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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실존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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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6.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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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언젠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고민하면서 이 사회의 메커니즘과 체제에 저항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점점 더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존적인 허무만을 느끼고 있다.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대학의 개념이 수명을 다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기야 진리가 아닌 이상 모든 것에서 기준이며 가치, 개념은 사회적 실천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날의 대학 개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린다면 이 또한 타당하다고 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의실.jpg▲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도 놓아버리기 어려운 것 대학에서 학문적 기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학생들에게 돈벌이 수단을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이 범주 안에 직업을 찾아 사회로 진출하게 하는 교육도 들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물드는 원인이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도 ‘사유’를 가장 확실한 실존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사유’마저도 자본주의의 목적 실현에 시중드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생각하기는 하되, 기껏해야 자본주의에 예속된 노예적 범주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포의 관리, 공포의 정리정돈과 공포의 재활용 공장’”(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1쪽)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깊이 생각하는 인간은 쓸모가 없다. 죽을 때까지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몸과 영혼을 팔며 충성을 다하는 기계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도서관.jpg▲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실존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일까?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타자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일까? 지금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런 사유의 기회마저 배제해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자정능력을 잃은 하천처럼 심각하게 오염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든 직장이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으로 들어가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바라는 학생들에게 실존이니 존재니 하는 말들이 더 상처받게 할 것이고 고통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실존의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이 잘 굴러가도록 조처를 하고 관리 감독하는 그들도 똑같이 기계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그것이 생산해내는 제품은 늘 동일하다. 규격, 수치, 무게, 색깔 모든 것이 같아야 한다. 같지 않으면 불량품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동일성의 잣대로만 판단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의 실존, 인식, 존재, 본질, 삶, 사랑, 화해, 환대 등을 숫자로 저울질할 수 있을까?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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