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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운 담임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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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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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는 여러 행사가 많다. 그중에 스승의 날도 있다. 나는 해마다 이때가 되면 더욱더 고마운 선생님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곤 자주 찾아뵙지 못해 못내 죄송함과 아쉬움에 젖어들곤 한다. 그러나 올해는 늘 뵙고 싶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이셨던 은사님을 찾아뵙게 되어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
 
63년 전인 1953년(7월 27일)은 치열했던 6.25 전쟁이 휴전을 결정한 때였다. 그때 열 살이었던 나는 군산시 산북동에 있는 문창초등학교 5학년 2반 학생이었다. 지금이야 좋아졌지만, 그때 내가 살던 마을은 군산 시내에서 12㎞나 떨어진 시골이었다. 그해 우리 반 담임은 고석균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아주 미남이고 의욕이 넘치는 멋진 분이셨다. 전쟁 중에 군에서 제대하고 첫 부임지로 우리 학교에 오셨던지라, 군인다운 패기와 기상이 우리를 압도했다.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맡아 우리를 매우 엄하게 공부시켰다. 같은 학년에 남자 두 반, 여자 한 반이 있었는데 늘 우리 반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다.

 
1464059535135.jpg▲ 1953년 문창초등학교 5학년 2반
 
 
 
그때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부족했었다. 교과서, 학용품, 책상, 걸상도 매우 부족해서 2인용 책상에 세 명이 앉기도 했다. 교과서도 선배들에게서 물려받은 사람은 갖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옆 사람과 같이 보아야 했다. 수업하다가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자주 운동장 나무 밑 방공호에 대피하곤 했다.
 
여름에는 퇴비로 쓸 풀이나 보릿대를 짊어지고 학교까지 먼 길을 걸어서 갔다. 때로는 자식이 힘들게 지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아버지께서 지게로 져다가 주고 가기도 하셨다.
 
일본인들이 고등학교로 사용하다 해방이 되어 물러간 자리에 생긴 우리 학교는 학교 실습지로 논과 밭이 매우 많았다. 우리는 4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하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때 창고에 가면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농기구가 많았고, 야구방망이, 검도 할 때 쓰는 장비도 눈에 띄곤 했다.
 
나는 5학년 담임선생님을 제대로 만난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 그래서 성적이 매우 향상된 학생에게 주는 ‘진보상’을 받게 되었다. 나는 이 일이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는 적정 나이에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보다 공부를 잘했던 영철, 태경, 창현 등 몇몇은 내 나이보다 두 살에서 많게는 네 살이나 위였던 것이다.
 
그때 우리 반은 남자만 45명이었다. 모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셨다. 5학년 때부터 국어교과서에 한자가 병기되어 선생님께서는 칠판 모퉁이에 매일 10개 정도의 한자를 써 놓으셨다. 이것을 쓰고 읽을 줄 알아야 집에 보내주셨다.
 
나는 쉬는 시간에도 책을 찾아서 열심히 한자를 익혔다. 이런 노력으로 한자에서는 내가 최고였다. 내가 한자를 잘하니까 어느 날 선생님께서 서당에 다녔냐고 하실 정도였다.
 
지금도 이것이 바탕이 되어 한자에서는 남다른 실력을 나타내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택에 나는 한자뿐만 아니라, 공부에 대한 필요성과 인내심을 배우게 되었다. 이때의 일들은 일평생 내 학습능력의 바탕이 되었고, 교육자의 길을 걷는 데에도 큰 힘이 되었다.

 
1464059496576.jpg▲ 1954년 문창초등학교 6학년 2반
 
 
 
선생님께서는 6학년 때에도 그대로 우리 반 담임을 맡으셨다. 이것은 내 학습과 학교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유급하거나 전학 간 몇 명을 제외하고 우리 반 40여 명은 2년간 정든 친구가 되었다.
 
선생님께서 여름에는 중학교 진학 희망자만 모아 늦게까지 공부시키고 교실에서 자도록 잠자리를 마련해주셨다. 겨울에는 선생님 집에다 20여 명을 모아놓고 밤늦게까지 공부시키셨다. 모두 선생님의 패기와 열정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선생님 집에서 공부할 때 아버지께서는 너무 어린 아들이 먼 밤길을 혼자 와야 했기에 늘 그곳까지 오셔서 기다리다 집으로 데려가곤 하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더욱더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해지고 감사한 마음에 눈에 맺힌 눈물이 가슴 속으로 흘러내린다.
 
이런 선생님의 도움으로 우리 반 친구들은 여러 명이 군산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고, 나도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모두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 덕택이었다.
 
그때의 가르침이 지금도 큰 힘이 되고 있으니, 그 은혜가 한없이 고맙다. 나도 교사가 된 후 1964년 인천 용유도에서 6학년을 가르치면서 이런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나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에서 근무하면서도 선생님을 잊을 수 없었다. 수원에서 교감으로 근무할 때, 선생님의 소식을 찾던 중 모교인 문창초등학교에서 경기도로 와 교감으로 근무하는 여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이 고석균 선생님께서 군산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이름을 개명하셨다는 것도 알려주셨다.
 
이런 계기로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반가웠다. 선생님께서는 그 후 1년이 지나서 정년으로 퇴임하셨다. 한 번은 선생님께서 서울 아들 집에 가시는 길에 수원에 들르셨다. 이때 선생님과 사모님께 음식을 대접한 일도 있었다.

 
1464059503269.jpg▲ 고석균 선생님(오른쪽)과 즐거운 시간
 
 
 
그 후 나는 고향에 가는 길에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사모님과 두 분이 마당에 사슴사육과 양봉을 하고 계셨다. 나도 2007년 정년퇴직을 하고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했다. 마침 올해 5월 2일 사범학교 동문회가 있어서 고향에 가는 길에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건강하신 선생님을 뵈오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선생님과 학창시절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다. 선생님께서는 그 후 다른 초등학교에서도 이런 열정과 경험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셔서 좋은 성과를 많이 거두셨다고 말씀하셨다.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해 주어서 주위에서 부러워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제자인 나도 선생님과 같은 열정을 본받아 44년의 교직 생활을 잘 마무리했고, 지금은 조그만 과수원을 하며, 한자와 관련된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여 강사활동과 한자 재능기부 봉사활동도 한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 내외분은 건강하시고, 88세임에도 100여 개 벌통으로 양봉하시며 정정하게 사신다. 올해 스승의 날은 그리워하던 선생님을 찾아뵈었던 일로 어느 해보다도 흐뭇했다. 선생님의 그 귀한 가르침은 아직도 내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는 올해 스승의 날을 보내며 선생님의 귀한 가르침을 되새기고 선생님께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취재위원 박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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