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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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충분한 정보와 아집이 빚어낸 확신으로 맞본 오류
    [시니어투데이] 분당에 사는 처제가 전곡항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처제 내외와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전곡항에서 만난다. 활어를 사면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요리해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다 오곤 한다.   횟집 2층 창가에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얼마 전 ‘봉담-송산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는 보도가 있어서 진입로를 미리 찾아보았다. 이 도로를 이용하면 봉담에서 송산까지 30분이면 될 것 같았다. 20분이나 단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도로를 이용할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진입로로 들어서니 새로 닦은 도로라서 깨끗했고 표지판도 산뜻해서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아뿔싸! 며칠 전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했는데도 아직 이 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분 정도를 달리니 ‘마도’라는 출구 표지판이 보였다. ‘마도’에서도 구 도로로 연결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갈까 말까 잠시 갈등을 했다. 아내는 “여기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나는 이 도로가 ‘봉담-송산 고속도로’이니 좀 더 가면 ‘송산’ 출구가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100미터도 달리지 못해 내비게이션에서는 유턴하라는 표시가 나왔다. 헷갈리는 상황에서 달리다가 표지판을 보니 조암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조암 톨게이트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도착시간이 30분 후로 조정되어 나왔다.   자기 말을 안 들었다고 투덜거리는 아내에게 처제에게 전화해 30분쯤 늦겠다고 전하라고 부탁했다. 이 말을 건네면서도 괜한 아집을 부렸나 싶어서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조암에서 통행료 3천5백 원을 내고 나가서 다시 진입하여 마도에서 구 도로와 만나 한참 만에 전곡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침 토요일인지라 그 넓은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 들어차 주차할 곳이 없었다. 밀려드는 차들은 주차할 곳을 찾느라고 사방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주차를 하고 처제 내외와 전화해서 만났지만 식당은 만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토요일에 만나지 말자고 하며 가지고 간 간식만 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수산물센터에서 매운탕거리만 사서 헤어지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아는 길인 구 도로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올 때 실수했던 나는 갈 때는 얼마나 빨리 갈 수 있는지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곤 또 ‘봉담-송산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얼마지 않아 평택-시흥 갈림길이 나왔다. 자신이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시흥 방향으로 선택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못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40킬로미터를 달린 후에야 ‘안산’ 출구로 나갈 수 있었다.   “아! 내가 오늘 왜 이러지?” 아내는 또 자기 말을 안 듣더니 이렇게 됐다고 언짢아했다. 아내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할 말이 없었기에 그 후로는 침묵이 흘렀다. ‘안산’에서 빠져나온 후에 50분을 더 달려서 집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줄리언 반스(Julian Patrick Barnes)가 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구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렇다.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데 감(感)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었다. 오늘 나는 불충분한 정보와 아집이 빚어낸 확신으로 초래한 오류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우리 시니어들은 젊은이들보다 정보력이나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비게이션 같은 필수적 기기들은 수시로 업데이트하는 등 더 철저하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짐작이나 예감을 확신하려는 아집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보를 수집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2021-06-21
  • SNS 접속 장애로 겪었던 어려움과 깨달음
    [시니어투데이] 나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밤에는 1시간씩 동호인끼리 영어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전화를 이용하다가 얼마 전부터 화상회의 앱 ‘줌(Zoom)’을 통해서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전부터 줌(Zoom)에 연결이 안 되어 나만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접속 장애 없이 잘 사용했는데 웬일일까? 그런데 연결만 하려고 하면 내 휴대폰의 와이파이 신호가 사라지면서 연결이 안 되었다. 공유기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도,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 접속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서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각종 해결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주일 후에 휴대폰에 와이파이 신호 세기가 강하게 표시되기에 다시 연결해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알 수 없는 장애로 연결이 안 된다”는 메시지만 뜰뿐 접속이 안 됐다. 그날도 나는 허탕을 쳤다. 몇 시간을 씨름하여 교재를 다 번역해 놓고 공부 시간만 기다렸는데 접속이 안 되니 속이 많이 상했다.   이 방면에 능숙한 지인에게 요청해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아내의 휴대폰으로 하면 접속이 잘 되었다. 전화기 때문인 것 같아 A/S 센터에 가보았지만, 휴대폰의 문제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A/S 센터에서 공유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통신사에 고장 신고를 하여 온라인으로 점검을 해보아도 정상이라고 했다. AS기사가 방문을 해서 전파 측정기로 검사하더니 신호가 잘 잡히니 공유기는 정상이라고 했다.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Zoom 연결”, “와이파이 끊기는 문제”를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검색했다. 어디엔가 전화기의 와이파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휴대폰에서 “네트워크 설정 초기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 해서 초기화를 시키고 사뭇 긴장된 마음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연결이 되었다. 2주 동안 못 보았던 동호회 회원들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제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줌(Zoom)으로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휴대폰에 “데이터가 다 소진되어 이제부터는 요금이 부과된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데이터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추가 사용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요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그동안 줌(Zoom)을 연결하는데 와이파이가 아닌 휴대폰 데이터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방법은 공유기를 바꾸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새로 구입한 공유기에는 안테나가 네 개나 달려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공유기 밑면에 비밀번호가 있다고 쓰여있다고 했다. 그 번호를 입력했더니 와이파이 기호가 떴다. 이제 다시 접속을 시도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지금도 전에 사용하던 공유기에서는 아내 휴대폰은 되고, 내 것은 왜 안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디지털 기기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주 애를 먹이지만, 시니어들에게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그러더라도 지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다가 보면 끝내는 해결할 길이 나오는 것이다. 시니어들의 자산은 풍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축적된 지혜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들의 경쟁력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이 또한 시니어들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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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1-06-07
