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04-23(화)

일 년에 단 하루 특별한 종묘를 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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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단 하루 특별한 종묘를 보는 날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김연수)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이 공동 주최하고 종묘대제봉행위원회(종묘제례보존회‧종묘제례악보존회)가 주관하는 2019년 종묘대제가 오는 5월 5일 오후 2시에 종묘 정전에서 거행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에 속하는 종묘대제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왕이 직접 거행하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제사로, 종묘 정전(총 19실)에는 역대 조선의 왕 19명과 왕비 30명 등 총 49명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1969년 복원된 이래 매년 개최된 종묘대제는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자,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국제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8년 종묘대제 행사 모습. 사진제공 - 문화재청     종묘대제는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드물고 귀한 기회로, 먼저 종묘(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는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과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와 종묘제례악(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은 2001년 5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종묘대제는 유교의례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경건하고 엄숙한 제례의식과 더불어 음악(종묘제례악)과 춤(일무)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예술로 전 세계인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문화재청장과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을 비롯하여 문화재 관계인사, 주한 각국 대사, 전주이씨 종친, 국내외 관광객 등 약 3만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행사는 영녕전 제향(10:00~12:00)을 시작으로 어가행렬(11:00~12:00, 경복궁 광화문→세종로사거리→종로 1‧2‧3가→종묘)이 진행되며 오후 2시부터 본 행사인 정전 제향(14:00~16:30)이 거행된다. 영녕전은 오전 9시부터 관람할 수 있고, 본 행사인 정전 제향은 오후 1시부터 입장할 수 있다. 정전 제향 후에는 평소에 공개되지 않는 정전 신실(神室)도 볼 수 있다. 제례의 엄숙함을 위해 정전 관람석 일부는 사전 예약(300석)으로 운영하며, 나머지는 현장에서 선착순(550석)으로 관람석을 배정한다. 관람석 사전 예약은 오는 22일 오후 1시부터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http://www.chf.or.kr)을 통해 네이버 예약관리시스템으로 접속하면 되며, 무료이다. 현장 관람객은 행사 당일 선착순으로 입장할 예정으로 일찍 오면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관계자는 "이날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제례와 제례악이 잘 조화된 훌륭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감상하며 전통의 깊은 울림에 공감하는 뜻깊은 시간을 보낼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종묘대제를 더욱 품격 있는 국가행사로 승화시키고, 세계인이 함께할 수 있는 국제행사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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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노인종합복지관, 2년 연속 교통안전 베테랑교실 운영

서울시립 도봉노인종합복지관(관장 이은주)이 시니어 교통안전 교육 및 인식개선 사업인 ‘2019 교통안전 베테랑 교실’을 17일부터 운영한다고 밝혔다. 교통안전 베테랑 교실은 현대자동차그룹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며 고령자의 교통안전에 대한 이해도를 높임으로써 실생활의 습관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도봉노인종합복지관은 지난해 안전보행교육 62명, 안전운전교육 38명이 참여하여 총 100명의 어르신이 교육을 수료했다. 교육 수료자 중 교통안전 문화 확산에 기여하고자 하는 참여자가 다수 나타남에 따라 나눔 서포터즈 20명을 선발하여 도봉구 내 교통안전 캠페인과 교통취약지점 조사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도봉경찰서 등의 유관기관과 지역 교통안전망을 구축함으로서 불법 주정차 차량 계도, 안전보행 및 운전상식 퀴즈 등의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도봉구민의 교통안전 의식 향상 및 교통사고 예방의 효과가 기대되는 바이다. 교통안전 베테랑 교실은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며 △안전보행교육 △안전운전교육 △나눔 서포터즈 △교통안전 골든벨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만 65세 이상의 어르신은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참여를 희망하는 경우 전화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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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1960년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4·19 혁명(1960년)을 거쳐 5.16 군사 정변(1961년)으로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에서도 여자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아갔다.   외갓집은 잘살았던 집안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계실 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을 가지고 다녔다. 2km를 걸어간 다음 6km를 기차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8km가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서 공부할 준비물을 샀다.   교복은 선배가 입었던 헌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스타킹 한 켤레로 3년을 지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전기다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로 된 둥근 다리미에 빨갛게 불이 붙은 숯을 넣고 옷을 다리다 보면 멀미를 해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모내기나 밭일을 해야 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농부들이 먹을 밥을 해놓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생이 주부가 하는 일을 다 해야 했던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약한 나는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이면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교실은 3층이었다. 