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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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S 접속 장애로 겪었던 어려움과 깨달음
    [시니어투데이] 나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밤에는 1시간씩 동호인끼리 영어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전화를 이용하다가 얼마 전부터 화상회의 앱 ‘줌(Zoom)’을 통해서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전부터 줌(Zoom)에 연결이 안 되어 나만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접속 장애 없이 잘 사용했는데 웬일일까? 그런데 연결만 하려고 하면 내 휴대폰의 와이파이 신호가 사라지면서 연결이 안 되었다. 공유기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도,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 접속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서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각종 해결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주일 후에 휴대폰에 와이파이 신호 세기가 강하게 표시되기에 다시 연결해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알 수 없는 장애로 연결이 안 된다”는 메시지만 뜰뿐 접속이 안 됐다. 그날도 나는 허탕을 쳤다. 몇 시간을 씨름하여 교재를 다 번역해 놓고 공부 시간만 기다렸는데 접속이 안 되니 속이 많이 상했다.   이 방면에 능숙한 지인에게 요청해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아내의 휴대폰으로 하면 접속이 잘 되었다. 전화기 때문인 것 같아 A/S 센터에 가보았지만, 휴대폰의 문제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A/S 센터에서 공유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통신사에 고장 신고를 하여 온라인으로 점검을 해보아도 정상이라고 했다. AS기사가 방문을 해서 전파 측정기로 검사하더니 신호가 잘 잡히니 공유기는 정상이라고 했다.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Zoom 연결”, “와이파이 끊기는 문제”를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검색했다. 어디엔가 전화기의 와이파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휴대폰에서 “네트워크 설정 초기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 해서 초기화를 시키고 사뭇 긴장된 마음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연결이 되었다. 2주 동안 못 보았던 동호회 회원들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제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줌(Zoom)으로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휴대폰에 “데이터가 다 소진되어 이제부터는 요금이 부과된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데이터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추가 사용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요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그동안 줌(Zoom)을 연결하는데 와이파이가 아닌 휴대폰 데이터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방법은 공유기를 바꾸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새로 구입한 공유기에는 안테나가 네 개나 달려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공유기 밑면에 비밀번호가 있다고 쓰여있다고 했다. 그 번호를 입력했더니 와이파이 기호가 떴다. 이제 다시 접속을 시도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지금도 전에 사용하던 공유기에서는 아내 휴대폰은 되고, 내 것은 왜 안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디지털 기기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주 애를 먹이지만, 시니어들에게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그러더라도 지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다가 보면 끝내는 해결할 길이 나오는 것이다. 시니어들의 자산은 풍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축적된 지혜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들의 경쟁력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이 또한 시니어들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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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1-06-07
  • SNS 사용에서 주의할 점과 대응 지혜
    [시니어투데이] 며칠 전 새로 들어온 이메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도착하는 이메일은 그중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일단 삭제하고 남은 것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본다.   그중에 한 SNS에 ‘친구 요청’이 있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그 SNS에서 보내주는 이메일 가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요청이 많아 보통은 삭제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Jennifer라는 사람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외국인이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서 열어 보았다. 나의 SNS 계정에 들어와 내가 쓴 글들에 ‘좋아요’ 표시를 여러 번 해 놓았다.   계정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귀엽게 생긴 아가씨다. 군복을 입고 동료들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보였는데 아마 여군인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메시지가 와있어 열어보니 ‘제발 좀 친구로 추가해주세요’라고 한글로 쓰여 있었다. 친구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다시 요청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까짓것 별일이야 생기겠나 싶어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 SNS 계정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기는 시리아에 있는 미국 군인인데 반갑다고 인사를 보낸 것이었다. 나도 반갑다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메일을 열었는데 별도의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자기는 한국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7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라서 군인이 되어 지금 시리아에서 정보통신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시련을 겪어서 힘들었겠지만 씩씩한 군인이 되었다니 장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리아라면 한밤중 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 시쯤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2시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얘기하고 어서 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야간 근무 중이라 괜찮다고 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묻는다.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에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연결하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통화는 안 되었다. 잠시 후에 메시지가 왔다. 군사시설이라서 보안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고 하면서 ○○톡을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더니 ○○톡 아이디를 묻는 것이었다. ○○톡은 아이디가 없이 그냥 이름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아이디라니? 그래서 아이디는 없다고 하니 잠시 후에 자기 아이디를 알려주며 친구추가를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톡 연결이 되었다. ○○톡으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점차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SNS 프로필을 보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다. 자기는 자살폭탄 공격이 심한 이곳에서 군에서 퇴직하여 민간인으로 살고 싶다.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 사촌들과 조부모님도 찾아 정착하여 살고 싶다. 자기를 좀 도와 달라”는 요지의 부탁이었다. 나는 시골에 사는 노인이라서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갈수록 다음과 같은 놀라운 요지의 말을 늘어놓는다. 수색 중에 큰돈을 발견했다. 아마 저항군들의 군자금인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이것을 네 명이 나누기로 했는데 자기 몫은 5백만 달러쯤 된다. 달러가 가득 들어 있는 철제상자와 전투 현장의 사진들도 보냈다.   “한국 정착자금으로 사용할 이 돈 상자를 화물로 보낼 터이니 보관을 부탁한다. 자기는 물건이 도착한 2주 후에 한국에 입국하겠다. 액수의 30%를 수고비로 드리겠다. 주소를 알려 달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도 싫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노인이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제발 도와 달라. 당신이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매달린다.   나는 아침에 아내와 공원에서 조깅한 후 시장에 들려오기로 한 터라 더는 붙들고 있을 수도 없어 그냥 ○○톡을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린이날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내외가 왔을 때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며 ○○톡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이런 사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끔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낯선 메시지는 무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SNS에 프로필을 노출하다가 보니, 편리함도 있지만, 범죄에 악용될 소지도 없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과도한 사생활이나 개인정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SNS가 편리하고 관계를 통해 존재의 힘을 과시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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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과학도를 꿈꾸며 2021년 대학 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시니어투데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팬데믹(pandemic)으로 온 세상이 힘들었던 2020년이 저물어가던 즈음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대학에 지원한 외손자의 합격 소식이었다.