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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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충분한 정보와 아집이 빚어낸 확신으로 맞본 오류
    [시니어투데이] 분당에 사는 처제가 전곡항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처제 내외와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전곡항에서 만난다. 활어를 사면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요리해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다 오곤 한다.   횟집 2층 창가에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얼마 전 ‘봉담-송산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는 보도가 있어서 진입로를 미리 찾아보았다. 이 도로를 이용하면 봉담에서 송산까지 30분이면 될 것 같았다. 20분이나 단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도로를 이용할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진입로로 들어서니 새로 닦은 도로라서 깨끗했고 표지판도 산뜻해서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아뿔싸! 며칠 전 내비게이션을 업데이트 했는데도 아직 이 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분 정도를 달리니 ‘마도’라는 출구 표지판이 보였다. ‘마도’에서도 구 도로로 연결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갈까 말까 잠시 갈등을 했다. 아내는 “여기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나는 이 도로가 ‘봉담-송산 고속도로’이니 좀 더 가면 ‘송산’ 출구가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100미터도 달리지 못해 내비게이션에서는 유턴하라는 표시가 나왔다. 헷갈리는 상황에서 달리다가 표지판을 보니 조암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는 모르지만 조암 톨게이트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도착시간이 30분 후로 조정되어 나왔다.   자기 말을 안 들었다고 투덜거리는 아내에게 처제에게 전화해 30분쯤 늦겠다고 전하라고 부탁했다. 이 말을 건네면서도 괜한 아집을 부렸나 싶어서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조암에서 통행료 3천5백 원을 내고 나가서 다시 진입하여 마도에서 구 도로와 만나 한참 만에 전곡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침 토요일인지라 그 넓은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 들어차 주차할 곳이 없었다. 밀려드는 차들은 주차할 곳을 찾느라고 사방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주차를 하고 처제 내외와 전화해서 만났지만 식당은 만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공원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토요일에 만나지 말자고 하며 가지고 간 간식만 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수산물센터에서 매운탕거리만 사서 헤어지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아는 길인 구 도로로 가자고 했다. 하지만 올 때 실수했던 나는 갈 때는 얼마나 빨리 갈 수 있는지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곤 또 ‘봉담-송산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얼마지 않아 평택-시흥 갈림길이 나왔다. 자신이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시흥 방향으로 선택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못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40킬로미터를 달린 후에야 ‘안산’ 출구로 나갈 수 있었다.   “아! 내가 오늘 왜 이러지?” 아내는 또 자기 말을 안 듣더니 이렇게 됐다고 언짢아했다. 아내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할 말이 없었기에 그 후로는 침묵이 흘렀다. ‘안산’에서 빠져나온 후에 50분을 더 달려서 집에 도착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줄리언 반스(Julian Patrick Barnes)가 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구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렇다.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데 감(感)을 믿었던 내가 잘못이었다. 오늘 나는 불충분한 정보와 아집이 빚어낸 확신으로 초래한 오류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우리 시니어들은 젊은이들보다 정보력이나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비게이션 같은 필수적 기기들은 수시로 업데이트하는 등 더 철저하게 대처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짐작이나 예감을 확신하려는 아집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보를 수집하고,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2021-06-21
  • SNS 접속 장애로 겪었던 어려움과 깨달음
    [시니어투데이] 나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밤에는 1시간씩 동호인끼리 영어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전화를 이용하다가 얼마 전부터 화상회의 앱 ‘줌(Zoom)’을 통해서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전부터 줌(Zoom)에 연결이 안 되어 나만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접속 장애 없이 잘 사용했는데 웬일일까? 그런데 연결만 하려고 하면 내 휴대폰의 와이파이 신호가 사라지면서 연결이 안 되었다. 공유기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도,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 접속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서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각종 해결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주일 후에 휴대폰에 와이파이 신호 세기가 강하게 표시되기에 다시 연결해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알 수 없는 장애로 연결이 안 된다”는 메시지만 뜰뿐 접속이 안 됐다. 그날도 나는 허탕을 쳤다. 몇 시간을 씨름하여 교재를 다 번역해 놓고 공부 시간만 기다렸는데 접속이 안 되니 속이 많이 상했다.   이 방면에 능숙한 지인에게 요청해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아내의 휴대폰으로 하면 접속이 잘 되었다. 전화기 때문인 것 같아 A/S 센터에 가보았지만, 휴대폰의 문제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A/S 센터에서 공유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통신사에 고장 신고를 하여 온라인으로 점검을 해보아도 정상이라고 했다. AS기사가 방문을 해서 전파 측정기로 검사하더니 신호가 잘 잡히니 공유기는 정상이라고 했다.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Zoom 연결”, “와이파이 끊기는 문제”를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검색했다. 어디엔가 전화기의 와이파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휴대폰에서 “네트워크 설정 초기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 해서 초기화를 시키고 사뭇 긴장된 마음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연결이 되었다. 2주 동안 못 보았던 동호회 회원들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제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줌(Zoom)으로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휴대폰에 “데이터가 다 소진되어 이제부터는 요금이 부과된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데이터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추가 사용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요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그동안 줌(Zoom)을 연결하는데 와이파이가 아닌 휴대폰 데이터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방법은 공유기를 바꾸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새로 구입한 공유기에는 안테나가 네 개나 달려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공유기 밑면에 비밀번호가 있다고 쓰여있다고 했다. 그 번호를 입력했더니 와이파이 기호가 떴다. 이제 다시 접속을 시도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지금도 전에 사용하던 공유기에서는 아내 휴대폰은 되고, 내 것은 왜 안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디지털 기기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주 애를 먹이지만, 시니어들에게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그러더라도 지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다가 보면 끝내는 해결할 길이 나오는 것이다. 시니어들의 자산은 풍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축적된 지혜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들의 경쟁력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이 또한 시니어들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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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1-06-07