나는 3층을 올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한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층 올라가서 쉬며 교실에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쉬어야 한다. 공부하랴 집안 일하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노는데 나는 그것까지도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은 외갓집에서 등록금을 주어서 공부했으나 2학년부터는 어머니가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나의 등록금 대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시험도 보지 못하게 했다.   종아리는 맞을 수 있었으나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종아리 몇 번을 맞고 난 다음에야 시험을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등록금 달라는 말을 겨우 꺼내야 했었다. 8km를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내 끈기를 보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아무리 고생이 돼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렇게나마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나의 꽃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학교생활 통지표의 통신란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똑같은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명랑함 부족”이란 문구였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는 그저 착한 아이였다. 착한 것이 아니라, 명랑함 부족과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자란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에서만 보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 아이로 비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던 내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이고 삶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나를 품어주는 보금자리였고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사신 어머니는 딸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위로요,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내 성품이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위로로 삼아본다.   유정애

내 유소년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전라북도 김제이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대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지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난은 물질보다는 외로움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계셨고 태어난 지 8개월이 못 되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고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오빠가 나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 먹여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부르곤 했다. 허공에 대고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서른한 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남매를 기르며 사셨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땐 여자가 돈을 번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얼마 되지도 않은 논밭을 가꾸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여성이다가 보니 큰 힘이 필요한 일에 부닥치면 자장 힘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둡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는 어머니가 한번 말씀하시면 감히 “아니요”라는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동네 어른들은 내게 ‘착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머니는 늘 들로 일하러 가셨고, 열두 살 위인 오빠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외로움이 내 친구였던 셈이다. 오빤 청개구리처럼 항상 어머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옛날엔 겨울이 되면 시골에서는 일거리가 귀했다. 이렇다 보니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오빠는 어머니 몰래 집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가지고 나가 도박 자금으로 썼다. 그러니 집안 분위기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밤 시골길은 얼마나 어두운가? 얼마나 캄캄한지 앞뒤를 분간할 수도 없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딘가에서 도박에 빠져 있을 오빠를 찾아오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창호지를 붙여 만든 조그만 등에 등잔을 넣고 불을 밝히며 캄캄한 동네를 찾아다녀야 했다. 무섭기는 얼마나 무서운가? 어두운 밤길보다 어머니의 명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나는 손에 장갑도 없이 눈을 헤치며 오빠를 찾아 나선다. 온 동네 집집이 들러보면 불이 켜진 집이 있다. 나는 그 집 앞에 가서 가만히 들어본다. 그러면 영락없이 화투 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오빠” 하고 불러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부르면 누군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래도 오빠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불쌍해서 오빠를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아니 그다음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야 했다. 자연히 어머니와 오빠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지옥 같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얼마나 문밖에서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한창 뛰어놀 때인데도 뛰어놀지도 못하고 어른들 속에서 희생양으로 살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어려서부터 이런 아픔을 가져야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기쁨이었다. 