만 먹을 수 있다면 이번 여행은 아주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호텔에 들어가니 마침 내가 먹기 좋은 음식들이 많았다. 아들 내외가 나보다 더 좋아하며 안심하는 눈치였다.   3박 4일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아들 내외가 내 음식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다. 2년 만에 간 가족 여행은 지난날의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문제가 생겼다.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됐다. 또다시 죽을 먹으며 속을 달랬다. 이렇게 몇 번이고 밥과 죽으로 번갈아 먹으며 관리했더니 상당히 좋아졌다. 이제는 육류도 먹을 수 있다. 참으로 긴 여행을 마친 기분이다.   이제는 한 끼니만 안 먹어도 배가 고프다. 몸무게는 겨우 40kg 정도밖에 안 되지만, 사람들은 나를 보며 건강해 보인다고 말한다. 얼마나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인가? 새롭게 세상을 태어난 기분이다.   사람은 건강할 때 건강을 잘 지켜야 한다. 한번 잃은 건강은 무척 회복하기 어렵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라도 그것을 잃어보면 소중함을 알게 된다.   어쩌면 자신이 지닌 것이 귀한지도 모르고 지내는 것보다, 한번 잃어다가 회복함으로써 진한 감사 가운데 살 수 있다면, 이것도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내가 그렇다. 이 질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의 기도와 격려의 덕택이다. 앞으로도 이 감사를 잊지 않고 더욱더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즐거운 여행을 계속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6-05
  • 올바른 세계관과 분별력이 필요하다
    천차만별의 사람이 진료받는 곳이 병원이다. 좀 유명세가 있는 병원이라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렇다 보니 병원은 만물상과도 같다. 내가 치료받았던 병원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중국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캐나다에서 왔다고 한다.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날 고등학생이 우리 방에 들어왔다. 너무나 음식을 잘 먹던 학생이 어느 날부터 탈이 나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입원하는 날부터 전혀 치료를 받을 생각조차 없는 눈치였다. 금식도 힘들어했고, 죽을 먹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랬기에 날마다 영양제로 버텼다.   이렇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져 간호하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옆에서 보노라니 병난 딸 간호하다가 엄마까지 병이 날 것 같았다. 이 여고생은 사흘을 못 견디고 퇴원해버렸다.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길든 젊은 아이들이 음식을 절제하고 가려야 하는 치료를 제대로 받기란 고행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조금만 참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인데 인내할 수 없어서 고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치료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치료하는 동안에는 음식을 잘 다스리다가도 어느 정도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예전처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라고 한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치료할 때보다 그 후에 더 중요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 음식이다. 먹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는 것은 자신과 치르는 싸움이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참을 줄 아는 힘을 길러야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어떤 환경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병원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온갖 시선과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곳에서 뚜렷한 관점과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흔들리게 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분별하여 올곧게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늘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을 일깨우며 정의롭고 바른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추석이 다가왔다. 추석에 가족들이 모이면 음식 때문에 서로가 불편할 것 같아 병원에 더 남아있기로 했다. 장담할 수 없다면 피하는 것도 지혜가 아니겠는가. 퇴원을 하고 몇 달이 지나 설날이 되었을 때도, 병원을 선택했다.   환우들은 병원으로 도망 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나 혼자만 그렇게 지낸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같은 처지의 환우들이 있었기에 서로가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이겨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묽은 호박죽을 먹고 나니 배가 고팠다. 이제야,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신호였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치료가 된다는 뜻이었다. 너무나 기뻤다.   “이이고 배고파.”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대로 가면 제대로 된 치료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환우들과 운동하러 홍릉을 찾았다. 관광차 일부러 오기도 할 텐데 이렇게라도 자주 들르게 되니 감사하지 않은가. 모든 것에 감사하며 치료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점점 더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 예전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더욱더 아름답게 보이고, 감사가 넘친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판단력과 인내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 감사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올바른 시야를 확보하고, 흔들림 없이 올곧게 걸어야, 바른 결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6-04
  • 아파도 소중한 삶이다
