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2(화)

나의 봉담 정착기

댓글 0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밴드
  • 페이스북
  • 구글플러스
기사입력 : 2017.03.23
  • 프린터
  • 이메일
  • 스크랩
  • 글자크게
  • 글자작게

나는 서울 잠실에서 40여 년 동안 살았었다.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그때 잠실은 한강 변 모래벌판이었다. 여기에 대단지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이렇다 보니 아파트 후문 옆이 시내버스 종점일 정도였다.
 
종점은 곧 차고지를 의미하니, 얼마나 한적했을지 짐작될 것이다. 도심인 종로나 을지로에서 밤늦게 택시를 세우고 잠실로 가자고 하면 기사는 번번이 핑계를 대고 승차거부를 하는 일이 많았다.
 
그 먼 곳에 갔다가 승객이 없어 빈 차로 올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주변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어 서울에서도 번잡하고 공기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동네가 되고 말았다.
 
나는 결혼 후 장항제련소에서 근무하다가 4년쯤 되었을 때 말레이시아에 취업할 기회가 생겨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5년을 살았었다. 귀국하여 내가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곳이 잠실이었다.
 
내가 장만한 집은 4단지 아파트였는데 연탄보일러로 난방하는 17평형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아내는 보일러 아궁이에서 부서진 연탄재 부스러기를 긁어내느라 땀과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나를 맞이할 때가 많았다.
 
여동생은 우리 집 부근 2단지 19평형에 살았는데 그 아파트는 석유로 난방했다. 아내는 은근히 그곳에 사는 여동생 집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매제는 은행원이었다. 그러니 이재에도 밝았을 것이고 그런 덕택에 연탄도 때지 않는 쾌적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사람을 위해서는 어서 빨리 연탄에서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에는 아파트값이 계속 오를 때여서 모두 은행대출을 받아 집을 옮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재에는 주변머리가 없던 나는 내 손에 현금이 모이지 않으면 집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이런 탓에 여러 해 뒤에야 2단지로 옮겨 연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 2, 3, 4단지에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아파트값은 턱없이 뛰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던 2단지 19평형도 당시 재건축 계획이 없던 34평형 5단지 값보다 더 올라서 오히려 수리비를 제하고도 남는 가격이었다.
 
애들도 대학에 다니는 나이가 되어서 좀 더 넓은 집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2단지 아파트를 팔고 5단지 아파트를 사서 수리를 했다. 오래된 난방 파이프도 교환하고 바닥은 긁히지 않는다는 소재로 깔고 싱크대도 교체하는 대수리를 감행했다.
 
내가 살던 주공 5단지는 롯데월드 바로 건너편이어서 잠실에서도 제일 번잡한 곳이었다. 어느새 이곳도 재건축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40년 전에 지은 낡은 아파트가 5년 전 살 때보다 5배가 넘는 가격으로 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노후자금도 마련하지 못한 채 퇴직한 주변머리 없는 나를 신께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리라. 이참에 차라리 아파트를 팔고 공기 탁하고 번잡한 잠실을 떠나 애들이 사는 수원 근방으로 집을 옮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부동산에 전세로 집을 내놓았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 수원은 서울과 별반 차이 없는 대도시가 되었으니 그 부근 어딘가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니 봉담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지만, 순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성당에 다녀야 하니 우선 인터넷에서 봉담성당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가까운 곳에 성당도 있었다.
 
직접 답사도 필요 없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으니 정말로 편리한 세상이다. 일단 한번 가보기로 하고 내비게이션에 봉담성당을 입력하고 차를 몰고 나섰다. 현지에 도착해보니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여러 군데 있어서 이 정도라면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바로 옆에 나 있고 수원도 20~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통이 편리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아파트를 찾아 부동산에 전세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당장 전세로 나온 것은 없었다. 전세가 나오면 바로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잠실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집을 알아보러 봉담 부근 여러 부동산사무소를 방문하며 돌아다녔다.
 
며칠 후 호매실에서 전세 나온 게 있어 가보았으나 너무 낡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고 있는데 봉담에서 전세가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지은 지 10년 정도였는데 비교적 깨끗해서 바로 계약을 했다.
 
이렇게 하여 2011년에 지금 사는 봉담의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주 만나던 친구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는 사람들 가까이 살아야 하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데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고 만류가 대단했다.
 
그러나 성당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에게 교리도 가르치다 보니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 기간이 끝나는 2년이 되어 아예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서울 아파트를 정리했다. 그리고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에서 위치가 더 나은 아파트를 장만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합창도 하고 서예도 배우면서 탁구와 당구도 즐기고 있다. 특히 인문학 강의를 듣다 보면 이제 활발한 중년의 시작이라는 교수님 말씀에 새로이 힘이 솟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강사교육까지 받으라고 하신다. 이렇다 보니 내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며 행복에 젖어 든다. 내가 전혀 계획해보지도 못했던 이곳 봉담에서 누리는 나의 두 번째 청춘은 그야말로 소박하고 알찬 나날이다.
 
이런 내 삶은 어쩌면 모든 인간이 바라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지는 최상의 가치이고 행복이 아닐까? 내 마음에서는 어느새 깊은 감사가 맑고 싱그러운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
 
아! 이제 나는 이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 행복을 더욱더 주변과 나누며 풀밭으로 꽃밭으로 바꾸며 살려고 노력한다.

김상태 취재위원

태그

BEST 뉴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나의 봉담 정착기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