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1960년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4·19 혁명(1960년)을 거쳐 5.16 군사 정변(1961년)으로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에서도 여자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아갔다.
외갓집은 잘살았던 집안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계실 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을 가지고 다녔다. 2km를 걸어간 다음 6km를 기차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8km가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서 공부할 준비물을 샀다.
교복은 선배가 입었던 헌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스타킹 한 켤레로 3년을 지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전기다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로 된 둥근 다리미에 빨갛게 불이 붙은 숯을 넣고 옷을 다리다 보면 멀미를 해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모내기나 밭일을 해야 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농부들이 먹을 밥을 해놓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생이 주부가 하는 일을 다 해야 했던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약한 나는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이면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교실은 3층이었다. 나는 3층을 올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한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층 올라가서 쉬며 교실에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쉬어야 한다. 공부하랴 집안 일하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노는데 나는 그것까지도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은 외갓집에서 등록금을 주어서 공부했으나 2학년부터는 어머니가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나의 등록금 대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시험도 보지 못하게 했다.
종아리는 맞을 수 있었으나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종아리 몇 번을 맞고 난 다음에야 시험을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등록금 달라는 말을 겨우 꺼내야 했었다. 8km를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내 끈기를 보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아무리 고생이 돼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렇게나마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나의 꽃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학교생활 통지표의 통신란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똑같은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명랑함 부족”이란 문구였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는 그저 착한 아이였다. 착한 것이 아니라, 명랑함 부족과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자란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에서만 보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 아이로 비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던 내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이고 삶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나를 품어주는 보금자리였고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사신 어머니는 딸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위로요,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내 성품이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위로로 삼아본다.
유정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