    치료과정에서 금식하다 보면 힘이 없어 젊은 사람들도 영양제 주사를 맞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도 이겨나갔다. 워낙에 금식하는 것이 단련되어서 웬만큼 아프거나 굶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간호사부터 한 방에서 치료받는 사람들이 모두 내 의지에 놀라워했다.   힘이 없을 것이라며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하게 했다. 70세가 넘었고 머리까지 하얀 할머니이니, 혹시 힘이 없어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운동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내렸다. 어느 때는 살그머니 병원을 빠져나와 나와 근처에 있는 학교 마당을 돌기도 했다.   정신력이 약해지면 어떤 병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더 강한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이 약해지면 어떤 병도 이기지 못한다. 마음이 강할수록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다. 감기도 무서워하면 죽는다고 한다. 나는 옛날에 이미 유방암을 이긴 적이 있어서 이까짓 것쯤이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혼자서 아침 운동을 했다. 그리고 식사 후에는 치료에 들어갔다. 한방과 양방으로 통합적인 치료를 받았다. 얼마나 위벽이 굳었는지 등에 침을 놓으면 침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주치의도 침을 놓으며 무척 놀랐다. 간신히 침을 놓으면 등과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3주간의 입원을 마치고 일주일에 3일씩 통원치료를 받았다.   너무나 힘이 들었다. 이런 과정에서도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꼈다. 환우들끼리 서로 만나면 빨리 건강해서 맛있는 음식 실컷 먹어보자는 것이 인사였다. 이렇게 꾸준하게 치료를 받으며 걷는 운동이라도 열심히 했다.         치료하는 동안에는 죽을 먹어야 했다. 비록 죽을 먹어서 힘은 없었지만, 운동과 독서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치료받는 동안이라도 무의미하게 보내기는 싫었다. 삶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인식을 실천하는 데에도 충실해지고 싶어서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시간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니, 이 고난도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배고파서 먹고, 먹고 싶어서 먹는 그런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매 순간을 소중하게 가꾸는 심정으로 살았다. 밝고 따뜻한 봄날처럼 나에게도 건강하게 활기찬 삶을 사는 날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으로 힘든 시간을 이겨나갔다.   치료가 잘되어 음식을 먹을 때까지는 모든 음식을 절제해야 했다. 치료단계와 함께 증상에 따라 음식도 맞추어 먹게 했다. 음료, 과일, 육류, 생선, 채소, 모든 것을 치료단계에 맞춰 먹어야 했다. 생선은 튀겨도 안 되고 구워도 안 된다. 무조건 찜으로 먹어야 했다. 여름철에 먹는 상추쌈이 얼마나 맛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치료 기간이 여름철이었기에 상추쌈. 오이. 풋고추 등을 된장에 찍어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것 하나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고역이었다. 우유도. 요구르트도. 음료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도토리묵을 먹었다. 그런데 그날로 설사가 나서 축 처지고 말았다.   부드러운 음식이기에 먹어도 될 줄 알았는데 바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외식하게 되었는데 내가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간장게장을 먹었다. 역시나 설사를 하고 말았다.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말아야 했는데 먹고 싶은 생각에 지고 말았던 것이다. 먹고 싶은 것을 참는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명은 천하보다 귀중하다고 한다. 죽은 사람에게 천하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연이 아름다워 보이고, 음식도 귀하게 여겨지고, 주변의 사람들도 소중하게 다가올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보자. 순간 모든 것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28
  •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이를 넘어 인간의 수명을 150세로 내다보는 견해도 있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소망이다. 이렇다 보니 몸에 좋다는 식품이며 의약품의 개발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동마저도 건강관리를 위해 한다. 장수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사는 물론, 의료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우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장수도 좋지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산업 분야가 날로 성장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젖을 빨게 된다.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부족하면 울어서라도 부족함을 채워나간다. 허기를 채우는 식욕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본질적 욕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입맛이 없다면 그것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음식이 너무 맛있다. 무엇을 먹든지 맛있다. “맛있다”라고 하면서 먹으니 먹는 즐거움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사람이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져서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폭식도 하고 야식도 하고 간식도 한다. 대부분 사람에게서 위장병이 생기는 이유가 음식과 관련이 있다.         나는 지금이야 맛있게 잘 먹지만, 예전에는 밥을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나는 간식도 야식도 폭식도 하지 않는다. 급하게 먹지도 않고 아주 천천히 먹는다. 마냥 씹고 있다. 어떤 장소에 가서도 항상 가장 늦게까지 먹는다. 그러니 어떤 모임에 가서 식사할 때면 나는 최대한 앞에 서서 빨리 들어간다. 일찍 들어가서 먹기 시작해도 항상 늦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먹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모르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먹지 않으면 배고파야 정상인데, 나는 배고픔을 모르는 것이 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을 때는 일부러 맛있게 먹는 척했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영양분을 흡수하는 차원에서 먹어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인간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니,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나이가 들면 밥의 힘으로 산다고 한다. 정말이다. 젊어서는 하루에 한 끼니를 먹으나, 두 끼니를 먹으나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한 끼니만 먹지 않으면, 손발이 벌벌 떨리고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그래서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일 년에 2kg 정도나 살이 빠졌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어지럽고 구토가 나오고 머리는 쪼개질 것같이 아팠다.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나 뇌에 이상이 있는가 싶어서 병원에 가 검사받아 봐도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점점 메스껍고 구토 증상이 심해졌다.   혹시 위암은 아니겠냐는 의심이 생겼다.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위암은 아니고 위염이라고 했다. 위염은 보통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자꾸만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 위장병 전문병원을 알게 되어서 무조건 찾아갔다. 머리 아픈 것도, 온몸의 통증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내가 겪는 증상 모두가 위장병 탓이라는 것이었다.   위가 쪼그라들고 말라버려서 위암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내시경으로는 위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 위는 신경이 마비되어 밥이 들어가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00명 중의 한 사람인 챔피언급 환자라고 했다.