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외손자가 희망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무척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외손자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과학을 좋아했고, 학교 대표로 출품한 각종 과학 관련 대회에서 자주 입상하여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아이였다. 명절 때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 과학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데 너무 수준이 높아 공대를 나온 나도 대답하는 데 쩔쩔매기가 일쑤였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는 아는 것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사양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큰일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외손자가 중학생 때였는데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서 주방 식탁 한쪽에 실험도구를 차려놓고 화학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외손자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얘가 입원해 있다는 화상 전문병원에 가보니 얼굴과 손이 온통 붕대로 감겨있어 눈앞이 캄캄했었다. 다행히 몇 달 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얘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종이로 만든 우주선을 건네고 갔다. 어느 날 책장에 올려놓은 그 종이 우주선을 보고 소망을 담아 적어 본 시다.   종이 우주선   책장 위에서 발사대기 중인 U-3069호 종이 우주선 언제 창공으로 솟아오를까?   우주과학자가 되겠다는 꽃 같은 우리 외손자 놀러 와 만든 꿈을 기도 속에 키워주었다.   주방 한쪽 너의 작은 실험실에서 들린 폭발음은 먼 훗날 네 종이 우주선이 날아오를 전주곡이었을까.   온통 붕대밖에 보이지 않던 그날 병실에서는 가슴이 내려앉았었는데   이제는 그 꿈 펼칠 나날 그리며 쉼 없이 달려가는 네 모습이 할아버지 마음에서 행복하게 솟아오르고 있구나.   나는 과학도로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될 출발을 앞둔 외손자와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많은 젊은이에게 축복과 함께 기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과학자는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까.   과학 연구에 대한 과학자의 태도는 인류의 삶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통기관의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의 활동 범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질병과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로운 힘이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 로봇 등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활짝 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인류에 대해 남다르게 따뜻한 감성을 지녀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뛰어난 공감력 및 소통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이고 이루어갈 미래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부모와 두뇌 및 신체적 조건 그리고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한 개인은 자신과 인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수한 자질을 지닌 것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그 개인의 영광임과 동시에 인류의 공적 자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삶은 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의 수많은 선행연구자의 연구 성과와 그를 가르쳐준 많은 스승 그리고 국가적 지원 등 주변의 다양한 도움도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과학자들은 남다른 시대적 사명을 지녀야 하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고 그에 따른 사명감과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남다른 자질을 지닌 사람은 그만큼 영광도 크기에 그에 따른 사명감을 보람으로 여기는 넓은 마음과 안목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수한 자질을 바탕으로 뜨거운 열정과 큰 노력으로 이루어낸 대학 입시 결과로 과학도로 출발할 시점을 앞둔 모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자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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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1-01-11
  • 차량용 빗물받이 교체, 직접 해결하다
    [시니어투데이] 언제부터인가 내 차의 조수석 뒤쪽 좌석 창문 위에 달려있던 빗물받이가 한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했지만, 중요한 부품도 아니어서 그대로 타고 다닌 지가 1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좁은 길을 지나는데 물건을 내리려고 주차하고 있던 화물차 기사가 갑자기 뒷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내 차의 조수석 백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놀라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려서 보니 앞바퀴 윗부분과 그쪽 문에도 흠집이 생겨있었다. 물론, 화물차 기사가 100%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하여 그쪽 보험사의 부담으로 수리를 다 마쳤다.   수리를 마치고 며칠 후에 보니 조수석 창문에 부착되어있던 빗물받이도 일부가 깨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고로 깨진 것이 확실하지만, 뒤늦게 청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알고 나니 눈에 거슬려 과감하게 새것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집 부근의 카센터에 가서 교환을 부탁했더니 일을 맡지 않으려 했다. 차량용 부품점에 가면 부품을 살 수 있으니 거기에서 사서 붙이라는 것이었다. 수리비를 많이 받을 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센터에서 알려준 곳으로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차량용 부품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차량용 빗물받이를 검색하니 차종별로 많은 제품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서 내 차에 알맞은 빗물받이를 선택하여 주문했더니 며칠 후 물품이 도착했다.   택배로 도착한 빗물받이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파손된 것을 떼어내기만 하면 나도 쉽게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단단히 붙어있어 조각이 떨어져 나가도 일부는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수리를 의뢰하러 카센터로 갈까 하다가 좀 더 해 보기로 하고,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글로브 박스(glove box)에 넣어두었던 드라이버를 몇 년 만에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기온도 낮았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힘을 내서 드라이버를 틈새로 끼워 넣는 등 한참 동안을 씨름해서 겨우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새로 산 빗물받이에는 양면 접착테이프가 붙어있었고, 그 표면에서 보호용으로 부착된 종이를 떼어낸 다음 적당한 위치에 단단히 붙였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그동안 깨어진 빗물받이를 달고 다녔던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은 차량용 이외에도 소비자가 손쉽게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용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불편함을 처리하고 발전적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시니어들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체력과 역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시니어들에게는 일평생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지 않은가.   장비를 쓰는 것이나 조작과 사용이 편리하게 만들어진 용품들이라면 이를 하는 데에서는 힘보다는 지혜가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의 강점이고 더욱더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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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0-11-30
  • 컴퓨터 없는 생활에서 느낀 소회
    [시니어투데이] 내가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가 자주 말썽을 부린지가 여러 달 되었다. 아들이 쓰던 것을 가져와 오래 써왔다. 그동안 바이러스 때문에 포맷도 여러 번 했다. 얼마 전부터는 커서가 꼼짝하지 않기도 하고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정상적으로 컴퓨터를 끄지도 켜지도 못해 강제로 전원을 꺼야 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본체를 떼어서 여러 차례 컴퓨터 수리점에 맡겨야 했다. 컴퓨터 기사를 집에 불러 수리를 맡길 수도 있지만, 출장비를 주어야 하고 또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어서 내가 가지고 가서 수리하는 게 편했다. 처음에는 수리해 온 컴퓨터에 다시 케이블을 연결할 때는 전원 케이블, 인터넷 선, 그리고 모니터, 키보드, 프린터, 스피커 등 많은 선 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도 여러 번 했더니 이력이 생겨 눈감고도 할 수가 있을 정도로 숙달이 되었다.   그러다가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또 갑자기 커서가 꼼짝을 않는다. 강제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더니 한참 쓴 글이 다 날아가 버렸다. 다시 작업하다가 한 5분쯤 후에는 또 그런 현상이 반복되더니 결국은 켜지지도 않았다. 또 수리점에 가려고 케이블들을 떼어내는 것을 보던 아내는 이참에 아주 새것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 했다. 머리가 허연 사람이 컴퓨터를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더는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젠 나도 툭하면 멈춰버리는 컴퓨터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것을 사기로 했다. 