  • SNS 사용에서 주의할 점과 대응 지혜
    [시니어투데이] 며칠 전 새로 들어온 이메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도착하는 이메일은 그중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일단 삭제하고 남은 것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본다.   그중에 한 SNS에 ‘친구 요청’이 있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그 SNS에서 보내주는 이메일 가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요청이 많아 보통은 삭제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Jennifer라는 사람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외국인이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서 열어 보았다. 나의 SNS 계정에 들어와 내가 쓴 글들에 ‘좋아요’ 표시를 여러 번 해 놓았다.   계정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귀엽게 생긴 아가씨다. 군복을 입고 동료들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보였는데 아마 여군인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메시지가 와있어 열어보니 ‘제발 좀 친구로 추가해주세요’라고 한글로 쓰여 있었다. 친구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다시 요청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까짓것 별일이야 생기겠나 싶어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 SNS 계정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기는 시리아에 있는 미국 군인인데 반갑다고 인사를 보낸 것이었다. 나도 반갑다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메일을 열었는데 별도의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자기는 한국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7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라서 군인이 되어 지금 시리아에서 정보통신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시련을 겪어서 힘들었겠지만 씩씩한 군인이 되었다니 장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리아라면 한밤중 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 시쯤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2시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얘기하고 어서 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야간 근무 중이라 괜찮다고 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묻는다.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에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연결하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통화는 안 되었다. 잠시 후에 메시지가 왔다. 군사시설이라서 보안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고 하면서 ○○톡을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더니 ○○톡 아이디를 묻는 것이었다. ○○톡은 아이디가 없이 그냥 이름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아이디라니? 그래서 아이디는 없다고 하니 잠시 후에 자기 아이디를 알려주며 친구추가를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톡 연결이 되었다. ○○톡으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점차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SNS 프로필을 보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다. 자기는 자살폭탄 공격이 심한 이곳에서 군에서 퇴직하여 민간인으로 살고 싶다.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 사촌들과 조부모님도 찾아 정착하여 살고 싶다. 자기를 좀 도와 달라”는 요지의 부탁이었다. 나는 시골에 사는 노인이라서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갈수록 다음과 같은 놀라운 요지의 말을 늘어놓는다. 수색 중에 큰돈을 발견했다. 아마 저항군들의 군자금인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이것을 네 명이 나누기로 했는데 자기 몫은 5백만 달러쯤 된다. 달러가 가득 들어 있는 철제상자와 전투 현장의 사진들도 보냈다.   “한국 정착자금으로 사용할 이 돈 상자를 화물로 보낼 터이니 보관을 부탁한다. 자기는 물건이 도착한 2주 후에 한국에 입국하겠다. 액수의 30%를 수고비로 드리겠다. 주소를 알려 달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도 싫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노인이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제발 도와 달라. 당신이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매달린다.   나는 아침에 아내와 공원에서 조깅한 후 시장에 들려오기로 한 터라 더는 붙들고 있을 수도 없어 그냥 ○○톡을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린이날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내외가 왔을 때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며 ○○톡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이런 사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끔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낯선 메시지는 무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SNS에 프로필을 노출하다가 보니, 편리함도 있지만, 범죄에 악용될 소지도 없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과도한 사생활이나 개인정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SNS가 편리하고 관계를 통해 존재의 힘을 과시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5-21
  • 과학도를 꿈꾸며 2021년 대학 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시니어투데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팬데믹(pandemic)으로 온 세상이 힘들었던 2020년이 저물어가던 즈음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대학에 지원한 외손자의 합격 소식이었다.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외손자가 희망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무척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외손자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과학을 좋아했고, 학교 대표로 출품한 각종 과학 관련 대회에서 자주 입상하여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아이였다. 명절 때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 과학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데 너무 수준이 높아 공대를 나온 나도 대답하는 데 쩔쩔매기가 일쑤였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는 아는 것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사양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큰일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외손자가 중학생 때였는데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서 주방 식탁 한쪽에 실험도구를 차려놓고 화학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외손자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얘가 입원해 있다는 화상 전문병원에 가보니 얼굴과 손이 온통 붕대로 감겨있어 눈앞이 캄캄했었다. 다행히 몇 달 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얘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종이로 만든 우주선을 건네고 갔다. 어느 날 책장에 올려놓은 그 종이 우주선을 보고 소망을 담아 적어 본 시다.   종이 우주선   책장 위에서 발사대기 중인 U-3069호 종이 우주선 언제 창공으로 솟아오를까?   우주과학자가 되겠다는 꽃 같은 우리 외손자 놀러 와 만든 꿈을 기도 속에 키워주었다.   주방 한쪽 너의 작은 실험실에서 들린 폭발음은 먼 훗날 네 종이 우주선이 날아오를 전주곡이었을까.   온통 붕대밖에 보이지 않던 그날 병실에서는 가슴이 내려앉았었는데   이제는 그 꿈 펼칠 나날 그리며 쉼 없이 달려가는 네 모습이 할아버지 마음에서 행복하게 솟아오르고 있구나.   나는 과학도로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될 출발을 앞둔 외손자와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많은 젊은이에게 축복과 함께 기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과학자는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까.   