  • SNS 사용에서 주의할 점과 대응 지혜
    [시니어투데이] 며칠 전 새로 들어온 이메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도착하는 이메일은 그중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일단 삭제하고 남은 것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본다.   그중에 한 SNS에 ‘친구 요청’이 있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그 SNS에서 보내주는 이메일 가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요청이 많아 보통은 삭제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Jennifer라는 사람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외국인이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서 열어 보았다. 나의 SNS 계정에 들어와 내가 쓴 글들에 ‘좋아요’ 표시를 여러 번 해 놓았다.   계정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귀엽게 생긴 아가씨다. 군복을 입고 동료들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보였는데 아마 여군인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메시지가 와있어 열어보니 ‘제발 좀 친구로 추가해주세요’라고 한글로 쓰여 있었다. 친구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다시 요청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까짓것 별일이야 생기겠나 싶어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 SNS 계정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기는 시리아에 있는 미국 군인인데 반갑다고 인사를 보낸 것이었다. 나도 반갑다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메일을 열었는데 별도의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자기는 한국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7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라서 군인이 되어 지금 시리아에서 정보통신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시련을 겪어서 힘들었겠지만 씩씩한 군인이 되었다니 장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리아라면 한밤중 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 시쯤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2시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얘기하고 어서 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야간 근무 중이라 괜찮다고 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묻는다.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에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연결하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통화는 안 되었다. 잠시 후에 메시지가 왔다. 군사시설이라서 보안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고 하면서 ○○톡을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더니 ○○톡 아이디를 묻는 것이었다. ○○톡은 아이디가 없이 그냥 이름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아이디라니? 그래서 아이디는 없다고 하니 잠시 후에 자기 아이디를 알려주며 친구추가를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톡 연결이 되었다. ○○톡으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점차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SNS 프로필을 보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다. 자기는 자살폭탄 공격이 심한 이곳에서 군에서 퇴직하여 민간인으로 살고 싶다.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 사촌들과 조부모님도 찾아 정착하여 살고 싶다. 자기를 좀 도와 달라”는 요지의 부탁이었다. 나는 시골에 사는 노인이라서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갈수록 다음과 같은 놀라운 요지의 말을 늘어놓는다. 수색 중에 큰돈을 발견했다. 아마 저항군들의 군자금인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이것을 네 명이 나누기로 했는데 자기 몫은 5백만 달러쯤 된다. 달러가 가득 들어 있는 철제상자와 전투 현장의 사진들도 보냈다.   “한국 정착자금으로 사용할 이 돈 상자를 화물로 보낼 터이니 보관을 부탁한다. 자기는 물건이 도착한 2주 후에 한국에 입국하겠다. 액수의 30%를 수고비로 드리겠다. 주소를 알려 달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도 싫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노인이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제발 도와 달라. 당신이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매달린다.   나는 아침에 아내와 공원에서 조깅한 후 시장에 들려오기로 한 터라 더는 붙들고 있을 수도 없어 그냥 ○○톡을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린이날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내외가 왔을 때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며 ○○톡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이런 사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끔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낯선 메시지는 무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SNS에 프로필을 노출하다가 보니, 편리함도 있지만, 범죄에 악용될 소지도 없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과도한 사생활이나 개인정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SNS가 편리하고 관계를 통해 존재의 힘을 과시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5-21
  • 과학도를 꿈꾸며 2021년 대학 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시니어투데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팬데믹(pandemic)으로 온 세상이 힘들었던 2020년이 저물어가던 즈음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대학에 지원한 외손자의 합격 소식이었다.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외손자가 희망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무척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외손자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과학을 좋아했고, 학교 대표로 출품한 각종 과학 관련 대회에서 자주 입상하여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아이였다. 명절 때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 과학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데 너무 수준이 높아 공대를 나온 나도 대답하는 데 쩔쩔매기가 일쑤였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는 아는 것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사양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큰일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외손자가 중학생 때였는데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서 주방 식탁 한쪽에 실험도구를 차려놓고 화학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외손자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얘가 입원해 있다는 화상 전문병원에 가보니 얼굴과 손이 온통 붕대로 감겨있어 눈앞이 캄캄했었다. 다행히 몇 달 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얘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종이로 만든 우주선을 건네고 갔다. 어느 날 책장에 올려놓은 그 종이 우주선을 보고 소망을 담아 적어 본 시다.   종이 우주선   책장 위에서 발사대기 중인 U-3069호 종이 우주선 언제 창공으로 솟아오를까?   우주과학자가 되겠다는 꽃 같은 우리 외손자 놀러 와 만든 꿈을 기도 속에 키워주었다.   주방 한쪽 너의 작은 실험실에서 들린 폭발음은 먼 훗날 네 종이 우주선이 날아오를 전주곡이었을까.   온통 붕대밖에 보이지 않던 그날 병실에서는 가슴이 내려앉았었는데   이제는 그 꿈 펼칠 나날 그리며 쉼 없이 달려가는 네 모습이 할아버지 마음에서 행복하게 솟아오르고 있구나.   나는 과학도로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될 출발을 앞둔 외손자와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많은 젊은이에게 축복과 함께 기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과학자는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까.   