이렇다 보니 컴퓨터를 사려고 인터넷 쇼핑몰에도 들어갈 수 없어서 아들에게 연락했다. 아들은 얼마 후 컴퓨터를 주문했다고 연락을 했다. 마침 추석 때문에 택배가 많아서 연휴가 끝나야 배송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컴퓨터가 없으니 컴퓨터와 함께 시간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매주 영어 공부를 하고 있기에 회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컴퓨터를 좀 사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곤란하다고 한다. 읍사무소에 물어도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는 없다고 한다. 도서관에 연락해보니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은 있지만, 코로나19로 도서관 전체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성당 교우에게 컴퓨터 좀 쓰자고 전화로 부탁하고 방문을 했다. 메일을 열어보니 며칠 동안 벌써 100여 통이 들어와 있었다. 우선 회원들에게 자료를 발송해주고 나서 문서를 열어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해당 문서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리 끝에 복지관에라도 가서 이메일도 보내고 내가 맡은 한 페이지라도 번역작업을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면이 있는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했더니 복지관에 와서 컴퓨터를 사용하라고 허락을 해주었다.   차로 30분을 달려 복지관에 갔더니 예전에는 그렇게 비좁던 주차장이 대부분 비어있어 적막감마저 들었다. 강의를 듣던 인문학반 컴퓨터에서 회원들에게 메일을 발송하고 나서 내가 공부할 자료를 열었는데 문제는 프린터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가지고 간 USB에 문서를 저장한 후 사회복지사에게 인쇄를 부탁했다. 급한 대로 내가 발표할 두 페이지를 번역하여 프린트하고 나니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렇게 일 처리를 하고 보니 컴퓨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마침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를 중계하고 있어서 결승이 끝날 때까지 열흘간은 TV를 보느라 거의 온종일 컴퓨터 없이도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여러 시간 TV를 혼자서 차지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던 아내가 가수 김호중의 열성 팬이 되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데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주문했던 컴퓨터가 도착해서 아들이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있다며 전화를 했다. 다음날 내 서재에는 새 컴퓨터가 놓였다. 이제 컴퓨터에서 문제가 발생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도 상쾌해졌다. 우선 쌓여있는 200여 통의 이메일을 정리하고 난 후 다시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이제 컴퓨터는 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메일 주고받기, 인터넷 쇼핑몰 이용, 인터넷 뱅킹, 인터넷 서핑 등 컴퓨터의 용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이처럼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만큼 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시니어들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지식을 갖춤으로써 더욱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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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소중한 만남으로
       나는 2년 전 초겨울 사랑하는 동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그 아픔과 허망함은 말로는 다할 수 없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윈 우리 형제는 한 몸처럼 의지하며 서로에게 기쁨이요, 등불로 살았다.   그랬기에 그 충격은 내 살점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아프게 나를 괴롭혔다. 갑자기 떠났기에 애틋한 말도 못 나눈 것이 더욱더 나를 슬프고 외롭게 만들었다. 목 놓아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동생은 꿈속에서나 나를 위로할 뿐 끝내 내 앞에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이런 생각에 빠져 지내다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동생 몫까지 잘 살자. 그것이 가슴으로나마 동생과 함께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두 배로 살자는 마음이 드니, 뭔가 조금 바쁘게 지내야 했다. 이런 생각으로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에 나오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접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유난히 어느 한 분이 내 눈에 들어 왔다. 자연 그대로의 하얀 머리카락과 더불어 드러나는 그분의 모습은 반듯하고 당당했으며 카리스마가 넘쳤다. 나이는 드셨지만, 자신을 참 잘 관리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 조금 둥글지 못한 성격 때문에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쌀쌀맞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날은 왠지 먼저 그분께 다가가 말을 건넸다.   “여기 처음 오신 거예요.” 그러자 그분이 그렇다고 반갑게 대답하며,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저도 잘 모르지만, 인문학, 라인댄스를 중심으로 몇 개 골라 보려고요.”   이렇게 그분과 인연이 되어 인문학, 라인댄스, 탁구까지 함께 하게 되었다. 나이로는 나보다 언니이지만, 친구처럼 의지하며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분은 인문학 강의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감동을 하곤 한다.   교수님의 지론에 따르면 우리의 인생은 ‘영원한 현재’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어차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시니어는 인생의 저녁노을이 아니다. 진정으로 화사한 꽃을 피우기 위해 정오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인문학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의 주장이다. 이렇다 보니, 나 역시 감동의 물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시간은 나에게 생명의 시간이다. 온 누리에 쏟아지는 햇빛이 내려주는 찬란한 생명력처럼 인문학 강의는 나에게 온갖 치유와 회복을 공급한다. 가슴이 벅차올라 피부까지도 생기로 가득해진다.   때로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산들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처럼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 준다. 그분도 이런 나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행복해하는구나.   그분이 쓴 글을 발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나는 너무도 놀랍고 슬퍼서 그분이 글을 읽어 가는 내내 울며 절며 마음으로 동행했다.   우리 시절에는 누구나 어려웠다고는 하지만, 그분의 삶은 절박함을 넘어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저런 강하고 반듯함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분의 내면에는 외로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내 작은 마음이나마 그 자리에 포근하고 고요히 스며들어 온기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분의 모습에서는 어떤 흐트러짐도 흔들림도 없다. 들판에 홀로 핀 백합처럼 다정한 미소와 함께 묵묵히 그윽한 향기를 발하며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나는 이런 그분을 보고 배우며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어쩌다 그분이 안 보이는 날이면 전화를 건다. 내 전화에 행복해 하시는 것이 목소리에서도 묻어난다. 그러면 내 마음도 그 행복에 전염된다. 사정이 생겨서 못 갔다는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면 아쉬웠던 마음이 봄눈 녹듯 금세 사라져 버린다.   요즘 나는 그분을 통해 제한 없이 행복을 공급받고 있다. 그분은 말로만이 아니라, 미소로, 표정으로 호흡처럼 끊임없이 행복을 발산한다. 행복은 향수 같다. 내게 뿌려야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내가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의 앞부분이다.   교수님은 늘 이렇게 외친다. 내가 변하면, 다 변한다. 내가 행복하면 다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 인문학반 사람들은 교수님의 외침대로 모두가 ‘영원한 현재’를 산다. 그렇기에 절대로 절망의 그림자는 접근할 수 없다.   나이는 숫자로 기록된 지혜와 경험의 척도일 뿐이다. 나이로 세상에서의 남은 날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한적인 시야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치명적 오류다. 인문학반 모두는 유한적 압박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며 찬란한 정오를 발하는 사람들이다.   동생을 보낸 아픔을 딛고, 동생의 몫까지 환하게 꽃피운 나의 소중한 만남을 하늘나라에서 동생도 기뻐할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행복 열차에 몸을 실은 우리는 이제 드넓은 희망의 들판을 향해 달리며 길고 경쾌한 설렘의 기적을 울려본다. “아! 내 인생에 소중한 만남으로 위로를 베푸신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취재위원 강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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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6-03-22
  • 우정면 화수리 3.1 독립운동기념비 제막 역사