교회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교회학교에서의 활동은 내 최고의 삶이었다. 성경퀴즈대회에서도 암송대회에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는 학용품을 거의 사서 쓰지 않았다. 모두가 교회에서 받은 상품이었다.   어둡게만 보였던 나는 항상 얌전하고 착하고 순종 잘하는 아이였다. 이런 모습 때문에 분에 넘치는 칭찬과 함께 애늙은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살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교회에서는 일꾼이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루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일깨워 새벽기도를 하게 한다.   새벽이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한번 불러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치우는 바람에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덕분에 나는 기도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나는 지금까지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었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건강은 항상 좋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병이 나면 어린 내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해야 했다. 죽을 쑤어드리고 밤새 온몸을 주물러드리며 잠이 드실 때까지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가 잠이 드시면 나도 옆에서 잠을 잤다.   반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일이 없어서 조금은 편히 지내신다. 그때면 어머니는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신다. 기도 중에 잠이 드신 어머니 모습을 보면 천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일어나면서 너무나 기뻐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정애야 나는 천국을 보았다. 그곳에서 내 집이 얼마나 좋은지 황금으로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집이더라.”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든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유정애

산책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호천 산책에 나섰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지난 일들을 성찰하며, 하루를 계획하며 실천을 그리며 걷는 이 길은 내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준다. 이런 생각과 함께 율목교를 내려선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친구들이 나를 반겨준다. 한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오늘은 시냇물 소리도 유난히 활기차다.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여러 가지 꽃들 곁으로 나비가 춤을 추고 물고기들은 내 발소리를 아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노루교에 가까워지자 급경사에 쌓아놓은 돌 틈으로 잔잔히 흐르던 시냇물이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활력이 넘친다.   옆에 있던 갖가지 꽃들도 제각각 자신을 봐달라며 자태를 뽐낸다. 나는 “그래 아이고, 다들 예쁘구나”라고 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푸르렀는지 온갖 식물들이 경쟁하며 푸른빛을 드러내고, 여름 냄새로 내 기운까지 북돋아 준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 나온 아들의 모습이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어떤 명화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저런 모습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언론을 통해 서로 다투고, 속이고, 싸우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침 산책길은 그런 후유증을 늘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내 샘내교에 이르니, 황새가 긴 다리와 가냘픈 목을 쭉 내밀고 어서 오라는 듯 고개를 든다. 오리 가족은 행사라도 하는 듯 자맥질과 유영을 뽐내며 나를 환영해준다. 이런 여름의 광경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인 양 행복에 젖는다.   여름의 길목이라 아침인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투명한 진주가 되어 송골송골 맺힌다. 이때쯤이면 동남교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우리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을 떠밀리듯, 억지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선택이고 자유다. 스스로 최적의 길을 찾아 즐겁게 걸으면 된다. 산책길에서 경주는 필요 없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 같은 산책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의 인생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걷고 있다. 안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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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老(노노)’로 신명을 창출하는 시니어

   노인은 그저 사회복지의 수혜 대상자가 아니라 엄청난 지혜의 보물창고다.   초고령사회를 향해 가는 대한민국은 노령인구와 양극화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을 찾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700만 명 정도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3년 출생자)가 살고 있다. ‘5575세대’(55세~75세)로 확대하면 1천만 명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초고령사회로 향해 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노령인구와 양극화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가운데 “고령화는 고령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김태유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김용무 단장과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회원들(왼쪽에서부터 배영환, 이매자, 윤순희, 김용무)       따라서 이런 맥락에 부합하는 시니어들이 주목받게 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토질과 기후에 따라 자생하는 식물이 다른 것처럼 사람도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을 실행하는 곳으로 모여들기 마련이다.