과학 연구에 대한 과학자의 태도는 인류의 삶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통기관의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의 활동 범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질병과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로운 힘이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 로봇 등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활짝 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인류에 대해 남다르게 따뜻한 감성을 지녀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뛰어난 공감력 및 소통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이고 이루어갈 미래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부모와 두뇌 및 신체적 조건 그리고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한 개인은 자신과 인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수한 자질을 지닌 것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그 개인의 영광임과 동시에 인류의 공적 자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삶은 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의 수많은 선행연구자의 연구 성과와 그를 가르쳐준 많은 스승 그리고 국가적 지원 등 주변의 다양한 도움도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과학자들은 남다른 시대적 사명을 지녀야 하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고 그에 따른 사명감과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남다른 자질을 지닌 사람은 그만큼 영광도 크기에 그에 따른 사명감을 보람으로 여기는 넓은 마음과 안목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수한 자질을 바탕으로 뜨거운 열정과 큰 노력으로 이루어낸 대학 입시 결과로 과학도로 출발할 시점을 앞둔 모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자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1-11
  • 차량용 빗물받이 교체, 직접 해결하다
    [시니어투데이] 언제부터인가 내 차의 조수석 뒤쪽 좌석 창문 위에 달려있던 빗물받이가 한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했지만, 중요한 부품도 아니어서 그대로 타고 다닌 지가 1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좁은 길을 지나는데 물건을 내리려고 주차하고 있던 화물차 기사가 갑자기 뒷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내 차의 조수석 백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놀라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려서 보니 앞바퀴 윗부분과 그쪽 문에도 흠집이 생겨있었다. 물론, 화물차 기사가 100%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하여 그쪽 보험사의 부담으로 수리를 다 마쳤다.   수리를 마치고 며칠 후에 보니 조수석 창문에 부착되어있던 빗물받이도 일부가 깨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고로 깨진 것이 확실하지만, 뒤늦게 청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알고 나니 눈에 거슬려 과감하게 새것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집 부근의 카센터에 가서 교환을 부탁했더니 일을 맡지 않으려 했다. 차량용 부품점에 가면 부품을 살 수 있으니 거기에서 사서 붙이라는 것이었다. 수리비를 많이 받을 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센터에서 알려준 곳으로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차량용 부품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차량용 빗물받이를 검색하니 차종별로 많은 제품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서 내 차에 알맞은 빗물받이를 선택하여 주문했더니 며칠 후 물품이 도착했다.   택배로 도착한 빗물받이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파손된 것을 떼어내기만 하면 나도 쉽게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단단히 붙어있어 조각이 떨어져 나가도 일부는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수리를 의뢰하러 카센터로 갈까 하다가 좀 더 해 보기로 하고,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글로브 박스(glove box)에 넣어두었던 드라이버를 몇 년 만에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기온도 낮았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힘을 내서 드라이버를 틈새로 끼워 넣는 등 한참 동안을 씨름해서 겨우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새로 산 빗물받이에는 양면 접착테이프가 붙어있었고, 그 표면에서 보호용으로 부착된 종이를 떼어낸 다음 적당한 위치에 단단히 붙였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그동안 깨어진 빗물받이를 달고 다녔던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은 차량용 이외에도 소비자가 손쉽게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용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불편함을 처리하고 발전적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시니어들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체력과 역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시니어들에게는 일평생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지 않은가.   장비를 쓰는 것이나 조작과 사용이 편리하게 만들어진 용품들이라면 이를 하는 데에서는 힘보다는 지혜가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의 강점이고 더욱더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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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이를 넘어 인간의 수명을 150세로 내다보는 견해도 있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소망이다. 이렇다 보니 몸에 좋다는 식품이며 의약품의 개발도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동마저도 건강관리를 위해 한다. 장수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사는 물론, 의료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우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장수도 좋지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산업 분야가 날로 성장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젖을 빨게 된다.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부족하면 울어서라도 부족함을 채워나간다. 허기를 채우는 식욕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본질적 욕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입맛이 없다면 그것은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음식이 너무 맛있다. 무엇을 먹든지 맛있다. “맛있다”라고 하면서 먹으니 먹는 즐거움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사람이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져서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폭식도 하고 야식도 하고 간식도 한다. 대부분 사람에게서 위장병이 생기는 이유가 음식과 관련이 있다.         나는 지금이야 맛있게 잘 먹지만, 예전에는 밥을 먹는 것이 고역이었다. 나는 간식도 야식도 폭식도 하지 않는다. 급하게 먹지도 않고 아주 천천히 먹는다. 마냥 씹고 있다. 어떤 장소에 가서도 항상 가장 늦게까지 먹는다. 그러니 어떤 모임에 가서 식사할 때면 나는 최대한 앞에 서서 빨리 들어간다. 일찍 들어가서 먹기 시작해도 항상 늦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먹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먹지 않아도 배고픔을 모르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먹지 않으면 배고파야 정상인데, 나는 배고픔을 모르는 것이 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을 때는 일부러 맛있게 먹는 척했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영양분을 흡수하는 차원에서 먹어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인간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니,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나이가 들면 밥의 힘으로 산다고 한다. 정말이다. 젊어서는 하루에 한 끼니를 먹으나, 두 끼니를 먹으나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한 끼니만 먹지 않으면, 손발이 벌벌 떨리고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그래서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일 년에 2kg 정도나 살이 빠졌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어지럽고 구토가 나오고 머리는 쪼개질 것같이 아팠다. 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나 뇌에 이상이 있는가 싶어서 병원에 가 검사받아 봐도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점점 메스껍고 구토 증상이 심해졌다.   혹시 위암은 아니겠냐는 의심이 생겼다.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위암은 아니고 위염이라고 했다. 위염은 보통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자꾸만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 위장병 전문병원을 알게 되어서 무조건 찾아갔다. 머리 아픈 것도, 온몸의 통증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내가 겪는 증상 모두가 위장병 탓이라는 것이었다.   위가 쪼그라들고 말라버려서 위암 직전이라는 것이었다. 내시경으로는 위벽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 위는 신경이 마비되어 밥이 들어가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00명 중의 한 사람인 챔피언급 환자라고 했다.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치료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검사한 후 입원을 하라는 결정이 났다. 