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치료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검사한 후 입원을 하라는 결정이 났다. 젊어서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해 치료도 하고 수술도 했던 경험 탓에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냥 지내다가 세상과 작별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삶을 어찌 그렇게 쉽게 여길 일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려면 입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3주간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병원 생활은 모두 청산한 줄 알았는데 또다시 시작됐다. 무척 창피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병원 생활을 자주 해야 하는지, 이제는 병원 생활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번에는 수술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생활이 꽤 길었다. 입원하니, 무조건 금식을 시켰다. 금식하면서 간에 쌓인 독소를 모두 빼내는 작업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금식 후에는 미음으로 위를 다스리고, 후에는 날마다 묽은 죽을 번갈아 가며 먹게 했다.   신생아처럼 음식을 섭취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맛있게 먹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맛있게 먹을 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치료받는 데 집중했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27
  • 일상에서 피어나는 행복
    요즘은 모든 것이 너무나 흔한 시대여서 손주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무얼 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그렇게 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특별하지 않은 학용품은 싫증 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잊어버리더라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들은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어떤 것을 선물해 주어야 할지 무척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편하게 현금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황금만능주의 시대가 된 것일까?   어린이날이 지나면 곧 어버이날이다 보니, 어느 하루를 정해서 함께 식사하거나 놀이동산을 찾기도 한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나 역시 손녀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이 됐다. 내가 자라던 시대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작은 것이라도 생길라치면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새록새록 추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크레파스를 사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상으로 받은 크레파스가 있어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 3년 동안에는 물감을 사 본 일이 없다. 그러니 물감이 필요한 미술 시간이 내게는 아주 고통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억이 떠올라서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손녀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다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샀다. 아들네 가족과 함께 바람도 쐬고 식사도 하려고 독산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나는 자동차 안에서 손녀에게 선물을 주며 나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손녀야 부족한 것도, 크게 부러울 것 없겠지만, 특별히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선물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학창시절 12년 동안 사보지 못했고,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손녀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들을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이 손녀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독산성에 오른 우리는 산책 가운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우리처럼 3대가 모여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러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도 3대가 어울린 가족들로 붐볐다. 손녀는 내가 사준 크레파스가 정감이 가는가 보다. 손에서 놓지 않고 만지작거리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그리고 난 후 할머니를 그리겠다고 내 앞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계속하여 나를 바라보면서 손놀림을 했다. 탁자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그리더니 한쪽으로 가서 무엇인가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는 그림과 그 옆에 쓴 글을 내 앞에 내놓았다.   “할머니 사랑해요. 4살 때 산에 가서 술래잡기, 숨바꼭질 같은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했던 것이 8살이 돼서도 생각나요. 다리 아플 때는 할머니가 어부바해주어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하진 올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감춰 두었던 향기처럼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피로가 싹 사라졌다. 흐뭇한 마음이 몸 맘에 가득해지며 행복이 출렁거렸다.   특히 노인들은 자식들이 자주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점점 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행히도 노인복지관이나 경로당이 있어서 외로운 노인들을 챙겨주기도 한다. 이런 처지를 바라보노라며 가정의 달이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서글프다.   뉴스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버이날 무료급식소에 제일 먼저 나온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자녀가 없습니까?”라고 기자가 묻는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4형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 살면서 어버이날인데도 무료급식소에 나와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들이 바빠서 명절 때만 본다고 한다. 정말 바빠서일까? 왠지 마음이 씁쓸하다.   그뿐인가? 듣고 싶지 않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서 자살하는 사건 등 말로 표현하기조차 곤혹스럽고 부끄럽다.   효의 민족이라고 불리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랑도, 정도, 사라지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지만 행복지수는 높아 가는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에 드는 나라인데 행복하다는 말보다 불만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누구의 탓이 아니다. 모두가 우리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너를 보기 전에 먼저 나를 본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보지 않고 너를 보고 있다. 나를 보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   수십억 원을 들인 행사가 끝난 다음, 그 자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는 일도 다반사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탓일까? 수십억 원의 유발 효과가 겨우 쓰레기란 말인가.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을 배우고 익히지 못한 탓이다. 나를 돌아보며 우리를 생각하는 성찰적 실천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읽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면 서로가 행복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작은 것이나 소소함에서도 사랑과 행복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13