       해마다 3월 1일을 맞이하면 3.1절 기념행사를 한다. 올해도 97번째 기념행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채롭게 거행되었다. 나에게도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있어 펜을 들었다. 나는 1983년 3월 오산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해 88서울올림픽을 대비해서 도내 모든 학교에서 각 마을 단위로 ‘학도애향대’를 조직하라는 경기도교육청(교육감 황철수)의 지시가 내려왔다.   우리는 ‘학도애향대’를 중심으로 마을을 다듬고, 가꾸고, 청결히 하는 운동을 하기로 했다. 우리 학교는 이에 관한 계획서를 제출하여 우수학교로 선정되었고 1984년 3월부터 시범학교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나는 애향의식을 고취하려면 고장의 역사, 문화, 유물. 유적 자료, 호국 사료 등을 파악하여 학습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화성군청에서 화성군에 관련된 자료를 발췌하여 책을 만들기로 했다. 여러 자료를 정리하면서 우리 고장의 호국 사료 가운데 우정면 화수리 3.1 독립운동 사건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로 화성교육청은 1985년 11월 <화성향토애향지>라는 123쪽의 책자를 발간했다. 그리고 이 책을 화성군내 모든 초·중·고등학교와 약 680여 마을 ‘학도애향대’에 배부하였다. 나는 1986년 3월 오산 성호초등학교로 전근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학도애향대’ 시범활동을 경기도 전역에 보급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1988년 9월 1일 온 나라가 서울올림픽의 열기로 들떠있을 때, 나는 교감으로 승진되어 우정면 화수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화수리 3.1 독립운동 역사를 정리할 때 알게 된 바로 그곳이었다. 동네 분들에게 화수주재소가 있었던 곳을 알아보니, 학교 교문 진입로 오른쪽 실습지가 화수주재소 자리였다.   학교 부근에 사는 송영은 어르신께 화수리 3.1 독립운동 사건을 문의하고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내 나름의 설명을 하니, 여기 사는 주민보다 더 잘 안다며 칭찬을 하셨다.   1989년 1월 학교는 방학 중이었다. 어느 눈 오는 날 송영은 어르신께서 두 사람을 데리고 학교로 나오셨다. 말씀인즉, 어느 일본 TV 방송국에서 화수리 주재소사건 즉, 1919년 4월 3일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일본 순사부장을 타살한 사건을 취재하러 왔기에 같이 왔다는 것이다. 어르신께서는 이 사건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설명해 주라고 하시며 가버리셨다.   나는 일본 기자에게 현장 설명을 해 주면서 마음이 아팠다. 일본은 이렇게 한국까지 와서 70년 전 일을 취재해 방송까지 하는데, 우리는 그 귀중한 역사적 장소를 학교실습지로 쓰고 있으니 무척 아쉬운 생각에 마음이 상했다.   내가 모시고 있던 김순중 교장 선생님은 그해 8월 말 정년퇴임을 하실 분이었다. 나는 이를 명분 삼아 정년퇴임기념으로 독립기념비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세울 장소, 비용, 지원받을 곳, 자문을 받을 사람 등을 생각했다. 이 고장 출신 향토사학자이며 수원에 사는 이종학 선생님께 자문 받기로 하고 연락을 드렸다.   1989년 4월 5일 식목일을 택해 이종학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더니 우정면 주곡리 선영에 가셨다고 한다. 그곳을 찾아가서 이런 계획을 말씀드렸다. 이 고장 사람도 추진하다가 못한 일을 다른 지역 사람이 하려고 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조암에 살면서 3.1 독립운동자료를 정리하여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라는 책을 발간하는 등 이 고장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다가 부산 동천고등학교 교사로 간 김선진 선생님에게도 연락하여 세 사람이 의논하기로 하였다. 4월 10일 세 사람이 조암에서 만났다. 여기에서 나는 이 계획을 설명하였다.     그 자리에서 김선진 선생님은 집에 보관 중이던 자신의 저서 130여 권을 나에게 주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기념비 세울 장소는 옛날 화수주재소자리로 정했다. 규모는 가로, 세로 각 4.5m, 비용은 약 450만 원, 지원기관은 학교체육진흥회, 어머니회, 학부모들의 찬조를 생각했다.   4월 말경 교장 선생님께서 김현구 우정면장을 만나 자랑삼아 박창규 교감이 자신의 교장퇴직을 기념해 독립기념비 건립을 추진한다고 했다. 이것을 들은 면장님이 이 행사는 면에서 해야 했을 일이라며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기로 했다.   면장님은 우정면 이장단 회의를 개최했다. 43개리 이장 가운데 국화도를 제외한 42개리 이장들이 각자 6만 원씩 찬조하기로 하였다. 점점 더 일이 커지고 있었다. 이종학 선생님이 100만 원, 기타 여러분의 기부금이 접수되기 시작하니 규모를 작게 만들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우정면에서 3.1 독립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면장이 위원장이 되고 총무를 선임하여 비용을 관리하고 집행하게 되었다. 나는 기념비건립 비용을 더 들이기로 하고 규모를 가로, 세로 각 12m로 늘리기로 계획을 바꿨다. 옛날 화수주재소 자리에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기초 터파기와 콘크리트 작업은 학교에 근무하는 기사들이 맡아 해 주었다. 굴착기로 배수로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도로 건너편 논 소유주가 우기에 자기 논에 토사가 들어 올 것이라며 화성교육청에 민원을 넣었다. 교육청 담당자가 현장에 나와서 독립기념비 건립 공사를 하는 중 이라고 설명을 하니 공사를 중지하라고 했다. 이유인즉, 학교 토지에 독립기념비를 세운 후 나중에 문화재로 지정되면 문화재 담당 부서에 이 토지가 수용될 수도 있다며 계속하여 중지를 요구했다.   이 내용을 면장님께 말씀드리니 이장단들이 교육청에 가 항의해서 관철시키겠다고 했다. 이쯤 되니 나도 일을 시작해 놓고 처지가 난처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해야 할 일이었다. 처음부터 학교에서 교육청 허가를 받아 일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의 독립기념비건립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장단들의 항의로 교육청에서도 관여 안하기로 하고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나는 이종학 선생님과 자주 만나서 상의하며 자문을 받았다. 선생님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시대 역사에 대해 아주 해박했다. 많은 관련 자료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독립기념비 비문 내용은 이종학 선생님이 지었다. 비문 글씨는 이종학 선생님의 친구이며 우정면 출신이신 한동인 서울 매원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쓰셨다. 비석과 기타 석재는 수원 고려석재의 사장님이 어렵지 않게 지원해 주셨다.     드디어 3.1 독립운동 70주년 해인 198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여러 기관장과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화수초등학교 교정에서 독립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이 고장 선열들의 얼을 후손들이 배워 익힐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한 독립기념비 사업이 우정면 면민들의 협조로 확대되면서 이 지역의 큰 행사가 되었다. 그때로부터 27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화수리가 제2의 고향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그때의 열정을 잃지 않으려 감사패와 독립기념비 기초공사 공정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찍은 사진 70매와 관련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이 독립기념비를 찾아가 보면 비석 옆면 추진위원 명단에 나와 우정면 이장단 4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때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일은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독립기념비를 구상하고 설계했던 일, 수원까지 나가서 철물점에서 물건을 사 나르던 일, 고려석재 사장님에게 형편을 설명하면서 사정하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고 큰 보람도 느껴진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내 제안을 쾌히 받아주셨고 이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셨던 이종학 선생님, 김선진 선생님이 눈에 선하다. 또 어디에선가 복된 삶을 살고 계실 김현구 면장님의 건투를 빈다.   ※사운(史芸) 이종학(李鍾學) 선생(1927년~2002년) 화성 우정면 주곡리 출생, 향토서지학자,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독립기념관 자료수집위원, 경기도사 편찬위원 겸 감수위원, 사운(史芸) 연구소장,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자료기증(512점)과 초대 박물관장(1998-2001), 독도박물관 옆에 안장,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초대소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원박물관에 자료기증(2만여 점)   취재위원 박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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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6-03-16
  • 80세의 행복한 고민
    걱정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요즘 고민이 생겼다. 고민을 넘어 걱정으로 변한 게 문제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내 인생의 가치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던 터라서 이 걱정은 매우 뜻밖이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배움으로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고 있다. 타고난 재주는 없지만, 수영, 미술, 성악, 피아노, 키보드 등 해보고 싶었던 것을 용감하게 배우고 있다.   걱정거리라는 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행복한 고민이다. 인문학을 배우면서 글쓰기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내 걱정거리다.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어서 더욱더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소학교를 1년쯤 다니고 해방을 맞았다. 이북에서 태어난 나는 공산치하에서 인민학교에 다니다가 6·25동란으로 월남하여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6·25동란은 민족의 비극이기도 했고, 나에게도 엄청난 혼란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B29 전투기에서 투하한 폭탄이 우리 집을 덮친 적도 있다. 인민군, 중공군, 빨치산, 국군, 미군, 전투경찰 등의 교전을 피해가며 살아오느라, 제대로 된 공부는 엄두도 못 냈다.   도저히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고 끔찍했던 그 시절도 어느새 지나고 지금은 그때로써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으나, 그렇다고 크게 부족한 것도 없다. 그런 나에게 요즘 강한 부대의 공격이 밀려오고 있다.   고도로 훈련된 인문학부대가 내게도 글쓰기전투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강의를 맡은 사령관은 전략과 전술에 능하고 덕도 갖추어서 글쓰기전투를 피하기 어려워졌다. 이왕 나도 인문학부대원이 되었으니, 펜이라는 총을 들고 글쓰기전투에 나서기로 했다.   사령관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특기도 훈련시켜준다. 이렇다 보니 우리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하다. 내가 인문학부대에 입대한 것은 어느 80대 여사님의 2~3분의 소개 때문이었다. 이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강의를 듣게 된 첫 시간부터 흥분과 설렘이 휘몰아쳤다. 가슴에 확하고 불덩이가 붙더니 심장이 뛰고 마음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다른 학교의 유명한 교수가 하는 명강의를 들으러 다닌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의 셰익스피어라는 양주동 박사의 강의를 들었던 적도 있다. 양주동 박사의 강의를 듣고 무교동 낙지 골목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양주동 박사의 강의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정도의 명강의였다. 