젊어서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해 치료도 하고 수술도 했던 경험 탓에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냥 지내다가 세상과 작별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삶을 어찌 그렇게 쉽게 여길 일인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려면 입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3주간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병원 생활은 모두 청산한 줄 알았는데 또다시 시작됐다. 무척 창피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병원 생활을 자주 해야 하는지, 이제는 병원 생활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번에는 수술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생활이 꽤 길었다. 입원하니, 무조건 금식을 시켰다. 금식하면서 간에 쌓인 독소를 모두 빼내는 작업부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금식 후에는 미음으로 위를 다스리고, 후에는 날마다 묽은 죽을 번갈아 가며 먹게 했다.   신생아처럼 음식을 섭취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맛있게 먹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맛있게 먹을 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치료받는 데 집중했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27
  • 일상에서 피어나는 행복
    요즘은 모든 것이 너무나 흔한 시대여서 손주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무얼 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그렇게 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특별하지 않은 학용품은 싫증 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잊어버리더라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들은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어떤 것을 선물해 주어야 할지 무척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편하게 현금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황금만능주의 시대가 된 것일까?   어린이날이 지나면 곧 어버이날이다 보니, 어느 하루를 정해서 함께 식사하거나 놀이동산을 찾기도 한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나 역시 손녀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이 됐다. 내가 자라던 시대는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작은 것이라도 생길라치면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새록새록 추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크레파스를 사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상으로 받은 크레파스가 있어서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 3년 동안에는 물감을 사 본 일이 없다. 그러니 물감이 필요한 미술 시간이 내게는 아주 고통스럽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억이 떠올라서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손녀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다가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샀다. 아들네 가족과 함께 바람도 쐬고 식사도 하려고 독산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나는 자동차 안에서 손녀에게 선물을 주며 나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손녀야 부족한 것도, 크게 부러울 것 없겠지만, 특별히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선물하게 된 이유를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학창시절 12년 동안 사보지 못했고,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손녀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들을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이 손녀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독산성에 오른 우리는 산책 가운데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산에서 내려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우리처럼 3대가 모여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러 카페에 들렀다. 카페에도 3대가 어울린 가족들로 붐볐다. 손녀는 내가 사준 크레파스가 정감이 가는가 보다. 손에서 놓지 않고 만지작거리다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그리고 난 후 할머니를 그리겠다고 내 앞에 스케치북을 펼쳤다. 계속하여 나를 바라보면서 손놀림을 했다. 탁자 앞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그리더니 한쪽으로 가서 무엇인가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는 그림과 그 옆에 쓴 글을 내 앞에 내놓았다.   “할머니 사랑해요. 4살 때 산에 가서 술래잡기, 숨바꼭질 같은 재미있는 놀이를 많이 했던 것이 8살이 돼서도 생각나요. 다리 아플 때는 할머니가 어부바해주어서 감사해요. 사랑해요. 하진 올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감춰 두었던 향기처럼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피로가 싹 사라졌다. 흐뭇한 마음이 몸 맘에 가득해지며 행복이 출렁거렸다.   특히 노인들은 자식들이 자주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점점 더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행히도 노인복지관이나 경로당이 있어서 외로운 노인들을 챙겨주기도 한다. 이런 처지를 바라보노라며 가정의 달이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서글프다.   뉴스에서 본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버이날 무료급식소에 제일 먼저 나온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자녀가 없습니까?”라고 기자가 묻는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4형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 살면서 어버이날인데도 무료급식소에 나와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아들들이 바빠서 명절 때만 본다고 한다. 정말 바빠서일까? 왠지 마음이 씁쓸하다.   그뿐인가? 듣고 싶지 않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 부모의 잔소리가 싫어서 자살하는 사건 등 말로 표현하기조차 곤혹스럽고 부끄럽다.   효의 민족이라고 불리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랑도, 정도, 사라지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지만 행복지수는 높아 가는데, 왜 우리는 그렇지 못할까?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에 드는 나라인데 행복하다는 말보다 불만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의 잘못일까? 누구의 탓이 아니다. 모두가 우리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너를 보기 전에 먼저 나를 본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보지 않고 너를 보고 있다. 나를 보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   수십억 원을 들인 행사가 끝난 다음, 그 자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는 일도 다반사다. 도대체 이것이 누구의 탓일까? 수십억 원의 유발 효과가 겨우 쓰레기란 말인가. 타인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을 배우고 익히지 못한 탓이다. 나를 돌아보며 우리를 생각하는 성찰적 실천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읽고,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면 서로가 행복으로 가득해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작은 것이나 소소함에서도 사랑과 행복이 싹을 틔우고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13
  • 인내해야 아름다운 인생을 꽃피울 수 있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한다. 하지만 인내가 어디 쉬운 일인가. 쉽다면 인내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다이어트에 신경을 쓴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도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중독에 빠질 가능성도 큰 편이다. 어떤 사람은 홈쇼핑에 빠져 빚더미 위에 앉은 사람도 있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가정이 파탄 난 것을 보기도 한다.   세상에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인내를 요구한다. 그만큼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고, 보람과 기쁨을 준다는 의미다. 인내는 성실을 내포하는 것이며, 희망이 있을 때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좋은 일을 성취하는 데에도 인내가 필요하지만, 사고를 예방하는 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일으키는 사건·사고들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심지어 살인에 까지도 이르게 되는 일도 있다. 