  • 인내해야 아름다운 인생을 꽃피울 수 있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한다. 하지만 인내가 어디 쉬운 일인가. 쉽다면 인내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다이어트에 신경을 쓴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도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중독에 빠질 가능성도 큰 편이다. 어떤 사람은 홈쇼핑에 빠져 빚더미 위에 앉은 사람도 있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정이 파탄 난 것을 보기도 한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내를 요구한다. 그만큼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고, 보람과 기쁨을 준다는 의미다. 인내는 성실을 내포하는 것이며, 희망이 있을 때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좋은 일을 성취하는 데에도 인내가 필요하지만, 사고를 예방하는 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일으키는 사건·사고들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심지어 살인에 까지도 이르게 되는 일도 있다. 모두 인내하지 못하는 탓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급한 편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내력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다”고 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3초만 기다리면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옛말에 ‘참을 인(忍)’ 자를 세 번만 쓰면 극한 분노로 벌이게 될 일도 피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인내는 성실을 내포하는 것이며, 희망이 있을 때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월터 미셸(W. Mischel)은 1966년 네 살짜리 653명을 대상으로 마시멜로 하나씩을 주면서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으면 두 개를 더 주겠다는 실험을 했다. 절반의 아이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그만 눈앞에 놓인 마시멜로 하나를 먹고 말았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81년 그 아이들의 삶의 현상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5분을 참아서 한 개를 더 받아먹었던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우수하더라는 것이다. 성적을 비롯해 삶의 전반에서 훨씬 더 뛰어났다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했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비만, 약물중독, 사회 부적응 등의 문제를 안고 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겠는가. 인내는 이성을 지닌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매우 가치 있고 고차원적인 실천 의지다. 인내가 부족하면 보통의 삶이 아니라, 저급한 삶으로 빨려들기 쉽다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은 인내를 통해 주어진다. 물을 끓이는 것도 100℃가 될 때까지 인내하고 열을 가해야 한다. “하늘은 언제나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라는 말이 있다.   인내는 누가 공짜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쌓아 나가야 한다. 오늘을 견뎌 밝은 내일을 창출하리라는 기대감을 지닌 사람이라야 인내할 수 있다.   예전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요즘 사람들이 인내력이 더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기술의 발달로 무엇이든지 쉽고 빠르게 얻게 된 탓도 있다. 무엇보다도 인내의 밑거름이 되는 고난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내를 배울 기회가 부족했다. 오히려 조급함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농부는 때를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해낸다. 곡식을 심기 위해 봄비를 기다린다. 농작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여름비를 기다린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린 끝에 수학의 기쁨을 맛본다. 그것이 기다림의 결과로 얻는 기쁨 아닌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기다릴 수 없다. 다린다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작업이다. 자아를 깨뜨리고 성찰해야 배울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며 부족함을 발견하고 채워나가는 지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끊임없이 채워나갈 줄 아는 사람이 메타인지가 발달한 사람이다. 사무엘 스마일스는 《자조론》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에델바이스는 고산지대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폭설과 강풍을 견뎌냈기에 신비로운 색을 낸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품고 잘 견뎌낼 때, 마침내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07
  • 학창시절
    1960년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4·19 혁명(1960년)을 거쳐 5.16 군사 정변(1961년)으로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에서도 여자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아갔다.   외갓집은 잘살았던 집안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계실 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을 가지고 다녔다. 2km를 걸어간 다음 6km를 기차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8km가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서 공부할 준비물을 샀다.   교복은 선배가 입었던 헌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스타킹 한 켤레로 3년을 지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전기다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로 된 둥근 다리미에 빨갛게 불이 붙은 숯을 넣고 옷을 다리다 보면 멀미를 해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모내기나 밭일을 해야 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농부들이 먹을 밥을 해놓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생이 주부가 하는 일을 다 해야 했던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약한 나는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이면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교실은 3층이었다. 