과학 연구에 대한 과학자의 태도는 인류의 삶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통기관의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의 활동 범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질병과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로운 힘이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 로봇 등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활짝 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인류에 대해 남다르게 따뜻한 감성을 지녀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뛰어난 공감력 및 소통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이고 이루어갈 미래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부모와 두뇌 및 신체적 조건 그리고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한 개인은 자신과 인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수한 자질을 지닌 것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그 개인의 영광임과 동시에 인류의 공적 자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삶은 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의 수많은 선행연구자의 연구 성과와 그를 가르쳐준 많은 스승 그리고 국가적 지원 등 주변의 다양한 도움도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과학자들은 남다른 시대적 사명을 지녀야 하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고 그에 따른 사명감과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남다른 자질을 지닌 사람은 그만큼 영광도 크기에 그에 따른 사명감을 보람으로 여기는 넓은 마음과 안목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수한 자질을 바탕으로 뜨거운 열정과 큰 노력으로 이루어낸 대학 입시 결과로 과학도로 출발할 시점을 앞둔 모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자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1-11
  • 차량용 빗물받이 교체, 직접 해결하다
    [시니어투데이] 언제부터인가 내 차의 조수석 뒤쪽 좌석 창문 위에 달려있던 빗물받이가 한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했지만, 중요한 부품도 아니어서 그대로 타고 다닌 지가 1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좁은 길을 지나는데 물건을 내리려고 주차하고 있던 화물차 기사가 갑자기 뒷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내 차의 조수석 백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놀라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려서 보니 앞바퀴 윗부분과 그쪽 문에도 흠집이 생겨있었다. 물론, 화물차 기사가 100%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하여 그쪽 보험사의 부담으로 수리를 다 마쳤다.   수리를 마치고 며칠 후에 보니 조수석 창문에 부착되어있던 빗물받이도 일부가 깨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고로 깨진 것이 확실하지만, 뒤늦게 청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알고 나니 눈에 거슬려 과감하게 새것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집 부근의 카센터에 가서 교환을 부탁했더니 일을 맡지 않으려 했다. 차량용 부품점에 가면 부품을 살 수 있으니 거기에서 사서 붙이라는 것이었다. 수리비를 많이 받을 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센터에서 알려준 곳으로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차량용 부품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차량용 빗물받이를 검색하니 차종별로 많은 제품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서 내 차에 알맞은 빗물받이를 선택하여 주문했더니 며칠 후 물품이 도착했다.   택배로 도착한 빗물받이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파손된 것을 떼어내기만 하면 나도 쉽게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단단히 붙어있어 조각이 떨어져 나가도 일부는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수리를 의뢰하러 카센터로 갈까 하다가 좀 더 해 보기로 하고,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글로브 박스(glove box)에 넣어두었던 드라이버를 몇 년 만에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기온도 낮았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힘을 내서 드라이버를 틈새로 끼워 넣는 등 한참 동안을 씨름해서 겨우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새로 산 빗물받이에는 양면 접착테이프가 붙어있었고, 그 표면에서 보호용으로 부착된 종이를 떼어낸 다음 적당한 위치에 단단히 붙였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그동안 깨어진 빗물받이를 달고 다녔던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은 차량용 이외에도 소비자가 손쉽게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용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불편함을 처리하고 발전적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시니어들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체력과 역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시니어들에게는 일평생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지 않은가.   장비를 쓰는 것이나 조작과 사용이 편리하게 만들어진 용품들이라면 이를 하는 데에서는 힘보다는 지혜가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의 강점이고 더욱더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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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발의 추억
      조카 결혼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아침 일찍 동네에 있는 이발소에 갔다. 동생 아들이 결혼식을 하는 날이기에 큰아버지로서 단정한 모습으로 식장에 가기 위해서다.   내 딸, 아들은 모두 결혼했으니, 조카의 결혼식이 무척 반갑기 그지없다. 설 명절에도 이날을 위하여 이발을 미루었다. 이발소에 당도하니, 70세가 넘은 듯 보이는 이발사가 청소하고 있었다.   방금 문을 열었나 보다. 얼마 전부터 단골로 다니고 있기에 이발사도 나를 안다. ”오늘 잔칫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왔어요.“ 잘 알겠다며 내게 흰 가운을 둘러주더니 세심하게 머리카락을 잘라 나간다. 가위질 소리에 선잠이 든 가운데 아련하게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동네에는 이발소가 없었다. 그만큼 시골이었다. 동네에는 6·25 동란 후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수용소’라는 곳이 있었다. 여기에 이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이발을 하러 가면 작은 원형 의자에 앉혀 놓고 바리캉으로 머리털을 밀어 댔다. 바리캉은 이 기계를 만든 프랑스회사가 ‘바리캉 마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잘 들지도 않는 바리캉이 머리 위에서 움직여나가면 머리카락을 뜯어내는 것처럼 너무 많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이발사는 그러한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너 머리 언제 감았어? 머리에 쇠똥 따지 켜켜이 붙어 있네”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발할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곤 했기에 이발하러 갈 때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머리를 감곤 했었다. 그래도 그 소리는 항상 나왔다. 이발 요금은 얼마였는지, 무상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쇠똥은 머리를 감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옆에 있는 이발소에는 늘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곤 했었다. 여기에 들어서면 머리 모양은 ‘상고머리’와 ‘빡빡머리’ 두 가지 중에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항상 ‘빡빡머리’를 깎았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우리 동네에도 이발소가 생겼다. 이발소의 이름은 “가보게 이발관”이었다. 상호를 왜 그렇게 하였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 당시에 시골 동네에서는 사람들이 모일만한 장소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이발관이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았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어엿한 직장인인데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달에 얼마씩 돈을 주고 매일 출근길에 ‘가보게 이발관’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다녔다.   매일 아침 나는 이 이발소에 들러 고대기로 머리를 납작 누르고 기름도 발랐다. 