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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소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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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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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전라북도 김제이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대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지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난은 물질보다는 외로움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계셨고 태어난 지 8개월이 못 되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고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오빠가 나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 먹여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부르곤 했다. 허공에 대고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서른한 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남매를 기르며 사셨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땐 여자가 돈을 번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얼마 되지도 않은 논밭을 가꾸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여성이다가 보니 큰 힘이 필요한 일에 부닥치면 자장 힘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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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둡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는 어머니가 한번 말씀하시면 감히 “아니요”라는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동네 어른들은 내게 ‘착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머니는 늘 들로 일하러 가셨고, 열두 살 위인 오빠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외로움이 내 친구였던 셈이다. 오빤 청개구리처럼 항상 어머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옛날엔 겨울이 되면 시골에서는 일거리가 귀했다. 이렇다 보니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오빠는 어머니 몰래 집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가지고 나가 도박 자금으로 썼다. 그러니 집안 분위기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밤 시골길은 얼마나 어두운가? 얼마나 캄캄한지 앞뒤를 분간할 수도 없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딘가에서 도박에 빠져 있을 오빠를 찾아오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창호지를 붙여 만든 조그만 등에 등잔을 넣고 불을 밝히며 캄캄한 동네를 찾아다녀야 했다. 무섭기는 얼마나 무서운가? 어두운 밤길보다 어머니의 명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나는 손에 장갑도 없이 눈을 헤치며 오빠를 찾아 나선다. 온 동네 집집이 들러보면 불이 켜진 집이 있다. 나는 그 집 앞에 가서 가만히 들어본다. 그러면 영락없이 화투 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오빠” 하고 불러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부르면 누군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래도 오빠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불쌍해서 오빠를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아니 그다음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야 했다. 자연히 어머니와 오빠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지옥 같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얼마나 문밖에서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한창 뛰어놀 때인데도 뛰어놀지도 못하고 어른들 속에서 희생양으로 살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어려서부터 이런 아픔을 가져야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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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기쁨이었다. 교회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교회학교에서의 활동은 내 최고의 삶이었다. 성경퀴즈대회에서도 암송대회에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는 학용품을 거의 사서 쓰지 않았다. 모두가 교회에서 받은 상품이었다.

 

어둡게만 보였던 나는 항상 얌전하고 착하고 순종 잘하는 아이였다. 이런 모습 때문에 분에 넘치는 칭찬과 함께 애늙은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살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교회에서는 일꾼이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루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일깨워 새벽기도를 하게 한다.

 

새벽이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한번 불러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치우는 바람에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덕분에 나는 기도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나는 지금까지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었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건강은 항상 좋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병이 나면 어린 내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해야 했다. 죽을 쑤어드리고 밤새 온몸을 주물러드리며 잠이 드실 때까지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가 잠이 드시면 나도 옆에서 잠을 잤다.

 

반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일이 없어서 조금은 편히 지내신다. 그때면 어머니는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신다. 기도 중에 잠이 드신 어머니 모습을 보면 천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일어나면서 너무나 기뻐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정애야 나는 천국을 보았다. 그곳에서 내 집이 얼마나 좋은지 황금으로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집이더라.”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든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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