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관장 황준호)에 유난히 열정이 넘치는 시니어들이 많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활력이 넘치는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여러 동아리 가운데 ‘노노 신나라 색소폰’도 왕성한 활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한다.    이 동아리 김용무 단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역할을 소화해 낸다. 화성시 향남면 상두리에서 500여 년 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곳에서 사는 김 단장에게서는 긴 세월에서 이어진 연륜의 아우라(Aura)가 풍긴다.   ▲ '노노 신나라 색소폰' 동아리 김용무 단장       자신을 평범한 촌로라고 말하는 김 단장이지만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운영위원, 광산 김씨 판교공파 부회장, 화성시 광복회 운영위원도 맡고 있다. 여전히 손수 적잖은 농사를 지으며 관계된 일은 물론, 이웃의 크고 작은 일에도 열과 성을 다한다.   김 단장의 이렇게 성실한 삶에는 맏형의 애국애족 정신이 어려 있다. 김 단장의 맏형이 바로 애국지사 김용창(1926-1945) 선생이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미처 그해 봄기운을 다 느껴보지도 못한 4월 3일 차디찬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기에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했다. 김 단장은 맏형을 생각할 때마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말한다.    김 단장은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처우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먼저 지자체나 후손들이 묘지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것부터 지원해야 한다. 아울러 후세대가 나라 위해 몸 받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도록 세밀한 지원과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에서 공로상을 받는 김용무 단장(오른쪽)과 황준호 관장       김 단장은 ‘NO老’를 외친다. 동아리 이름에도 ‘NO老’가 맨 앞에 붙는다. ‘늙은이’라는 말이 풍기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늙음’을 ‘낡음’처럼 인식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지다.   노인은 그저 사회복지의 수혜 대상자가 아니라 엄청난 지혜의 보물창고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고령화의 문제는 고령화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며 누가 찾아주고 도와주기만 기다리지 말고 선제적으로 대응하자고 말한다.   김 단장을 만나고 돌아서 오는 길에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힘이 솟아났다. 이것은 그와의 만남에서 발생한 공감에서 창출되는 에너지였다.   취재위원 배영환  

‘땡스기브’가 디자인하는 아름다운 세상

   ‘땡스기브’는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되고 싶어 한다.   “여보세요? 거기 작은 도서관이나 지역아동센터에 책을 지원해 주시는 곳 맞나요?” “예! 맞습니다.”   서슴없이 책을 지원해준다는 응답에 ‘(사)땡스기브’가 어떤 단체이진 매우 궁금해졌다. 봄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3월 끝자락에 ‘(사)땡스기브’를 찾아갔다. 규정에 따라 작은 도서관이나 지역아동센터에 책을 지원하는 ‘(사)땡스기브’의 나동훈 대표는 뜻밖에도 디자인 전공 박사였다. 디자인의 안목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 (사)땡스기브 나동훈 대표       인간의 삶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동훈 대표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삶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참된 미덕의 본질》을 통하여 새로운 눈을 떴다고 한다.   특히 문화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사)땡스기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는 대립과 갈등으로 몰고 가는 이념과 달리 삶으로 느끼고 공유하며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 삶 속에서의 공유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 가운데 글로써 교감하게 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땡스기브’에서는 격월로 를 발행한다. 잠시만이라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돌려 책을 보게 하는 가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비록 작은 영역이기는 하나 이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이 되고 싶다고 한다.   이 취기에 공감하는 교수, 판사, 목사, 교사, 학생, 주부 등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이 일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서 봉사하고 있다.         ‘(사)땡스기브’는 개인이나 기업의 후원으로 연간 2만 여 권의 책을 공부방, 지역아동센터, 작은 도서관 등에 나누어 주는 통로가 되고 있다.   물질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면서 지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생성하며 희망차고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꿈의 사회(Dream Society)’를 끌어당기고 있다.   ‘(사)땡스기브’도 이런 일에 이바지하는 나눔공동체다. ‘꿈의 사회(Dream Society)’는 그저 말만 무성한 사회가 아니라, 물질이나 과학기술을 희망과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실천을 통해 만들어내는 행복한 세상이다. 이런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좋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길도 닦는다. 가정, 학교, 교회, 직장 등에서 독서토론을 하도록 돕고 있다.         나동훈 대표와 대화하는 내내 편안함과 행복을 느꼈다. ‘(사)땡스기브’의 일들도 나 대표와의 만남처럼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고 있다.   꽃이 피고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봄도 농부의 노력이 있어야 곡식의 씨앗을 싹틔우고 키울 수 있듯이 아름답고 복된 세상도 ‘(사)땡스기브’와 같은 아름다운 손길들이 모여서 열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형묵 기자 chm@seniortoday.net  