그 당시 찍은 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무슨 공작새 같기도 하고 매우 이상해 보인다.   예비군 훈련을 가면 복장 검사와 용모에 대해 점검을 하였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정없이 머리털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70년대 말 수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경기도청이 소재한 큰 도시라서 이발소도 많았다. 이발소도 등급이 있었다. 머리만 잘라 주는 곳, 면도까지 해 주는 곳, 안마에다 손톱까지 잘라주는 곳도 있었다. 그때에는 이발비가 비싸지 않았다. 겉멋이 좀 들었을 때는 안마까지 해주는 곳에서 이발한 적도 있다.   세월이 좀 지나자 퇴폐 이발소가 등장했다. 우리 동네에도 그런 곳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꼭 불법, 부정, 퇴폐 같은 것들은 독버섯처럼 정상의 틈새에 끼어 피해의 온상이 된다.   요즘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발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겨우 두 군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남자들도 대부분 미용실을 찾기 때문이다. 나도 두서너 번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아봤지만, 면도까지 해야 이발한 기분이 나는 나로서는 미용실과 더는 인연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발소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 대부분 노인이다. 아직은 노인들 틈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정서인데 방법이 없다.   이날 나는 이발과 함께 깨끗이 면도까지 했다. 거울을 보니 더부룩하던 얼굴이 깔끔하고 산뜻해 보였다. 이 정도면 조카 예식장에 가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하다.   문득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발했을까 생각을 해보니, 1년에 10번만 잡아도 천여 번을 향해 가고 있다.   조카 결혼식에 가려고 좀 신경을 써서 이발하다가 보니, 머리 모양에 내 삶의 여정을 비춰보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지만, 그 시절의 추억이 어린 이발소가 눈에 어른거리며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취재위원 이태호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3-02
  • 요양보호에 헌신한 배영웅 원장이 사는 삶의 향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일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어야 한다.   봄이 더욱더 기다려지는 겨울의 끝자락에 서울시 양천구에 있는 ‘사랑나눔복지센터(원장 배영웅)’를 찾았다. 입구에서는 오가는 시민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준비로 분주했다. 그 모습에서 복지센터의 이름에 ‘사랑’과 ‘나눔’을 넣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배영웅 원장의 생각은 온통 사회복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쉴 새 없이 사회복지에 대한 비전과 현실적인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진단하고 대안과 비전을 쏟아냈다.     ‘사랑나눔복지센터’에서의 주요 업무는 요양보호사를 교육하고 파견하는 일이다. 요양보호를 해야 하는 어르신을 간호하고 돌보는 서비스를 진행하는 최전방 복지센터라고 할 수 있다.   요양보호사들은 요양보호에 필요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한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센터를 통해 요양보호를 요청하는 가정을 방문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휠체어 이동, 신체활동, 마사지, 몸 관리, 욕창 예방, 낙상 방지를 기본으로 가사서비스와 정서 활동까지 제공하게 된다.   이런 서비스는 자식이라도 날마다 하기는 어려운 일들이다. 국가에서 이런 복지체계를 마련한 것은 매우 다행하고 바람직하다.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매우 필요한 복지정책이다.   ▲ 배영웅 원장(사랑나눔복지센터). 배 원장은 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사회복지와 요양보호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 냈다.     배 원장은 이런 좋은 제도가 현실적인 이해부족으로 겉돌고 있다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요양보호사들의 열악한 처우가 국가의 최저임금제와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요양보호사들의 활동을 위축시켜 요양보호 수급자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급자들을 돌보는 시간을 줄여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려는 것은 매우 단기적이고 임시방편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요양보호는 사회복지에서 한 부분에 속하는 좁은 영역이다. 국민 대다수가 관심을 쏟는 분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포퓰리즘적인 발상에서만 처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양보호사 직무교육   요양보호 수급자나 가족들의 처지에서는 매우 급하고 절실한 문제다. 이런 문제에 봉착한 당사자나 가족은 삶이 붕괴할 수도 있는 엄청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은 수급자들이 가져야 할 인식에서도 전환이 필요하다. 요양보호서비스를 선용해야 하는데 요양보호사들을 가사도우미처럼 활용하려 든다면 스스로 제도를 망치는 것이다. 마음대로 부리는 하인 취급을 한다든지,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함부로 대하고 교체를 요구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요양보호사의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요양보호사는 국가의 복지정책을 수행한다는 마음과 수급자를 부모와 같이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과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 요양보호사들은 요양보호에 필요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한 전문가들이다.   요양보호센터는 국가를 대신해 요양보호서비스를 수행하는 비오톱(biotope·다양한 생물들이 군집하는 서식처)이다. 이런 곳이 서서히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우리는 요양보호센터라는 복지의 비오톱이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한다. 국민 모두는 자신도 수급자나 그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이 시스템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어디 요양보호에 관한 문제뿐이겠는가?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일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어야 한다. 사회라는 말에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요양보호사는 국가의 복지정책을 수행한다는 마음과 수급자를 부모와 같이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과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배 원장은 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사회복지와 요양보호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 냈다.   전직이 궁금해서 물었더니, 특전사에서도 특수임무를 띠고 국방의 의무를 다한 예비역 소령이었다. 아직도 군에서 얻은 질병의 후유증을 달고 산다는 배 원장은 투철한 국가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배 원장은 요양보호에 대해서도 군 복무 시절 못지않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사랑나눔복지센터’는 최고의 서비스를 위하여 욕구사정과 그에 따른 케어플랜으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2015년 장기요양기관 평가 최우수기관으로 선정   이런 결과로 장기요양보험 실시 이후 두 번의 평가에서 모두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효의 실천과 장기요양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학생체험 인턴제도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니어 인턴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요양보호에서 그치지 않고 매주 무료 급식에서 100여 명의 어르신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등 삶의 총체적 의미로서의 사회복지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 학생들에게 효의 실천과 장기요양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학생체험 인턴제도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니어 인턴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되던 2008년부터 기관을 운영하는 배 원장은 제도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해 사단법인 정보나눔회의 설립을 주도하여 이사로 섬기고 있으며, 서울시 장기요양기관 수석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장기요양기관의 “권리보장과 급여 수준의 적절성, 서비스에 대한 용이성과 불평등 문제”를 과제로 삼아 정책 토론을 주도하는 등 장기요양기관의 발전, 요양보호사의 권익과 처우에 대한 꾸준한 노력으로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표창과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기도 하였다.   문화사회복지팀   