모두 인내하지 못하는 탓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급한 편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내력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다”고 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3초만 기다리면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옛말에 ‘참을 인(忍)’ 자를 세 번만 쓰면 극한 분노로 벌이게 될 일도 피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인내는 성실을 내포하는 것이며, 희망이 있을 때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월터 미셸(W. Mischel)은 1966년 네 살짜리 653명을 대상으로 마시멜로 하나씩을 주면서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으면 두 개를 더 주겠다는 실험을 했다. 절반의 아이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그만 눈앞에 놓인 마시멜로 하나를 먹고 말았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81년 그 아이들의 삶의 현상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5분을 참아서 한 개를 더 받아먹었던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우수하더라는 것이다. 성적을 비롯해 삶의 전반에서 훨씬 더 뛰어났다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했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비만, 약물중독, 사회 부적응 등의 문제를 안고 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겠는가. 인내는 이성을 지닌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매우 가치 있고 고차원적인 실천 의지다. 인내가 부족하면 보통의 삶이 아니라, 저급한 삶으로 빨려들기 쉽다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은 인내를 통해 주어진다. 물을 끓이는 것도 100℃가 될 때까지 인내하고 열을 가해야 한다. “하늘은 언제나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다”라는 말이 있다.   인내는 누가 공짜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쌓아 나가야 한다. 오늘을 견뎌 밝은 내일을 창출하리라는 기대감을 지닌 사람이라야 인내할 수 있다.   예전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요즘 사람들이 인내력이 더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기술의 발달로 무엇이든지 쉽고 빠르게 얻게 된 탓도 있다. 무엇보다도 인내의 밑거름이 되는 고난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내를 배울 기회가 부족했다. 오히려 조급함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농부는 때를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해낸다. 곡식을 심기 위해 봄비를 기다린다. 농작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여름비를 기다린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린 끝에 수학의 기쁨을 맛본다. 그것이 기다림의 결과로 얻는 기쁨 아닌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기다릴 수 없다. 다린다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작업이다. 자아를 깨뜨리고 성찰해야 배울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며 부족함을 발견하고 채워나가는 지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한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끊임없이 채워나갈 줄 아는 사람이 메타인지가 발달한 사람이다. 사무엘 스마일스는 《자조론》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에델바이스는 고산지대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폭설과 강풍을 견뎌냈기에 신비로운 색을 낸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희망을 품고 잘 견뎌낼 때, 마침내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5-07
  • 학창시절
    1960년도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4·19 혁명(1960년)을 거쳐 5.16 군사 정변(1961년)으로 어려운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 전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러나 중학교에 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그때 시골에서는 우리보다 부잣집에서도 여자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며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우리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을 찾아갔다.   외갓집은 잘살았던 집안이었다. 나는 외삼촌이 계실 때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었다. 여자라도 배워야 한다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게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축복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다른 친구들은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나는 가방이 없어 보자기로 책을 가지고 다녔다. 2km를 걸어간 다음 6km를 기차로 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8km가 되는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니며 차비를 아껴서 공부할 준비물을 샀다.   교복은 선배가 입었던 헌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스타킹 한 켤레로 3년을 지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때는 전기다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쇠로 된 둥근 다리미에 빨갛게 불이 붙은 숯을 넣고 옷을 다리다 보면 멀미를 해서 쓰러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든 집안일은 내 몫이었다.   모내기나 밭일을 해야 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농부들이 먹을 밥을 해놓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학생이 주부가 하는 일을 다 해야 했던 것이었다. 체질적으로 약한 나는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이면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교실은 3층이었다. 나는 3층을 올라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한층 올라가서 쉬고 또 한층 올라가서 쉬며 교실에 들어간다. 쉬는 시간이면 책상에 엎드려 쉬어야 한다. 공부하랴 집안 일하랴 너무나 힘이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재미있게 노는데 나는 그것까지도 부러워하기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일 년 동안은 외갓집에서 등록금을 주어서 공부했으나 2학년부터는 어머니가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나의 등록금 대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그때 시대는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시험도 보지 못하게 했다.   종아리는 맞을 수 있었으나 시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종아리 몇 번을 맞고 난 다음에야 시험을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등록금 달라는 말을 겨우 꺼내야 했었다. 8km를 걸어서 학교에 가는 내 끈기를 보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아무리 고생이 돼도 공부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렇게나마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다. 이렇게 나의 꽃다운 고등학교 시절을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학교생활 통지표의 통신란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늘 똑같은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명랑함 부족”이란 문구였다.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에게 비친 나의 이미지는 그저 착한 아이였다. 착한 것이 아니라, 명랑함 부족과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항상 외롭고 쓸쓸하게 자란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직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에서만 보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는 착한 아이로 비친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집에서 기쁨을 얻을 수 없던 내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이고 삶의 피난처가 되었다. 오직 교회만이 나를 품어주는 보금자리였고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무서워서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다. 아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사신 어머니는 딸 때문에 마음에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위로요,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던 내 성품이 어머니에게 효도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위로로 삼아본다.   유정애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30