그런데 첫 강의에서 양주동 박사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도 모르게 공책에다 양주동 박사를 몇 번이고 썼다가 지웠다가 하며 강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해박하지만 쉽고 담백하게 쏟아내는 지식의 향연이 나를 매료했고, 유머와 위트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교수님의 열정은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고, 곁들인 노랫가락은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나도 지난날 학생들을 가르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었는데, 그런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교수님의 강의는 늘 새로움과 도전 속에 80세의 가슴을 뛰게 했고, 청춘으로 돌아가게 했다. 나는 80세라는 나이 탓에 여기저기에서 잘 조는 편이다. 그러나 몇 달째 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지만, 졸기는커녕 고개가 점점 더 앞으로 빠져나가고 가슴은 쿵쾅거리며 눈망울은 초롱초롱해진다. 이상한 현상이다.     시간을 쪼개 오셔야 하는 교수님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몇 년이고 계속해 이 강의를 듣고 싶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글쓰기를 독려할라치면 슬그머니 고개가 숙어진다. 더더욱 부담스러웠던 것은 동료들의 글솜씨는 등단 작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기가 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 때문에 하차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공격 앞으로’라는 각오로 펜을 집어 들었다. 건너갈 다리를 불살랐기에 후퇴는 없다. 인문학부대의 병사답게 용감하게 진격할 뿐이다.   갑자기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눈 녹은 삼팔선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세월을 한탄하랴. 삼팔선의 봄” 왜 이 노래가 흘러나왔을까?   그리움이었다. 인문학은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교수님은 우리 각자가 바로 인문학의 교재이며 주인공이라고 한다. 내 인생이 멋진 인문학으로서, 그리고 중후한 도서관으로서 인정을 받고 있으니, 이만하면 나도 충분하게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이 아닌가! 취재위원 윤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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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6-03-15
  • 그때가 그립다
    올해로 내 나이가 팔십 셋이다. 나는 서울에서 살 곳을 찾던 중에 강북구 삼양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삼양동(三陽洞)은 1949년까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이었다. 이곳이 서울시에 편입될 때 주민대표들이 의논 끝에 ‘삼각산 자락의 양지바른 동네’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주거지를 찾지 못한 저소득층이 많이 몰려들었다. 산기슭에 허름한 주택이 다닥다닥 밀집된 이곳은 그야말로 ‘달동네’였다. 산 아래 동네 보다 달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서 ‘달동네’라고 하니, 낭만적인 이름과 그 실상은 매우 역설적인 셈이었다.     이런 만큼 사연도 많아 삼양동은 <어둠의 자식들/ 황석영>, <꼬방동네 사람들/ 이동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등의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곳이다.   “집에서는 왕자처럼 살고/ 나와서는 잡초로 행세하는 자들이 싫어서/ 일 년 내내 동네 밖을 안 나가는/ 딸기코 대서방 서사는 내 바둑동무다 남 앞에서는 옳은 소리만 하고/ 전문지식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면서/ 자기 자식들은 몰래/ 외국으로 빼돌려 공부시키는 자들이 미워/ 신문도 방송도 안 본다는/ 허리 굽은 양복점 주인은 내 술동무다” 이 시구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 <길>(1990)에 수록된 <산동네-삼양동에서>의 일부분이다.   그 당시 이 동네에서 술 먹고 싸우고 행패 부리는 일이며 장사꾼들의 실랑이나 악다구니를 보고 듣는 것은 다반사였다. 좁고 지저분한 시장 골목을 지나야 했고, 겨울에는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어찌 보면 가장 열악하고 살지 못할 동네가 삼양동이었다.     1957년 나는 이곳에서 산을 깎아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과 이웃이 되어 살며 그래도 마음만은 따뜻하게 지냈다. 이따금 아침 일찍 잘 차려입은 멋쟁이 아가씨가 출근하는 모습도 보이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이른 아침부터 공장에서 가져온 일감들을 펼쳐놓고 밤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런 일감도 못 얻어 굶주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삼양동 산기슭 비탈진 골목과는 달리 산 아래는 평지였고 대중교통으로 버스도 다녔다. 그러나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형편은 교통수단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의정부에서 상계동으로 갈 때는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다녀야 했다. 어려움이 어둠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동네를 살리려고 통장들은 분주하게 쏘다녀야 했다. 동사무소에서 밀가루를 받아다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했다. 가족도 찾기 어려운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화장을 해서 유골은 산속 여기저기에 흩뿌렸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그 딱한 사정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게 했다. 어떤 아주머니가 아기를 낳고도 밥을 굶고 있었다. 남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시골의 시부모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산모와 아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무작정 파출소 소장을 찾아갔다. 그 아주머니의 딱한 사정을 설명했더니, 나와 함께 쌀집, 건어물집을 다니며 먹을 것을 마련해주었다. 참 고마운 경찰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려운 가정이 너무나 많아서 밀가루를 손에 들고 다니며 배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는 아예 동사무소 창고의 밀가루를 삼륜 차에다 싣고 확성기로 소리치며 배급에 나섰다. 이런 우리를 동장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각 통장이 이해를 구해 지속하게 되었다.   삼양동도 이제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나도 지금은 삼양동을 떠나 화성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 시절 동고동락하던 이웃들,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삼양동의 겉모습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 시절의 추억과 역사는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때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취재위원 김기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3-07
  • 이발의 추억
      조카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일찍 동네에 있는 이발소에 갔다. 동생 아들이 결혼식을 하는 날이기에 큰아버지로서 단정한 모습으로 식장에 가기 위해서다.   내 딸, 아들은 모두 결혼했으니, 조카의 결혼식이 무척 반갑기 그지없다. 설 명절에도 이날을 위하여 이발을 미루었다. 이발소에 당도하니, 70세가 넘은 듯 보이는 이발사가 청소하고 있었다.   방금 문을 열었나 보다. 얼마 전부터 단골로 다니고 있기에 이발사도 나를 안다. ”오늘 잔칫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왔어요.“ 잘 알겠다며 내게 흰 가운을 둘러주더니 세심하게 머리카락을 잘라 나간다. 가위질 소리에 선잠이 든 가운데 아련하게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동네에는 이발소가 없었다. 그만큼 시골이었다. 동네에는 6·25 동란 후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수용소’라는 곳이 있었다. 여기에 이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이발을 하러 가면 작은 원형 의자에 앉혀 놓고 바리캉으로 머리털을 밀어 댔다. 바리캉은 이 기계를 만든 프랑스회사가 ‘바리캉 마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잘 들지도 않는 바리캉이 머리 위에서 움직여나가면 머리카락을 뜯어내는 것처럼 너무 많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이발사는 그러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 머리 언제 감았어? 머리에 쇠똥 따지 켜켜이 붙어 있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발할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곤 했기에 이발하러 갈 때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머리를 감곤 했었다. 그래도 그 소리는 항상 나왔다. 이발 요금은 얼마였는지, 무상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쇠똥은 머리를 감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에 있는 이발소에는 늘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곤 했었다. 여기에 들어서면 머리 모양은 ‘상고머리’와 ‘빡빡머리’ 두 가지 중에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항상 ‘빡빡머리’를 깎았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우리 동네에도 이발소가 생겼다. 이발소의 이름은 “가보게 이발관”이었다. 상호를 왜 그렇게 하였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 당시에 시골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모일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이발관이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았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어엿한 직장인인데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달에 얼마씩 돈을 주고 매일 출근길에 ‘가보게 이발관’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다녔다.   매일 아침 나는 이 이발소에 들러 고대기로 머리를 납작 누르고 기름도 발랐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무슨 공작새 같기도 하고 매우 이상해 보인다.   예비군 훈련을 가면 복장 검사와 용모에 대해 점검을 하였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정없이 머리털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70년대 말 수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경기도청이 소재한 큰 도시라서 이발소도 많았다. 이발소도 등급이 있었다. 머리만 잘라 주는 곳, 면도까지 해 주는 곳, 안마에다 손톱까지 잘라주는 곳도 있었다. 그때에는 이발비가 비싸지 않았다. 겉멋이 좀 들었을 때는 안마까지 해주는 곳에서 이발한 적도 있다.   세월이 좀 지나자 퇴폐 이발소가 등장했다. 우리 동네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꼭 불법, 부정, 퇴폐 같은 것들은 독버섯처럼 정상의 틈새에 끼어 피해의 온상이 된다.   요즘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발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겨우 두 군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남자들도 대부분 미용실을 찾기 때문이다. 나도 두서너 번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아봤지만, 면도까지 해야 이발한 기분이 나는 나로서는 미용실과 더는 인연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발소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 대부분 노인이다. 아직은 노인들 틈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정서인데 방법이 없다.   이날 나는 이발과 함께 깨끗이 면도까지 했다. 거울을 보니 더부룩하던 얼굴이 깔끔하고 산뜻해 보였다. 이 정도면 조카 예식장에 가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다.   문득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발했을까 생각을 해보니, 1년에 10번만 잡아도 천여 번을 향해 가고 있다.   조카 결혼식에 가려고 좀 신경을 써서 이발하다가 보니, 머리 모양에 내 삶의 여정을 비춰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지만, 그 시절의 추억이 어린 이발소가 눈에 어른거리며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취재위원 이태호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3-02