    • 인물이야기
    2016-02-29
  • 노후와 귀농, 귀촌
      관련기사들어가기 클릭   노후준비는 인생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취업이나 결혼에 비하면 노후준비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라도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다. 그때그때 준비하는 만큼 여유 있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았던 곳으로 머리를 둔다고 한다. 이에 빗대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한다. 노후준비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귀농이나 귀촌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무턱대고 준비 없이 귀농이나 귀촌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첫째는 경제적인 문제가 없어야 한다. 매월 들어야 하는 생활비며 용돈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주거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전기, 수도, 냉난방도 포함된다. 주거에 과도한 비용이 들어서는 곤란하다.   셋째는 원주민들과의 융화다. 이웃으로 사는 사람들과 이질적인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급속하게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넷째는 농어촌이나 시골을 좋아해야 한다. 모든 일의 성공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더욱더 가까워진다. 아울러 교통과 자연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듯이 기왕이면 교통도 좋고 아름다운 자연과도 벗할 수 있는 곳이라면 최상이다.       이런 요건을 전제로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장소를 물색해야 한다. 해당 지자체나 관련 단체에서 실시하는 귀농, 귀촌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필요한 지원과 관련 정보를 챙겨야 한다.   성공적이고 차별화된 귀농, 귀촌하려면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적극적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20
  • 엉뚱한 카드 사용명세표가 가져다준 교훈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의 통신함에 들어 있는 편지봉투 몇 개 들고 올라왔다. 먼저 카드회사에서 온 카드사용 명세표가 들어 있는 봉투를 뜯어 읽어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달 사용 청구액이 87만 원이나 되었다. “한 달에 많아야 30~40만 원이 보통이었는데 87만 원이라니?” 지난달 그렇게 많이 사용한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명세표를 받으면 으레 합계금액만 대충 훑어보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아니다. 명세표에서 우선 큰 금액부터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남양주 오남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35만 원, 수원의 백화점에서 15만7천 원 사용, 할부금이 4만8천 원, 100만 원짜리 제품 12개월 할부 구매에 대한 6개월째 할부금이 8만3천 원 등이었다.   쇼핑몰에 갔던 적은 있는데 아내가 옷을 산 기억은 없다.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작년에 우리가 100만 원짜리 전자제품 산 것이 있었나?” 아내가 펄쩍 뛴다.   “그런 게 전혀 없는데, 아니 사지도 않은 청구금액이 6개월이나 은행에서 빠져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어요?” 대꾸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카드정보가 유출된다는데 내 정보도 유출되어 복제카드가 만들어진 것일까? 순간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스쳐 갔다.       일단 은행계좌에서 내 돈이 빠져나가면 일이 더욱 복잡해지겠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카드회사에 빨리 연락하여 인출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허겁지겁 카드회사 전화번호를 찾고 있는데 집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여보, 이 우편물 주소가 403호로 되어 있잖아요?” “뭐라고요?”   아뿔싸, 봉투를 보니 수신인이 403호 허 아무개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체국 직원이 이웃집 청구서를 우리 집 우편함에 잘못 넣어 놓은 것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렀지만, 이 나이에 다시 한 번 얻은 교훈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심정으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좀 놀라고 당황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사고가 아니었으니, 없었던 행복을 하나 얻은 것 같아 그날 이후 더욱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취재위원 김상태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19
  •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
      기다리던 목요일 인문학 시간이 되었다. 강의안을 받아 드는 순간 마음을 스치는 아름다운 향기가 얼굴에서 미소로 피어올랐다.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는 문구가 온몸을 전율케 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열심히 살았으나 보상은커녕 억울함을 달랠 길 없어 허탈해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어떤 때는 남의 일같이 않아 동병상련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나의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아득하고 어떻게 그 험한 날들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무도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마다 나의 삶은 왜 이렇게 어려워야 하는지를 수도 없이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계셨고 8개월이 못되어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가계는 급속히 기울었다.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오빠 등에 업혀 동네를 돌아다니며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어야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를 제대로 한 번 불러보지도 못했다.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하고 부르며 달려갈 때면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밤이면 마당에 나가 아버지를 부르며 하늘을 향해 목 놓아 울곤 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서른한 살에 과부가 되어 남매를 기르며 사시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철이 들어서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시절 나에게 소리치고 야단치는 어머니를 보면 너무도 서럽고 야속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계모인 줄 알았다.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두웠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젖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나는 체질적으로 약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한 번씩 더 쳐다보며 안쓰럽게 생각하곤 했었다. 학창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조회 때나 체육 시간에도 빈혈로 쓰러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녔다.   ▲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어두웠고 추운 겨울과 같았다.     내가 20대였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후 오래지 않아 올케도 돌아가시더니 오빠도 세상을 떠났다. 처녀인 내 손으로 이 세 분의 상을 치렀다. 그리고 오빠의 사 남매가 나에게 남겨졌다. 그 아이들을 이곳저곳으로 보내어 먹고 사는 길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 조카를 어떻게 할 수 없어 보육원에 맡겼다. 막내 조카를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온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워 울어야 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돈도 없었고 쇠약해진 나의 몸으로 세상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신경쇠약에 빠진 나는 약 없이는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젊은 처녀의 몸으로 세 명의 장례를 치르고 조카들까지 다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되니 세상이 나를 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신도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서른셋 나이에 나에게도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만성 신우신염과 합병증 그리고 위궤양에 간은 굳어져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돈도 없었다. 집도 없고 건강도 없는 나는 하늘 아래 버려진 몸이었다.   먹을 수도 없고 한 걸음을 걷기도 힘들었다.