나는 3층을 올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한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층 올라가서 쉬며 교실에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쉬어야 한다. 공부하랴 집안 일하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노는데 나는 그것까지도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은 외갓집에서 등록금을 주어서 공부했으나 2학년부터는 어머니가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나의 등록금 대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시험도 보지 못하게 했다.   종아리는 맞을 수 있었으나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종아리 몇 번을 맞고 난 다음에야 시험을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등록금 달라는 말을 겨우 꺼내야 했었다. 8km를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내 끈기를 보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아무리 고생이 돼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렇게나마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나의 꽃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학교생활 통지표의 통신란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똑같은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명랑함 부족”이란 문구였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는 그저 착한 아이였다. 착한 것이 아니라, 명랑함 부족과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자란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에서만 보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 아이로 비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던 내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이고 삶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나를 품어주는 보금자리였고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사신 어머니는 딸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위로요,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내 성품이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위로로 삼아본다.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30
  • 꿈이 있어야 행복하다
    세상에서 어린 생명이 태어나는 날만큼 기쁘고 행복한 날도 없을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한 가정의 미래이기도 하거니와 나라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이를 보면서 꿈나무들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 어린이가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가정과 나라의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산다. 꿈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지치지 않고 열정을 다 하여 아름다운 삶을 산다. 어떤 경우에라도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사람은 아래로 떨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은 떨어질 때 다시 튀어 오를 것을 준비한다. 공은 강하게 떨어질수록 그만큼 더 높이 올라간다. 떨어질수록 더 높이 튀어 오르는 공처럼 꿈을 잃지 않는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런 사람은 탄력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   어미 닭의 체온에 힘입어 자신을 키우고 둘러싼 껍질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한 병아리라야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그 나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것을 견뎌내고 한계 상황을 넘어서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꿈을 먹고 산다. 꿈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지치지 않고 열정을 다 하여 아름다운 삶을 산다. 어떤 경우에라도 움츠러들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희극배우였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은 “절망은 마약이다. 절망은 생각을 무관심으로 잠재울 뿐이다”고 말했다. 키르케고르(Kierkegaard)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희망은 생명이다. 희망은 소망이고 꿈이다.   그래서 희망을 희망하라고 한다. 꿈이 있는 사람은 자신 있게 산다. 어떤 환경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막연하게 어떤 행운만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꿈이 있는 사람은 밀물이 밀려올 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닻줄을 던지는 사람이다. 과거의 실패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어떤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고, 안전한 항구를 기대하며 열정을 다해 달려 나아간다.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는 “미래는 자신이 가진 꿈의 아름다움을 믿는 자의 것이다”고 말했다.   칭기즈칸 역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해서 포기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목에 형틀을 쓰고도 탈출했으며 뺨에 화살을 맞고 죽을뻔했으나 살아났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는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칭기즈칸이 되었다.”   내 안에 있는 절망감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꿈이다. 꿈은 허황한 것이 아니고, 막연한 것도 아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희망을 품는 사람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저술한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곳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부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사랑하며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되뇌면서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양심에 충실하며 희망을 놓지 않고 살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만 생각하며 희망을 잃고 낙심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벽을 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흑백갈등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산을 깎아 희망의 돌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우리는 이 나라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형제애라는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지만, 2008년 11월 4일 아프리카 케냐 출신 유학생의 아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꿈을 지니고 있느냐의 여부는 이렇게 큰 차이를 드러낸다.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준다. 이같이 꿈도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래서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꿈이 있어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도 세우고 그에 따른 실천도 하게 된다. 그러기에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9