  • 노후와 귀농, 귀촌
      관련기사들어가기 클릭   노후준비는 인생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취업이나 결혼에 비하면 노후준비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라도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다. 그때그때 준비하는 만큼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았던 곳으로 머리를 둔다고 한다. 이에 빗대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한다. 노후준비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귀농이나 귀촌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무턱대고 준비 없이 귀농이나 귀촌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첫째는 경제적인 문제가 없어야 한다. 매월 들어야 하는 생활비며 용돈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주거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전기, 수도, 냉난방도 포함된다. 주거에 과도한 비용이 들어서는 곤란하다.   셋째는 원주민들과의 융화다. 이웃으로 사는 사람들과 이질적인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급속하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넷째는 농어촌이나 시골을 좋아해야 한다. 모든 일의 성공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더욱더 가까워진다. 아울러 교통과 자연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듯이 기왕이면 교통도 좋고 아름다운 자연과도 벗할 수 있는 곳이라면 최상이다.       이런 요건을 전제로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장소를 물색해야 한다. 해당 지자체나 관련 단체에서 실시하는 귀농, 귀촌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필요한 지원과 관련 정보를 챙겨야 한다.   성공적이고 차별화된 귀농, 귀촌하려면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적극적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20
  • 엉뚱한 카드 사용명세표가 가져다준 교훈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의 통신함에 들어 있는 편지봉투 몇 개 들고 올라왔다. 먼저 카드회사에서 온 카드사용 명세표가 들어 있는 봉투를 뜯어 읽어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달 사용 청구액이 87만 원이나 되었다. “한 달에 많아야 30~40만 원이 보통이었는데 87만 원이라니?” 지난달 그렇게 많이 사용한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명세표를 받으면 으레 합계금액만 대충 훑어보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다. 명세표에서 우선 큰 금액부터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남양주 오남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35만 원, 수원의 백화점에서 15만7천 원 사용, 할부금이 4만8천 원, 100만 원짜리 제품 12개월 할부 구매에 대한 6개월째 할부금이 8만3천 원 등이었다.   쇼핑몰에 갔던 적은 있는데 아내가 옷을 산 기억은 없다.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작년에 우리가 100만 원짜리 전자제품 산 것이 있었나?” 아내가 펄쩍 뛴다.   “그런 게 전혀 없는데, 아니 사지도 않은 청구금액이 6개월이나 은행에서 빠져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어요?” 대꾸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카드정보가 유출된다는데 내 정보도 유출되어 복제카드가 만들어진 것일까? 순간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스쳐 갔다.       일단 은행계좌에서 내 돈이 빠져나가면 일이 더욱 복잡해지겠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카드회사에 빨리 연락하여 인출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허겁지겁 카드회사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데 집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여보, 이 우편물 주소가 403호로 되어 있잖아요?” “뭐라고요?”   아뿔싸, 봉투를 보니 수신인이 403호 허 아무개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체국 직원이 이웃집 청구서를 우리 집 우편함에 잘못 넣어 놓은 것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렀지만, 이 나이에 다시 한 번 얻은 교훈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심정으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좀 놀라고 당황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사고가 아니었으니, 없었던 행복을 하나 얻은 것 같아 그날 이후 더욱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취재위원 김상태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19
  •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
      기다리던 목요일 인문학 시간이 되었다. 강의안을 받아 드는 순간 마음을 스치는 아름다운 향기가 얼굴에서 미소로 피어올랐다.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는 문구가 온몸을 전율케 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열심히 살았으나 보상은커녕 억울함을 달랠 길 없어 허탈해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어떤 때는 남의 일같이 않아 동병상련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나의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아득하고 어떻게 그 험한 날들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무도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마다 나의 삶은 왜 이렇게 어려워야 하는지를 수도 없이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계셨고 8개월이 못되어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가계는 급속히 기울었다.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오빠 등에 업혀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어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를 제대로 한 번 불러보지도 못했다.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갈 때면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마당에 나가 아버지를 부르며 하늘을 향해 목 놓아 울곤 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서른한 살에 과부가 되어 남매를 기르며 사시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철이 들어서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시절 나에게 소리치고 야단치는 어머니를 보면 너무도 서럽고 야속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계모인 줄 알았다.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두웠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었다. 학창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조회 때나 체육 시간에도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두웠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내가 20대였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오래지 않아 올케도 돌아가시더니 오빠도 세상을 떠났다. 처녀인 내 손으로 이 세 분의 상을 치렀다. 그리고 오빠의 사 남매가 나에게 남겨졌다. 그 아이들을 이곳저곳으로 보내어 먹고 사는 길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 조카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보육원에 맡겼다. 막내 조카를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온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워 울어야 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돈도 없었고 쇠약해진 나의 몸으로 세상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신경쇠약에 빠진 나는 약 없이는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젊은 처녀의 몸으로 세 명의 장례를 치르고 조카들까지 다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되니 세상이 나를 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신도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서른셋 나이에 나에게도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만성 신우신염과 합병증 그리고 위궤양에 간은 굳어져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돈도 없었다. 집도 없고 건강도 없는 나는 하늘 아래 버려진 몸이었다.   먹을 수도 없고 한 걸음을 걷기도 힘들었다.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나는 언제 저렇게 걸을 수 있을까 하며 얼마나 울었던가? 그런 나를 하나님이 깨끗이 고쳐 주셨다. 이후 하나님의 손길은 나름대로 사람 노릇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셨다.   그 후 삼십 년의 세월을 살면서 다섯 번이나 수술했다. 나의 일생은 질병이라는 친구와 함께 하는 여정이었다. 심지어 수술하다가 성대를 다쳐 말을 못 했던 적도 있었다. 왜 이다지도 나의 인생은 거칠기만 할까?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그런 인생일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꽃피고 새가 지저귀는 아름다운 봄날을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항상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겨우살이를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그렇게도 잘못해서 이런 죗값을 받는 걸까?   ▲ 따뜻한 봄날 꽃이 만발하여 모든 사람이 환성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분은 변함없이 늘 내 곁에 계셨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나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계시지 않았다.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도 나를 건져주시고 안아주셨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마다 나를 업고 가셨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과 믿음을 얻으면서 더는 살얼음판 위 같은 삶에서 위태한 내 삶이 깨어질까 봐 염려하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의 성대를 다시 돌려주셨고 유방암도 고쳐주셨다. 다시 건강을 찾게 하셨다. 이제는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몸도, 마음도, 나의 영혼도, 나의 물질도, 나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쌓이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고 인생의 봄날도 다가왔다.   이제 신체적으로는 나이가 들었다. 일터를 떠나 조용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번민이 찾아온다. 어떻게 해야 인생의 마지막을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고민에 빠져 복지관을 찾았다. 복지관에서 건강관리, 봉사, 취미생활 등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운다. 봉사자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는 아침 일찍 셔틀버스를 타고 복지관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탁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배운다. 합창단에서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노래도 새롭게 배운다. 라인댄스도 해본다. 그중에 가장 흥미 있는 시간은 인문학 시간이다. 나의 행복을 찾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더는 흘러간 세월을 다시 가지고 와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 그렇게 나의 일생을 춥기만 한 모진 겨울을 살게 했느냐고 하나님께 푸념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미웠던 것도 억울해하던 것도 그리고 원망했던 것도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누구나 한번 왔다가 돌아가야 할 저 고향에 두려움 없이, 후회할 것 없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40여 년 전에 들었던 마틴 부버의 이야기가 오늘 인문학 시간에는 놀라운 깨달음 가운데 새롭게 다가온다.   ▲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     나는 옛날을 회상하며 지금까지 지내온 날은 나의 오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문학 시간은 지금까지 내 삶이 겨울이라고만 여기며 춥게만 느꼈던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시간은 나 스스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내 일생에서 최고의 봄날이요, 정오라는 것이 피부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지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웃기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즐겁게 지낸다. 이것이 따뜻한 봄날이 아닌가?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 앞에서 늘 아파했던 내가 이제는 꽃 피는 봄날, 정오인 지금을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는 말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따뜻한 봄날 꽃이 만발하여 모든 사람이 환성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그 봄날 지금까지의 내 삶을 토대로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모두와 가장 아름답고 벅찬 봄의 향연 속에서 최상의 기쁨을 노래할 것이다.   취재위원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17
  • 잃어버렸던 상품권을 찾아서 얻는 기쁨과 교훈
      집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큰아들이 경영하는 식당이 있다. 식당에서는 소각이 가능해 폐기된 서류나 영수증도 여기서 없애 버리면 된다.   며칠 전 이런 종이를 비닐봉지에 담아 가져갔다. 폐기할 종이를 모아 갖다 주었던 내가 이른 아침 아들네 식당으로 전화해서는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종이를 태웠는지를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막 태우려고 하는 데요”라고 돌아오는 대답에 “아주머니! 그 종이에 불붙이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쳤다.   사업자는 6개월 간격으로 부가가치세 신고를 한다. 그때마다 서류정리를 해 왔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세금계산서나 각종 영수증을 한두 시간 정도 분류하는 것인데, 이것을 두고 아내는 나를 차분하고 꼼꼼한 남편이라고 한다.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45년을 살아왔기에 익숙하다.   방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수납장 서랍에는 각종 서류가 가득 들어있다. 6개월간 생활하면서 모은 각종 영수증, 상품권, 응모권, 통지서 등 그때마다 생긴 것들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 넣어두었기에 좀 복잡하다. 며칠 전 그날도 방바닥에 앉아 서랍을 꺼내 놓고 돋보기를 쓴 채 차분하게 잘 분류하여 정리를 마쳤다. 필요한 것은 골라 보관하고 나머지 쓸모없는 것은 거실에 있는 작은 쓰레기통에 시원하게 구겨 넣었다.       이틀이 지난 아침이었다. 오늘은 온천욕을 마치고 마트에 들러 쇼핑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작년에 쓰고 남은 상품권을 챙겨보라고 말하기에 엊그제 서랍을 정리할 때 본 것 같아 찾아보니 없었다. 이런 것 보관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아내가 가끔 말하는 차분하고 꼼꼼한 남편이라는 핀잔 같은 칭찬에 꼼짝없이 내 책임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승용차를 다 뒤져도 없다. 혼자서 요란법석을 떠는 내 모습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아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머쓱하며 상품권이 없어졌다고 했다. 집 안 구석구석을 다 찾아봐도 없다. 왜 죄 없는 그 서랍을 열 번도 더 열어 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기대해 보는 것은 거실에 있는 쓰레기통뿐이었다. 나이 먹은 탓에 분별력이 떨어져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기대하고 열어보았지만, 쓰레기는 하나도 없고 깨끗했다.   아뿔싸, 그저께 식당에 가져다 버린 것이 아닌가! 벌써 이틀이 지났으니 분명히 태웠으리라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전화를 해보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마음이 조급해서 자동차를 타고 가보려다가 그만두고 집 안 구석구석 더 찾아보며 계속 전화를 했다.   순간적으로 성경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애타게 찾는 이야기다. 한 드라크마는 무게가 4.3g의 고대 그리스 은화인데 장년 하루 품삯이라고 한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상품권과 비슷한 것 같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다가 끝내 찾아낸 후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잔치하며 즐겼다는 내용이다. 한 드라크마는 값어치로 따진다면 사실 별것이 아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관습에서는 약혼식 때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를 예쁜 줄에 꼬아서 선물하고 선물을 받은 신부는 그것을 머리에 장식하여 결혼식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만일 그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파혼까지 가는 매우 귀한 증표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중에 하나를 잃었으니 이 여인은 꿈속에서라도 잃은 그것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여인이 빗자루로 온 집안을 쓸면서 열심히 찾다가 결국 찾아내고 잔치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이 여자 주인공처럼 상품권을 찾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소각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계속했다.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 다짜고짜로 물어보니 태우려고 하는 중이란 것이다. “그것에 불붙이지 마세요!” 고함에 가까운 나의 외침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태우지 않은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놓이고 정신이 바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온천욕을 하기로 한 것이 생각나서 목욕 도구를 챙겨 소각통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종전 같았으면 벌써 태워버렸을 것이 이틀이 지난 채 신기하게도 그대로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태우지 않은 사람과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준 종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에 상품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윽고 널려진 종이를 뒤적거리며 찾아보았다. 꾸겨졌지만 봉투에 담긴 상품권 7장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수십억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마음이 이렇겠지 하면서 나는 기뻐서 탄성을 지르는데, 아내는 나보고 칠칠치 못하다고 눈을 흘기며 비웃음으로 빈정댔다. 아내의 그 모습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계획대로 온천욕을 마치고 쇼핑대금 6만 원을 상품권으로 기분 좋게 결재하고 집에 왔다. 그런데 문득 35여 년 전 농촌진흥청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던 지인이 복권 100만 원에 당첨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최고 당첨금이 1억 원이었으니, 꽤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분은 반듯한 성품 탓에 허튼소리를 별로 안 했다. 그 부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지만, 남편이 들통을 내 버렸다. 말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직장에서 공개적으로 자랑했더니 한턱내라는 성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당첨 턱을 내느라고 당첨금보다도 돈이 더 들었는데도 기뻤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 물으니 “좋기는 하지만 잔치는 뭘?” 이렇게 말해놓고 내 눈치를 보더니 “그래요. 당신 맘대로 해요.” 하며 말을 돌렸다. “나도 잔치를 해보자. 나는 자발적으로 해 보자”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금방 빗나가고 말았다. 식당을 하는 큰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돈은 나중에 줄 테니 식자재 좀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곧 시장에 나가서 주문한 대로 사고 보니 남아 있던 상품권을 주고도 돈이 조금 모자랐다. 벌써 여러 번 이렇게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받아본 일이 없기에 잔치고 뭐고 다 틀렸다고 생각하니 너털웃음이 나왔다. 비록 이웃과 잔치는 못 했지만, 잠시나마 베풀 생각을 했던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졌다.   100세 시대에 내 나이는 많은 것도 아닌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해야겠다. 신중한 것은 꼭 필요한 자세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조금의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으로 큰 화를 입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행운이 따라야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사소한 것에서도 감사하며 덕을 쌓는 삶을 살면 어려움에서도 전화위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취재위원 최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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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3