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나는 언제 저렇게 걸을 수 있을까 하며 얼마나 울었던가? 그런 나를 하나님이 깨끗이 고쳐 주셨다. 이후 하나님의 손길은 나름대로 사람 노릇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셨다.   그 후 삼십 년의 세월을 살면서 다섯 번이나 수술했다. 나의 일생은 질병이라는 친구와 함께 하는 여정이었다. 심지어 수술하다가 성대를 다쳐 말을 못 했던 적도 있었다. 왜 이다지도 나의 인생은 거칠기만 할까?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그런 인생일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꽃피고 새가 지저귀는 아름다운 봄날을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항상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겨우살이를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그렇게도 잘못해서 이런 죗값을 받는 걸까?   ▲ 따뜻한 봄날 꽃이 만발하여 모든 사람이 환성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분은 변함없이 늘 내 곁에 계셨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나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계시지 않았다.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도 나를 건져주시고 안아주셨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마다 나를 업고 가셨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과 믿음을 얻으면서 더는 살얼음판 위 같은 삶에서 위태한 내 삶이 깨어질까 봐 염려하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의 성대를 다시 돌려주셨고 유방암도 고쳐주셨다. 다시 건강을 찾게 하셨다. 이제는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몸도, 마음도, 나의 영혼도, 나의 물질도, 나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쌓이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고 인생의 봄날도 다가왔다.   이제 신체적으로는 나이가 들었다. 일터를 떠나 조용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번민이 찾아온다. 어떻게 해야 인생의 마지막을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고민에 빠져 복지관을 찾았다. 복지관에서 건강관리, 봉사, 취미생활 등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운다. 봉사자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는 아침 일찍 셔틀버스를 타고 복지관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탁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배운다. 합창단에서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노래도 새롭게 배운다. 라인댄스도 해본다. 그중에 가장 흥미 있는 시간은 인문학 시간이다. 나의 행복을 찾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더는 흘러간 세월을 다시 가지고 와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 그렇게 나의 일생을 춥기만 한 모진 겨울을 살게 했느냐고 하나님께 푸념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미웠던 것도 억울해하던 것도 그리고 원망했던 것도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누구나 한번 왔다가 돌아가야 할 저 고향에 두려움 없이, 후회할 것 없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40여 년 전에 들었던 마틴 부버의 이야기가 오늘 인문학 시간에는 놀라운 깨달음 가운데 새롭게 다가온다.   ▲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     나는 옛날을 회상하며 지금까지 지내온 날은 나의 오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문학 시간은 지금까지 내 삶이 겨울이라고만 여기며 춥게만 느꼈던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시간은 나 스스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내 일생에서 최고의 봄날이요, 정오라는 것이 피부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지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웃기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즐겁게 지낸다. 이것이 따뜻한 봄날이 아닌가?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 앞에서 늘 아파했던 내가 이제는 꽃 피는 봄날, 정오인 지금을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노년은 저무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정오’다”는 말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따뜻한 봄날 꽃이 만발하여 모든 사람이 환성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그 봄날 지금까지의 내 삶을 토대로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모두와 가장 아름답고 벅찬 봄의 향연 속에서 최상의 기쁨을 노래할 것이다.   취재위원 유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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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6-02-17
  • 잃어버렸던 상품권을 찾아서 얻는 기쁨과 교훈
      집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큰아들이 경영하는 식당이 있다. 식당에서는 소각이 가능해 폐기된 서류나 영수증도 여기서 없애 버리면 된다.   며칠 전 이런 종이를 비닐봉지에 담아 가져갔다. 폐기할 종이를 모아 갖다 주었던 내가 이른 아침 아들네 식당으로 전화해서는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종이를 태웠는지를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막 태우려고 하는 데요”라고 돌아오는 대답에 “아주머니! 그 종이에 불붙이지 마세요!”라고 소리를 쳤다.   사업자는 6개월 간격으로 부가가치세 신고를 한다. 그때마다 서류정리를 해 왔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세금계산서나 각종 영수증을 한두 시간 정도 분류하는 것인데, 이것을 두고 아내는 나를 차분하고 꼼꼼한 남편이라고 한다.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45년을 살아왔기에 익숙하다.   방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수납장 서랍에는 각종 서류가 가득 들어있다. 6개월간 생활하면서 모은 각종 영수증, 상품권, 응모권, 통지서 등 그때마다 생긴 것들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 넣어두었기에 좀 복잡하다. 며칠 전 그날도 방바닥에 앉아 서랍을 꺼내 놓고 돋보기를 쓴 채 차분하게 잘 분류하여 정리를 마쳤다. 필요한 것은 골라 보관하고 나머지 쓸모없는 것은 거실에 있는 작은 쓰레기통에 시원하게 구겨 넣었다.       이틀이 지난 아침이었다. 오늘은 온천욕을 마치고 마트에 들러 쇼핑을 하기로 했다. 아내가 작년에 쓰고 남은 상품권을 챙겨보라고 말하기에 엊그제 서랍을 정리할 때 본 것 같아 찾아보니 없었다. 이런 것 보관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아내가 가끔 말하는 차분하고 꼼꼼한 남편이라는 핀잔 같은 칭찬에 꼼짝없이 내 책임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승용차를 다 뒤져도 없다. 혼자서 요란법석을 떠는 내 모습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아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머쓱하며 상품권이 없어졌다고 했다. 집 안 구석구석을 다 찾아봐도 없다. 왜 죄 없는 그 서랍을 열 번도 더 열어 봤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기대해 보는 것은 거실에 있는 쓰레기통뿐이었다. 나이 먹은 탓에 분별력이 떨어져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기대하고 열어보았지만, 쓰레기는 하나도 없고 깨끗했다.   아뿔싸, 그저께 식당에 가져다 버린 것이 아닌가! 벌써 이틀이 지났으니 분명히 태웠으리라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전화를 해보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마음이 조급해서 자동차를 타고 가보려다가 그만두고 집 안 구석구석 더 찾아보며 계속 전화를 했다.   순간적으로 성경의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애타게 찾는 이야기다. 한 드라크마는 무게가 4.3g의 고대 그리스 은화인데 장년 하루 품삯이라고 한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상품권과 비슷한 것 같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서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다가 끝내 찾아낸 후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잔치하며 즐겼다는 내용이다. 한 드라크마는 값어치로 따진다면 사실 별것이 아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관습에서는 약혼식 때 남자 쪽에서 여자에게 열 드라크마를 예쁜 줄에 꼬아서 선물하고 선물을 받은 신부는 그것을 머리에 장식하여 결혼식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만일 그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파혼까지 가는 매우 귀한 증표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중에 하나를 잃었으니 이 여인은 꿈속에서라도 잃은 그것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여인이 빗자루로 온 집안을 쓸면서 열심히 찾다가 결국 찾아내고 잔치를 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이 여자 주인공처럼 상품권을 찾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소각하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계속했다.