  • 산책길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호천 산책에 나섰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지난 일들을 성찰하며, 하루를 계획하며 실천을 그리며 걷는 이 길은 내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 되어준다. 이런 생각과 함께 율목교를 내려선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친구들이 나를 반겨준다. 한여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오늘은 시냇물 소리도 유난히 활기차다.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여러 가지 꽃들 곁으로 나비가 춤을 추고 물고기들은 내 발소리를 아는 듯 꼬리를 흔들며 반겨준다.   노루교에 가까워지자 급경사에 쌓아놓은 돌 틈으로 잔잔히 흐르던 시냇물이 갑자기 뜀박질을 시작하는 장난꾸러기들처럼 활력이 넘친다.   옆에 있던 갖가지 꽃들도 제각각 자신을 봐달라며 자태를 뽐낸다. 나는 “그래 아이고, 다들 예쁘구나”라고 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계절이 이렇게 푸르렀는지 온갖 식물들이 경쟁하며 푸른빛을 드러내고, 여름 냄새로 내 기운까지 북돋아 준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 나온 아들의 모습이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어떤 명화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저런 모습이 사람 사는 모습인데, 언론을 통해 서로 다투고, 속이고, 싸우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침 산책길은 그런 후유증을 늘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이내 샘내교에 이르니, 황새가 긴 다리와 가냘픈 목을 쭉 내밀고 어서 오라는 듯 고개를 든다. 오리 가족은 행사라도 하는 듯 자맥질과 유영을 뽐내며 나를 환영해준다. 이런 여름의 광경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인 양 행복에 젖는다.   여름의 길목이라 아침인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투명한 진주가 되어 송골송골 맺힌다. 이때쯤이면 동남교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는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우리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무작정 걷기만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을 떠밀리듯, 억지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힘들고 괴롭겠는가. 하지만, 인생은 선택이고 자유다. 스스로 최적의 길을 찾아 즐겁게 걸으면 된다. 산책길에서 경주는 필요 없다. 우리의 인생도 바로 이 같은 산책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의 인생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걷고 있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희망을 희망하라
    1. 어딘가에 희망은 있다    극한 고난과 마주한 환경에 처해도 어딘가에 희망은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사람에게 고난은 무엇일까? 고난이 고난으로 끝난다면 고난은 슬픔의 모태일 뿐이다. 그러나 고난은 반드시 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시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가에는 온통 펄들로 가득하다. 검게 펼쳐진 개흙은 죽은 듯 고요하다. 생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드러누운 갯벌에는 밀려오는 고난을 양식 삼아 수많은 생명이 살아간다. 그 가운데는 조개의 아픔으로 탄생하는 진주도 있다.    나의 인생도 어두운 갯벌 속 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런 나의 인생이 진주처럼 영롱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을 조금이라도 지켜본 사람은 모두 불운이라고 혀를 찼다. 불운도 이 정도면 지나치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비신앙인들이 볼 때는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의 처지였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택하는 길 가운데 가장 쉬운 것이 삶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힘든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죽음을 택할 그 마음으로 사세요. 죽을힘을 다해 살다 보면 인생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해답과 보상과 내놓고 만다는 것이다. 먹구름은 비를 뿌린다. 때로는 폭우를 쏟아내며 많은 종류의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한없이 비를 뿌리지는 못한다. 먹구름 뒤에는 반드시 밝은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구름이 가로막고 있는 하늘의 본 모습은 언제나 푸르고 푸른 하늘이다.  그래서 고난은 잠깐이라고 한다. 때로 이 잠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난의 긴 터널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터널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이 끝나는 지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지치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다.    사람의 삶에서 돈과 건강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다. 여기에 더하여 행복한 가정과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삶의 질은 심각한 훼손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이 세 가지가 모두 겹쳐서 찾아온다면 상상조차 어려운 환경을 맞이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고난과 맞서야 했다. 이것은 고난이라기보다 생사의 문제였다. 당장 죽느냐 사느냐를 반복해야 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사치였다. 이 길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이다. 인간에게 희망은 고난과 맞서 싸울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내 인생은 극한 고난과 절대 희망의 치열한 전투였다.   유정애 목사의 삶의 증언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서 초·중·고교를 거쳐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장합동개혁 소속 목사로 복된 교회를 일구어낸다. 옥상에서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가 수백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고,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빛나는 목회를 하다가 이제는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산다. 현재는 박요섭 박사와 함께 시니어들의 두 번째 청춘을 응원하며 희망을 쏘아 올리는 가운데 글을 쓰며 또 한 번의 청춘을 꽃피우고 있다. 이 글은 한국의 미우라 아야코로 불리는 유정애 목사의 치열했던 삶의 증언이고, 앞으로 펼쳐질 빛나는 세계에 대한 서막이다. 이 글을 통해 모두가 위로받고 용기를 내, 행복한 삶을 일구어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내 유소년 시절
    내가 태어난 곳은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전라북도 김제이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대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지냈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난은 물질보다는 외로움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계셨고 태어난 지 8개월이 못 되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고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오빠가 나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 먹여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 나는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부르곤 했다. 허공에 대고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온다.   서른한 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고 남매를 기르며 사셨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땐 여자가 돈을 번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얼마 되지도 않은 논밭을 가꾸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어머니는 여성이다가 보니 큰 힘이 필요한 일에 부닥치면 자장 힘들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둡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는 어머니가 한번 말씀하시면 감히 “아니요”라는 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동네 어른들은 내게 ‘착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어머니는 늘 들로 일하러 가셨고, 열두 살 위인 오빠는 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외로움이 내 친구였던 셈이다. 오빤 청개구리처럼 항상 어머니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옛날엔 겨울이 되면 시골에서는 일거리가 귀했다. 이렇다 보니 도박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겨울만 되면 오빠는 어머니 몰래 집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것이라도 가지고 나가 도박 자금으로 썼다. 그러니 집안 분위기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겨울밤 시골길은 얼마나 어두운가? 얼마나 캄캄한지 앞뒤를 분간할 수도 없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를 보고 동네 어딘가에서 도박에 빠져 있을 오빠를 찾아오라고 하신다. 그러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창호지를 붙여 만든 조그만 등에 등잔을 넣고 불을 밝히며 캄캄한 동네를 찾아다녀야 했다. 무섭기는 얼마나 무서운가? 어두운 밤길보다 어머니의 명령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에 나는 손에 장갑도 없이 눈을 헤치며 오빠를 찾아 나선다. 온 동네 집집이 들러보면 불이 켜진 집이 있다. 나는 그 집 앞에 가서 가만히 들어본다. 