  • 아내 병간호에서 얻은 깨달음
      2015년 12월 10일 겨울답지 않게 추위도 없이 지나는 평범한 목요일이다. 인문학 수업을 마치고 복지관에서 점심을 먹은 후 왠지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도 안 마시고 곧장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음식 타는 냄새와 더불어 연기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사람이 난간 문을 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가스레인지에서는 찌개가 타서 나는 연기와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화를 버럭 내면서 “주방에서 무엇을 할 땐 지켜봐야 한다고 했는데, 딴전을 피우다가 불을 낼 뻔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문이란 문은 다 열어 젖히고 연기와 냄새를 빼냈다.   그런데 집사람이 방에 들어가서 웅크리고 아파서 애를 쓰면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방 뒷문을 열다가 넘어졌다고 하면서 다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 하겠다면서 애를 쓴다.   내가 안아서 일으키니 서지 못하고 주저앉는 게 아닌가? 아뿔싸 넘어지면서 다리가 골절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급히 끌어안고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 차에 태우고 동네 정형외과로 갔다. 업으면서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는데 아파서 만지지를 못하게 한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담당의사가 넓적다리관절이 골절되었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넓적다리관절 전문치료병원을 소개해줬다. 병원 구급차를 불러서 해당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촬영과 각종 검사를 실시했다. 바로 수술을 해 달라니까 다음날까지 지켜보자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원장을 만나서 수술계획을 듣자고 하니 내과 의사가 심장과 폐에 이상이 있어 곤란하다고 하고, 마취과 의사는 너무 허약해서 마취가 곤란하다고 하면서 미적거린다. 다시 내과 CT와 골다공증 검사 등 추가 검사를 했지만, 결론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 그렇다면 대학병원으로 보냈어야 할 것 아니냐.   문제는 마취하면 혈압이 떨어지고 수액 주사를 하면 심장과 폐에 무리가 가서 어렵단다. 어찌 되었든 최선을 다해서 수술을 해보자고 의논해서 다음 날 10시로 일정을 잡았다. 마취는 하체 위주로 약하게 하고 심장과 폐를 살피며 합동으로 수술하기로 했다. 집사람도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했다.   수술실 문밖에서 지켜보는 나는 얼마나 길고 지루하며 초조했던지 모른다. 모든 수술환자의 보호자가 내 심정과 같으리라. 이번이 세 번째 수술이다. 먼저는 척추협착증 수술, 두 번째는 대장수술, 이번은 넓적다리관절 수술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내가 너무도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나는 군 생활로 타지에서 근무하고 애들 셋을 키우며 공부시키느라고 고생고생하며 살아온 여인인데 왜 이리도 아픈 곳이 많은가! 모든 게 내 잘못이고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하는가 싶은 게 나 자신이 밉고, 집사람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이 나를 옥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수술이 잘됐다고 한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야윈 얼굴에 힘없는 모습이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한다.   아내가 여러 번 수술하기는 했지만, 이번같이 길게 느껴 보긴 처음인 것 같다. 병실에 들어와 꼼짝 못 하고 누워있어 내가 옆에서 24시간 일일이 돌봐주어야 하는 것은 나뿐 아니고 같은 병실환자 보호자 모두가 똑같은 형편이었다.       다른 것은 다 하겠는데 잠자리가 고역이었다. 보호자가 잘 수 있는 게 좁은 평의자 하나였다. 그것도 키가 큰 내게는 맞지 않았다.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 마치 관속에 드러누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제가 또 하나 생겼다. 내가 잘 때 코를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병실 사람들이 잠을 못 잔단다. 죄송하다고 하면서 침대에 머리를 대고 뒤척이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이렇다 보니 무척 힘들었다. 문병을 오면서 애들이 가져온 것, 내가 산 것을 나눠주고 얼버무리며 양해를 구해 위기를 잘 넘겼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50여 년이 넘게 함께 살아온 집사람이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까 싶었다. 이 또한 집사람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럭저럭 병원생활 20여 일 만에 병원조치는 끝나고 퇴원해서 집에서 2주에 한 번씩 외래진료를 받으면서 부러진 뼈가 완벽히 붙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부터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병원에서는 삼시 세끼 식사는 주니 간식과 반찬만 구해서 주면 되고 소변은 소변 주머니로 들어가고 대변만 받아서 정리하면 되었다.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간호사나 옆에 있는 환자 보호자에게도 부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다 챙겨야 하다 보니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우선 끼니때 마다 식사 준비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밑반찬이야 시장, 마트에서 사다가 해결하면 되고 밥이야 전기밥솥이 있으니 쌀 씻어서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만, 국과 찌개를 끓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애들이 보낸 전복을 죽을 쑤려니 만만치 않아 할 수 없이 노인정 할머니들에게 부탁했다. 사골은 내가 전에도 고아 먹었으니 해결했다. 순두붓국은 식당에서 사다 끓여 주었다. 국은 마트에서 파는 것으로 하려니 그것은 입맛에 안 맞는다고 한다. 노동보다 입맛에 맞게 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욱더 힘든 문제였다. 다시 한 번 주부들의 살림살이 고충이 얼마나 크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직접 당해 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깨닫지 못했을 텐데, 주위의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의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모든 것(세면, 양치질, 대소변 가림 등)을 돌봐주는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옆에만 지켜볼 수 없어 아내는 방에 두고 나는 거실에서 책이나 TV를 보았다. 그럴 때도 수시로 나를 찾는다. 요리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불러도 잘못 알아들을 때가 있어, 종을 하나 살까도 생각했는데 집에 있는 바가지를 효자손으로 두드리니 해결되었다. 효자손이 등 긁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위의 필요한 것을 끌어당기는 데도 아주 유용했다.   이번 일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기도해 준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오늘(2016년 1월 23)로 43일이 지나갔다. 그래도 요새는 누운 상태에서 혼자 앉기까지는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식사 후 양치질, 세숫물 준비 버리기, 청소 빨래 등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모를 지경으로 보내고 있다. 언젠가는 옛날과 같이 건강하게 걷고 움직이고 복지관에 가서 기체조, 요가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희망을 품고 오늘도 정성껏 간호하며 보낸다.       오늘은 외래진료 날이다. 아침 일찍 휠체어로 주차장에 가서 차를 타고 가서 진료받았다. 이제부터는 보조기를 가지고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하면 따뜻한 봄에는 마음대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집사람의 얼굴에 환한 희망의 미소에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그래 춘삼월이면 정상으로 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나도 무척이나 기뻤다.   집에 와서는 바로 의료보조기 가게에 가서 고령자용 실내 보행차를 사서 시험을 해 보았다. 한 달 반 만에 움직이는 것이다. 아내는 힘이 들었지만 희망을 품고 걸음마를 해본다. 제발 빨리 건강이 회복되어 같이 구경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사 먹으면서 지내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나를 아는 모든 분이 염려해줌에 감사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낸다.   나라도 건강해서 집사람을 돌봐 주는데 감사하며 혼자서 사시는 분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자식이 많아도 다 제 먹고살기에 바빠 직장에 나가고 각자 일이 있어 돌봐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부부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빨리 완쾌되어 함께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매일 매일을 희망차게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배영환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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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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