요양보호에 헌신한 배영웅 원장이 사는 삶의 향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일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어야 한다.   봄이 더욱더 기다려지는 겨울의 끝자락에 서울시 양천구에 있는 ‘사랑나눔복지센터(원장 배영웅)’를 찾았다. 입구에서는 오가는 시민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준비로 분주했다. 그 모습에서 복지센터의 이름에 ‘사랑’과 ‘나눔’을 넣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배영웅 원장의 생각은 온통 사회복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쉴 새 없이 사회복지에 대한 비전과 현실적인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진단하고 대안과 비전을 쏟아냈다.     ‘사랑나눔복지센터’에서의 주요 업무는 요양보호사를 교육하고 파견하는 일이다. 요양보호를 해야 하는 어르신을 간호하고 돌보는 서비스를 진행하는 최전방 복지센터라고 할 수 있다.   요양보호사들은 요양보호에 필요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한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센터를 통해 요양보호를 요청하는 가정을 방문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휠체어 이동, 신체활동, 마사지, 몸 관리, 욕창 예방, 낙상 방지를 기본으로 가사서비스와 정서 활동까지 제공하게 된다.   이런 서비스는 자식이라도 날마다 하기는 어려운 일들이다. 국가에서 이런 복지체계를 마련한 것은 매우 다행하고 바람직하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매우 필요한 복지정책이다.   ▲ 배영웅 원장(사랑나눔복지센터). 배 원장은 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사회복지와 요양보호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 냈다.     배 원장은 이런 좋은 제도가 현실적인 이해부족으로 겉돌고 있다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요양보호사들의 열악한 처우가 국가의 최저임금제와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요양보호사들의 활동을 위축시켜 요양보호 수급자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급자들을 돌보는 시간을 줄여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려는 것은 매우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요양보호는 사회복지에서 한 부분에 속하는 좁은 영역이다. 국민 대다수가 관심을 쏟는 분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포퓰리즘적인 발상에서만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양보호사 직무교육   요양보호 수급자나 가족들의 처지에서는 매우 급하고 절실한 문제다. 이런 문제에 봉착한 당사자나 가족은 삶이 붕괴할 수도 있는 엄청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은 수급자들이 가져야 할 인식에서도 전환이 필요하다. 요양보호서비스를 선용해야 하는데 요양보호사들을 가사도우미처럼 활용하려 든다면 스스로 제도를 망치는 것이다. 마음대로 부리는 하인 취급을 한다든지,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고 교체를 요구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요양보호사의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요양보호사는 국가의 복지정책을 수행한다는 마음과 수급자를 부모와 같이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과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 요양보호사들은 요양보호에 필요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한 전문가들이다.   요양보호센터는 국가를 대신해 요양보호서비스를 수행하는 비오톱(biotope·다양한 생물들이 군집하는 서식처)이다. 이런 곳이 서서히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우리는 요양보호센터라는 복지의 비오톱이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한다. 국민 모두는 자신도 수급자나 그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이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어디 요양보호에 관한 문제뿐이겠는가?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일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어야 한다. 사회라는 말에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요양보호사는 국가의 복지정책을 수행한다는 마음과 수급자를 부모와 같이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과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배 원장은 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사회복지와 요양보호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 냈다.   전직이 궁금해서 물었더니, 특전사에서도 특수임무를 띠고 국방의 의무를 다한 예비역 소령이었다. 아직도 군에서 얻은 질병의 후유증을 달고 산다는 배 원장은 투철한 국가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배 원장은 요양보호에 대해서도 군 복무 시절 못지않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사랑나눔복지센터’는 최고의 서비스를 위하여 욕구사정과 그에 따른 케어플랜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2015년 장기요양기관 평가 최우수기관으로 선정   이런 결과로 장기요양보험 실시 이후 두 번의 평가에서 모두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효의 실천과 장기요양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학생체험 인턴제도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니어 인턴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요양보호에서 그치지 않고 매주 무료 급식에서 100여 명의 어르신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등 삶의 총체적 의미로서의 사회복지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 학생들에게 효의 실천과 장기요양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학생체험 인턴제도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니어 인턴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던 2008년부터 기관을 운영하는 배 원장은 제도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해 사단법인 정보나눔회의 설립을 주도하여 이사로 섬기고 있으며, 서울시 장기요양기관 수석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장기요양기관의 “권리보장과 급여 수준의 적절성, 서비스에 대한 용이성과 불평등 문제”를 과제로 삼아 정책 토론을 주도하는 등 장기요양기관의 발전, 요양보호사의 권익과 처우에 대한 꾸준한 노력으로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표창과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기도 하였다.   문화사회복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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