  • 산책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호천 산책에 나섰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지난 일들을 성찰하며, 하루를 계획하며 실천을 그리며 걷는 이 길은 내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준다. 이런 생각과 함께 율목교를 내려선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친구들이 나를 반겨준다. 한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오늘은 시냇물 소리도 유난히 활기차다.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여러 가지 꽃들 곁으로 나비가 춤을 추고 물고기들은 내 발소리를 아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노루교에 가까워지자 급경사에 쌓아놓은 돌 틈으로 잔잔히 흐르던 시냇물이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활력이 넘친다.   옆에 있던 갖가지 꽃들도 제각각 자신을 봐달라며 자태를 뽐낸다. 나는 “그래 아이고, 다들 예쁘구나”라고 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푸르렀는지 온갖 식물들이 경쟁하며 푸른빛을 드러내고, 여름 냄새로 내 기운까지 북돋아 준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 나온 아들의 모습이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어떤 명화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저런 모습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언론을 통해 서로 다투고, 속이고, 싸우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침 산책길은 그런 후유증을 늘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내 샘내교에 이르니, 황새가 긴 다리와 가냘픈 목을 쭉 내밀고 어서 오라는 듯 고개를 든다. 오리 가족은 행사라도 하는 듯 자맥질과 유영을 뽐내며 나를 환영해준다. 이런 여름의 광경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인 양 행복에 젖는다.   여름의 길목이라 아침인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투명한 진주가 되어 송골송골 맺힌다. 이때쯤이면 동남교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우리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을 떠밀리듯, 억지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선택이고 자유다. 스스로 최적의 길을 찾아 즐겁게 걸으면 된다. 산책길에서 경주는 필요 없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 같은 산책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의 인생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걷고 있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희망을 희망하라
    1. 어딘가에 희망은 있다    극한 고난과 마주한 환경에 처해도 어딘가에 희망은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사람에게 고난은 무엇일까? 고난이 고난으로 끝난다면 고난은 슬픔의 모태일 뿐이다. 그러나 고난은 반드시 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시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가에는 온통 펄들로 가득하다. 검게 펼쳐진 개흙은 죽은 듯 고요하다. 생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드러누운 갯벌에는 밀려오는 고난을 양식 삼아 수많은 생명이 살아간다. 그 가운데는 조개의 아픔으로 탄생하는 진주도 있다.    나의 인생도 어두운 갯벌 속 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런 나의 인생이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을 조금이라도 지켜본 사람은 모두 불운이라고 혀를 찼다. 불운도 이 정도면 지나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비신앙인들이 볼 때는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의 처지였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택하는 길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이 삶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힘든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죽음을 택할 그 마음으로 사세요. 죽을힘을 다해 살다 보면 인생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해답과 보상과 내놓고 만다는 것이다. 먹구름은 비를 뿌린다. 때로는 폭우를 쏟아내며 많은 종류의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한없이 비를 뿌리지는 못한다. 먹구름 뒤에는 반드시 밝은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구름이 가로막고 있는 하늘의 본 모습은 언제나 푸르고 푸른 하늘이다.  그래서 고난은 잠깐이라고 한다. 때로 이 잠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난의 긴 터널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터널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이 끝나는 지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지치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다.    사람의 삶에서 돈과 건강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다. 여기에 더하여 행복한 가정과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삶의 질은 심각한 훼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이 세 가지가 모두 겹쳐서 찾아온다면 상상조차 어려운 환경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고난과 맞서야 했다. 이것은 고난이라기보다 생사의 문제였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를 반복해야 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사치였다. 이 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이다. 인간에게 희망은 고난과 맞서 싸울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내 인생은 극한 고난과 절대 희망의 치열한 전투였다.   유정애 목사의 삶의 증언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초·중·고교를 거쳐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장합동개혁 소속 목사로 복된 교회를 일구어낸다. 옥상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가 수백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고,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목회를 하다가 이제는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산다. 현재는 박요섭 박사와 함께 시니어들의 두 번째 청춘을 응원하며 희망을 쏘아 올리는 가운데 글을 쓰며 또 한 번의 청춘을 꽃피우고 있다. 이 글은 한국의 미우라 아야코로 불리는 유정애 목사의 치열했던 삶의 증언이고, 앞으로 펼쳐질 빛나는 세계에 대한 서막이다. 이 글을 통해 모두가 위로받고 용기를 내, 행복한 삶을 일구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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