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 다짜고짜로 물어보니 태우려고 하는 중이란 것이다. “그것에 불붙이지 마세요!” 고함에 가까운 나의 외침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태우지 않은 것을 확인하니 마음이 놓이고 정신이 바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온천욕을 하기로 한 것이 생각나서 목욕 도구를 챙겨 소각통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종전 같았으면 벌써 태워버렸을 것이 이틀이 지난 채 신기하게도 그대로 있었다.   나도 모르게 태우지 않은 사람과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준 종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곳에 상품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윽고 널려진 종이를 뒤적거리며 찾아보았다. 꾸겨졌지만 봉투에 담긴 상품권 7장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수십억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마음이 이렇겠지 하면서 나는 기뻐서 탄성을 지르는데, 아내는 나보고 칠칠치 못하다고 눈을 흘기며 비웃음으로 빈정댔다. 아내의 그 모습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계획대로 온천욕을 마치고 쇼핑대금 6만 원을 상품권으로 기분 좋게 결재하고 집에 왔다. 그런데 문득 35여 년 전 농촌진흥청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던 지인이 복권 100만 원에 당첨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최고 당첨금이 1억 원이었으니, 꽤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분은 반듯한 성품 탓에 허튼소리를 별로 안 했다. 그 부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지만, 남편이 들통을 내 버렸다. 말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직장에서 공개적으로 자랑했더니 한턱내라는 성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당첨 턱을 내느라고 당첨금보다도 돈이 더 들었는데도 기뻤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내에게 물으니 “좋기는 하지만 잔치는 뭘?” 이렇게 말해놓고 내 눈치를 보더니 “그래요. 당신 맘대로 해요.” 하며 말을 돌렸다. “나도 잔치를 해보자. 나는 자발적으로 해 보자”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금방 빗나가고 말았다. 식당을 하는 큰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돈은 나중에 줄 테니 식자재 좀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곧 시장에 나가서 주문한 대로 사고 보니 남아 있던 상품권을 주고도 돈이 조금 모자랐다. 벌써 여러 번 이렇게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받아본 일이 없기에 잔치고 뭐고 다 틀렸다고 생각하니 너털웃음이 나왔다. 비록 이웃과 잔치는 못 했지만, 잠시나마 베풀 생각을 했던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졌다.   100세 시대에 내 나이는 많은 것도 아닌데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해야겠다. 신중한 것은 꼭 필요한 자세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조금의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으로 큰 화를 입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행운이 따라야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사소한 것에서도 감사하며 덕을 쌓는 삶을 살면 어려움에서도 전화위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취재위원 최병우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13
  • 아내 병간호에서 얻은 깨달음
      2015년 12월 10일 겨울답지 않게 추위도 없이 지나는 평범한 목요일이다. 인문학 수업을 마치고 복지관에서 점심을 먹은 후 왠지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도 안 마시고 곧장 집으로 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음식 타는 냄새와 더불어 연기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사람이 난간 문을 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가스레인지에서는 찌개가 타서 나는 연기와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화를 버럭 내면서 “주방에서 무엇을 할 땐 지켜봐야 한다고 했는데, 딴전을 피우다가 불을 낼 뻔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문이란 문은 다 열어 젖히고 연기와 냄새를 빼냈다.   그런데 집사람이 방에 들어가서 웅크리고 아파서 애를 쓰면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방 뒷문을 열다가 넘어졌다고 하면서 다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 하겠다면서 애를 쓴다.   내가 안아서 일으키니 서지 못하고 주저앉는 게 아닌가? 아뿔싸 넘어지면서 다리가 골절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급히 끌어안고 지하주차장까지 내려가 차에 태우고 동네 정형외과로 갔다. 업으면서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는데 아파서 만지지를 못하게 한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담당의사가 넓적다리관절이 골절되었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넓적다리관절 전문치료병원을 소개해줬다. 병원 구급차를 불러서 해당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촬영과 각종 검사를 실시했다. 바로 수술을 해 달라니까 다음날까지 지켜보자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원장을 만나서 수술계획을 듣자고 하니 내과 의사가 심장과 폐에 이상이 있어 곤란하다고 하고, 마취과 의사는 너무 허약해서 마취가 곤란하다고 하면서 미적거린다. 다시 내과 CT와 골다공증 검사 등 추가 검사를 했지만, 결론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 그렇다면 대학병원으로 보냈어야 할 것 아니냐.   문제는 마취하면 혈압이 떨어지고 수액 주사를 하면 심장과 폐에 무리가 가서 어렵단다. 어찌 되었든 최선을 다해서 수술을 해보자고 의논해서 다음 날 10시로 일정을 잡았다. 마취는 하체 위주로 약하게 하고 심장과 폐를 살피며 합동으로 수술하기로 했다. 집사람도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했다.   수술실 문밖에서 지켜보는 나는 얼마나 길고 지루하며 초조했던지 모른다. 모든 수술환자의 보호자가 내 심정과 같으리라. 이번이 세 번째 수술이다. 먼저는 척추협착증 수술, 두 번째는 대장수술, 이번은 넓적다리관절 수술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내가 너무도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나는 군 생활로 타지에서 근무하고 애들 셋을 키우며 공부시키느라고 고생고생하며 살아온 여인인데 왜 이리도 아픈 곳이 많은가! 모든 게 내 잘못이고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하는가 싶은 게 나 자신이 밉고, 집사람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생각이 나를 옥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수술이 잘됐다고 한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른다.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야윈 얼굴에 힘없는 모습이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한다.   아내가 여러 번 수술하기는 했지만, 이번같이 길게 느껴 보긴 처음인 것 같다. 병실에 들어와 꼼짝 못 하고 누워있어 내가 옆에서 24시간 일일이 돌봐주어야 하는 것은 나뿐 아니고 같은 병실환자 보호자 모두가 똑같은 형편이었다.       다른 것은 다 하겠는데 잠자리가 고역이었다. 보호자가 잘 수 있는 게 좁은 평의자 하나였다. 그것도 키가 큰 내게는 맞지 않았다.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 마치 관속에 드러누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제가 또 하나 생겼다. 내가 잘 때 코를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병실 사람들이 잠을 못 잔단다. 죄송하다고 하면서 침대에 머리를 대고 뒤척이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이렇다 보니 무척 힘들었다. 문병을 오면서 애들이 가져온 것, 내가 산 것을 나눠주고 얼버무리며 양해를 구해 위기를 잘 넘겼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코 고는 소리에 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50여 년이 넘게 함께 살아온 집사람이 어떻게 견디고 살았을까 싶었다. 이 또한 집사람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럭저럭 병원생활 20여 일 만에 병원조치는 끝나고 퇴원해서 집에서 2주에 한 번씩 외래진료를 받으면서 부러진 뼈가 완벽히 붙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부터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병원에서는 삼시 세끼 식사는 주니 간식과 반찬만 구해서 주면 되고 소변은 소변 주머니로 들어가고 대변만 받아서 정리하면 되었다.