그러면 영락없이 화투 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오빠” 하고 불러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부르면 누군가 문을 열고 내다본다. 그래도 오빠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불쌍해서 오빠를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기를 여러 번. 겨울이 지나갈 때까지. 아니 그다음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어야 했다. 자연히 어머니와 오빠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지옥 같았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얼마나 문밖에서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한창 뛰어놀 때인데도 뛰어놀지도 못하고 어른들 속에서 희생양으로 살았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어려서부터 이런 아픔을 가져야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기쁨이었다. 교회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교회학교에서의 활동은 내 최고의 삶이었다. 성경퀴즈대회에서도 암송대회에서도 항상 1등을 했다. 나는 학용품을 거의 사서 쓰지 않았다. 모두가 교회에서 받은 상품이었다.   어둡게만 보였던 나는 항상 얌전하고 착하고 순종 잘하는 아이였다. 이런 모습 때문에 분에 넘치는 칭찬과 함께 애늙은이라는 별명까지 달고 살았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한 집안의 가장이며 교회에서는 일꾼이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루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일깨워 새벽기도를 하게 한다.   새벽이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한번 불러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불을 걷어치우는 바람에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되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덕분에 나는 기도를 배웠고 지금까지도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나는 지금까지 새벽기도가 습관이 되었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머니의 건강은 항상 좋지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병이 나면 어린 내가 어머니의 병시중을 해야 했다. 죽을 쑤어드리고 밤새 온몸을 주물러드리며 잠이 드실 때까지 성경을 읽어드렸다. 어머니가 잠이 드시면 나도 옆에서 잠을 잤다.   반면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겨울에는 일이 없어서 조금은 편히 지내신다. 그때면 어머니는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신다. 기도 중에 잠이 드신 어머니 모습을 보면 천사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 일어나면서 너무나 기뻐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정애야 나는 천국을 보았다. 그곳에서 내 집이 얼마나 좋은지 황금으로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집이더라.”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어머니께서 그렇게 힘든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멀리서 찾아온 벗님들
    지난주 어느 날 저녁 우리 부부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아침까지 이어져 둘이서 별로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일주일 후인 다음 주 월요일 인터넷으로 함께 영어를 공부하는 젊은 벗들이 멀리서 오게 되어서 그 접대 문제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밤에 Skype 전화로 영어공부를 함께하고 있는 사이다. 회원들은 모두 부산, 밀양 등에 흩어져 살고 있어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서로 얼굴도 볼 겸 만나서 친목을 다지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회원들이 경남지역에 살고 있으니 화성에 사는 나만 그리로 가면 쉽게 만남이 해결된다. 그러나 꽉 짜인 일정 때문에 좀처럼 기회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공부를 마치고 나서 하는 말이 이번에 그중 세 분이 오프라인 모임을 겸하여 화성으로 1박 2일 여행계획을 잡았다는 것이다. 2주 후인 3월 11일 점심때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화성 구경을 한 후 제부도로 가서 일박 후 다음 날 오후에 돌아가는 계획이라고 한다. 그날은 복지관 합창연습이 있는 날이었지만 하루를 빼먹고 점심때부터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아내에게 손님들과 수원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관광한 후 제부도에 가서 저녁을 먹고, 놀다가 집에 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수원 구경만 함께하고 제부도는 가지 않았으면 했다. 이유는 팔십이 다 된 노인이 밤에 운전하는 것이 걱정되어 말리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데도 꼭 가야겠냐고 성화다. 나는 그래도 나를 만나려고 멀리 부산에서 1000리 길을 달려온다는데 그 정도 시간은 함께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내를 달랬다.       아내는 나의 고집에 화가 나는지 밥을 먹다 말고 자기가 너무 심한지 물어봐야겠다고 아들에게 전화했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훌쩍훌쩍 우는 것이다. 아들에게도 창피하기도 하고, 뭐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한참 후 전화를 끊기에 아들은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두 분이 조금씩만 양보하시면 좋겠다고 난처해서 하더란다. 하기야 아들이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점심때 휴대전화에 문자가 하나 와있다. 열어보니 아내가 보낸 것이다. “여보 미안해요. 아침에 기분을 언짢게 해서요.” 마음이 누그러졌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오후에 복지관에서 집으로 오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안 받는데 엄마가 어디 가신지 아느냐고 묻는다. 아들은 말은 않았지만, 아침에 엄마가 울면서 전화를 했던 터라, 걱정스러워 몹시 애가 타는 모양이다. 글쎄 어디 간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웬일이지? 나는 아들에게 아침에 엄마가 문자를 보낸 걸 보면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좀 불안하기는 했다.   다행히 집에 오니 아내가 있었다. 경로당에서 하는 밸런스 체조 강습을 받으러 가느라고 휴대폰을 놓고 나갔다가 왔다는 것이다. 다녀와서 보니 아이들의 전화가 여러 번 왔었던 모양이라고 한다. 아들, 딸이 몇 번씩 전화를 해주고 며느리가 점심을 하자고 졸라대고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고 아내는 흐뭇해했다.   며칠 후 손님들은 밀양에서 한 분을 태워서 오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각자 봉담으로 2시까지 오기로 계획을 바꾸자고 했다. 마침 그날 오전에 기자단 위촉식과 교육이 있다고 했는데, 나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잘된 셈이었다. 결국, 봉담읍사무소에서 부산과 밀양에서 출발하여 5시간 정도나 운전을 했다는 손님들과 만났다. 부산에서 오신 분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운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 속에는 이 만남을 그만큼 기대하며 왔다는 의미가 배어 있었다.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만난 분들이지만, 매주 한 번씩 목소리를 들어온 사이라 금방 친숙해졌다.       전에 영어 듣기 인터넷방송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던 세라님은 요즈음도 합창단원, 산악자전거 동호회원, 영어여행가이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영어공부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케런님은 맛있는 전복 버섯 밥을 만들어 가져오셨다. 역사학 교수님인 남편과는 캠퍼스 연인이었다는 모야님은 수원화성 행궁에 관한 모든 것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함께 수원화성과 박물관도 구경한 다음 AK백화점에서 저녁을 먹은 후 실컷 얘기를 나눴다. 봉담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방에 가서 재미있는 시간도 보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보니 밤 11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손님들은 제부도에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집에 오니 자정이 다 되었는데도 제부도에서 돌아오는 야간 운전을 하지 않아서인지 아내는 밝은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다음 공부시간에는 화성 여행 이야기로 꽃을 피우리라. 동년배도 아니고 성별도 다르지만, 그들은 나의 친구임이 틀림없다. 이런 좋은 만남이 구석구석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앞으로도 영어를 매개로 학구적인 친교를 나누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아! 옛날이여
    인문학반에서 강의를 듣노라면,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우님들의 글을 접하며 감동을 하곤 한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설렘과 부끄러움이 교차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유독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시절 우리들의 모습은 누구나 다 비슷한 형편이었을 것이다. 시골에서 늘 일에만 매달리는 부모님에 비하면 그래도 선생님들은 깨끗한 차림에 비교적 하얀 피부와 고운 손을 지녔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황 선생님은 예쁜 얼굴에 하얀 피부가 빛나는 분이셨다. 선생님께서는 음악을 가르치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뒷동산에서 야외 수업을 하실 때도 있었다. 이때 손수건 돌리기 놀이를 했는데 벌칙은 노래 부르기였다. 그때 나는 벌칙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동요가 아니라, 대중가요를 불렀다. 우리 집에 라디오와 축음기가 있었던 덕택에 나도 모르게 대중가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일곱 살 어린 꼬맹이가 유행가를 제법 잘 부른 것이 소문이 나서 그 후 학교에서 나는 노래 잘 부르는 아이로 통했다.       청소시간에는 다른 반 선생님들도 오셔서 노래를 시키곤 하셨다. 어떤 때는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기도 하고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를 유희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소문이 나는 바람에 우리 동네 오빠들이 읍내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여러 번이나 나를 출전시키곤 했었다. 그때마다 상을 탔는데 3등 안에는 꼭 들어서 상장과 함께 양은 주전자며, 와이셔츠 같은 상품을 받아 남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MBC TV ‘유쾌한 청백전’에 직장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땐 방송국이라고 해도 그리 넓지 않은 공개홀에서 5인조 밴드가 반주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혹여 자랑이 되지나 않을까? 망설여지긴 했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며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아 슬쩍 꺼내놔 보았다.   꿈 많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마음에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올 사연, 아니면 발그레 얼굴이 상기될 이야기,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리움을 선사해주는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잘 살아온 인생이고,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9-03-23
  • 억지로 말고 즐기며 할 수 있을까?
    속담에 “하기 싫은 일은 오뉴월에도 손이 시리다”라는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열성이 나오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나도 지난날 업무가 나에게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단체 생활에서 피하고 싶은 책임이 맡겨질 때면, 거부할 수도 없고 곤혹스러워 부담감에 속을 끓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억지로 하면 몸에 해롭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분명하다. 그래서 억지로 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방안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이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그 원숙함 말이다.   나는 억지로 남의 일을 대신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제시하며 스트레스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 한다. 그 사례의 주인공은 성경 속의 구레네 시몬이다. 그는 예수라는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젊은이다.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생각과 모습은 추리하여 기술함을 전제한다.   우선 시몬이란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근처 시골 마을 키레네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유월절 축제를 즐기려고 예루살렘까지 1,600km나 되는 길을 아마도 수개월은 걸려 도착한 순례자로 보인다.   그런데 그에게 엉뚱한 일이 닥친 것이다. 골고다 언덕길에 많은 사람이 웅성대며 늘어서 있기에 헤집고 드려다 보니, 어떤 사람이 큰 나무 십자가를 메고 가다가 지쳐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참담하고 측은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때 느닷없이 로마 병정이 창끝을 그의 어깨에 대고 지명하면서 대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나? 그는 로마의 식민지인이었기에 억울하지만, 그 죄수의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나도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담될 땐 영락없이 억지로 움직인다. 그러면서 “책임과 봉사는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항변하며 못 마땅해 한다.   시몬도 십자가를 지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리라. 과연 그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십자가를 메고 산 정상까지 올라갔을까? 억지로일까? 아니면 자원하는 마음일까?   시몬은 십자가를 대신 지리라곤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나, 예수께 병 고침을 받았거나, 보리 떡이라도 얻어먹은 사람이 십자가를 대신 져야 하는데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시몬은 여행을 즐기려고 돈을 모아 먼 길을 왔는데 알지도 못하는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산 위까지 올라가야 하다니 참으로 억울하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치밀었을 것이다.   자기를 점찍은 로마 군인이 미웠고, 큰 키와 건강한 몸집 때문에 지명 당한 것도 억울하였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 죄수에 대해서도 원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그는 억지로 지게 된 치욕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고 투덜대고 싶었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냥 걸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분노를 삼키고 땀을 흘리며 산을 향해 얼마간 올라가다가 문득 자기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그 죄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그 본질이 무엇인지 자신을 성찰해 볼 때가 있지 않은가?   그는 반사적으로 따라오는 죄수를 원망의 눈초리로 뒤돌아보았을 것이며, 순간 죄수와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죄수의 사랑스러운 눈빛에서 그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억울함과 원망은 경외함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죄수에 대해서 존경심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즐거웠을 것이고, 지금까지 억지로 메고 온 무거운 십자가는 당연히 자기가 져야 할 몫이고 책임이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힘들고 부담되는 일을 헌신적으로 해내는 것을 보면, 그 상대가 싫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 자신의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는가.   우리 역사의 선현 중 이순신 장군은 순국하는 순간까지 책임을 다했던 위대한 분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스스로 해결하였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지도 않았고 책임을 면하려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물을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생각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하는 사람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이유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부담감과 거부감의 차이에 달렸다고 본다.   거부감이 평온함으로, 억울함이 경외함으로 바뀌면서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된 시몬을 상상해보자.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남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펼쳐보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자”라고 생각하면 시야도 더욱더 넓어지고 언어와 표정도 여유롭게 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힘들고 부담된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즐기며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즐기며 하는 일은 그 일 자체로 즐겁고 행복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일을 즐기며 할 때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스트레스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즐겁게 하여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에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어 큰일을 해냈다면 우리 마음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 내 책임이니 기쁘게 해내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여기엔 반드시 겸손과 배려와 사랑이 수반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것은 그 일에 종이 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되고, 부담감과 거부감의 종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에 주인이 되어서 자원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최병우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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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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