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간호사나 옆에 있는 환자 보호자에게도 부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다 챙겨야 하다 보니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우선 끼니때 마다 식사 준비하기가 보통이 아니다. 밑반찬이야 시장, 마트에서 사다가 해결하면 되고 밥이야 전기밥솥이 있으니 쌀 씻어서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만, 국과 찌개를 끓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애들이 보낸 전복을 죽을 쑤려니 만만치 않아 할 수 없이 노인정 할머니들에게 부탁했다. 사골은 내가 전에도 고아 먹었으니 해결했다. 순두붓국은 식당에서 사다 끓여 주었다. 국은 마트에서 파는 것으로 하려니 그것은 입맛에 안 맞는다고 한다. 노동보다 입맛에 맞게 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욱더 힘든 문제였다. 다시 한 번 주부들의 살림살이 고충이 얼마나 크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직접 당해 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깨닫지 못했을 텐데, 주위의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의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모든 것(세면, 양치질, 대소변 가림 등)을 돌봐주는 장애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옆에만 지켜볼 수 없어 아내는 방에 두고 나는 거실에서 책이나 TV를 보았다. 그럴 때도 수시로 나를 찾는다. 요리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불러도 잘못 알아들을 때가 있어, 종을 하나 살까도 생각했는데 집에 있는 바가지를 효자손으로 두드리니 해결되었다. 효자손이 등 긁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위의 필요한 것을 끌어당기는 데도 아주 유용했다.   이번 일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기도해 준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오늘(2016년 1월 23)로 43일이 지나갔다. 그래도 요새는 누운 상태에서 혼자 앉기까지는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식사 후 양치질, 세숫물 준비 버리기, 청소 빨래 등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를 모를 지경으로 보내고 있다. 언젠가는 옛날과 같이 건강하게 걷고 움직이고 복지관에 가서 기체조, 요가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희망을 품고 오늘도 정성껏 간호하며 보낸다.       오늘은 외래진료 날이다. 아침 일찍 휠체어로 주차장에 가서 차를 타고 가서 진료받았다. 이제부터는 보조기를 가지고 조금씩 걷는 연습을 하면 따뜻한 봄에는 마음대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집사람의 얼굴에 환한 희망의 미소에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그래 춘삼월이면 정상으로 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나도 무척이나 기뻤다.   집에 와서는 바로 의료보조기 가게에 가서 고령자용 실내 보행차를 사서 시험을 해 보았다. 한 달 반 만에 움직이는 것이다. 아내는 힘이 들었지만 희망을 품고 걸음마를 해본다. 제발 빨리 건강이 회복되어 같이 구경도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사 먹으면서 지내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나를 아는 모든 분이 염려해줌에 감사하면서 오늘 하루를 보낸다.   나라도 건강해서 집사람을 돌봐 주는데 감사하며 혼자서 사시는 분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자식이 많아도 다 제 먹고살기에 바빠 직장에 나가고 각자 일이 있어 돌봐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부부가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빨리 완쾌되어 함께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매일 매일을 희망차게 보내려 노력하고 있다.   배영환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2-04
  • 산촌 주민들의 선한 사마리아인
      손 목사 부부의 삶은 마을 사람들과 이웃에게로 말없이 울려 퍼지는 감동이고 향기였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 고양산 자락에는 수줍은 듯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고양교회가 보인다. 정선읍에서도 34km나 떨어진 곳에 있다.   고양리에는 다섯 개 마을(하승두, 노나무골, 숯터, 하일, 상승두)이 의좋은 오 형제처럼 모여 있다. 산촌의 주민은 노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고양리도 마찬가지다. 산촌이라서 교통도 불편하고 생필품을 구하는 것도 편리하지 않다. 의료적인 면에서는 더욱더 열악하다. 몸이라도 아프면 병원으로 신속하게 이동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해줄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산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 고양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고양교회     고양리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된 손호경 목사 부부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도 강도 만난 이웃을 못 본 척하고 제 갈 길이나 갔던 사람들이 될까 봐 두려웠다고 한다.   손호경 목사와 아내 유용운씨는 고양리에 39.6 제곱미터(㎡)의 작은 교회를 짓고 목회를 시작했다. 손 목사 부부의 목회는 ‘동네 일꾼, 아들·며느리’로 살기였다.   반장도 맡아서 마을을 섬기며, 시장 봐 드리기, 병원에 모시고 가기, 집안 살펴드리기 등 고양리의 큰아들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유용운씨는 복음 가수로 활동하던 일들을 뒤로하고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다. 그녀의 작은 소망은 작고 아담한 야외 음악당을 곁들인 교회를 지어 수시로 산골음악회를 여는 것이다. 가스펠 송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하늘의 평화를 전달하고 싶다는 그녀는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붕어빵도 굽고 있다.   ▲ 유용운씨는 야외 음악당을 곁들인 교회를 지어 수시로 산골음악회를 열기 위해 붕어빵을 굽고 있다.     산촌에서 마을을 가꾸고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행복하고 보람 있는 목회라고 생각하는 손 목사 부부의 환한 미소는 산골짜기에 핀 아름다운 분홍빛 진달래를 닮아 있었다.   고양리 100여 명의 주민과 행복한 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손 목사 부부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손 목사 부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밀레의 ‘만종(晩鍾)’이 생각났다. 수천 마디의 말은 없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평온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처럼 손 목사 부부의 삶은 마을 사람들과 이웃에게로 말없이 울려 퍼지는 감동이고 향기였다.   정선 이주형 시민기자   
    • 인물이야기
    2016-01-11
  •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펼치는 제2의 인생 향연
      글을 쓰며 커피를 볶고 차를 파는 카페를 운영하며 노년을 음미한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남평리에 들어서면 멀리에서부터 반갑게 길손을 맞이하는 목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의 주인장 안영훈씨는 서울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사람이다. 안씨는 이곳에서 글을 쓰며 커피를 볶고 차를 파는 카페(들꽃 향기)를 운영하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삶을 시작한 셈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삶을 시작했으니 삶이 곧 글이 된다.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울림, 이 모든 것이 향기이고 글이 되는 안씨의 하루하루는 산골짜기에 새겨지는 시가 되기도 하고 편지가 되기도 한다.   ▲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에 들어선 목조건물의 ‘들꽃향기’ 카페     순박한 사람을 만나 허물없이 마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면 정선 아라리가 알알이 스며있는 남평리 ‘들꽃 향기’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아래로는 임계천과 오대천이 유유히 흐르고 아라리를 노래하는 듯 서 있는 푸른 소나무들로 가득한 산들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들꽃 향기’에 들어서면 어떤 마음의 상처도 치유될 것 같다. 이곳에서 그윽한 차 한 잔을 앞에 놓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봄눈 녹듯 자취를 감출 것 같다.   무작정 어디론가 길을 나선 사람이 찾는다면 더욱더 어울릴 것 같은 ‘들꽃 향기’의 주인장은 오늘도 그리움으로 깊이 우려낸 사랑의 향기를 품은 차 한 잔으로 길손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안씨는 이곳에서 산골음악회도 연다. 여기에서 나온 모든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에게 건네진다. 앞으로는 더욱더 다양한 문화의 향연을 펼치며 많은 사람의 가슴에 들꽃 향기처럼 기억되고 싶어 한다.   ▲ 안영훈씨는 카페(들꽃 향기)에서 다양한 문화의 향연을 펼치며 많은 사람의 가슴에 들꽃 향기처럼 기억되고 싶어 한다.     안씨는 지금까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몰입했다면, 이제부터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한다. 그의 넉넉한 미소가 봄이 가져다주는 희망처럼 어느새 길손의 마음에 푸름을 물들인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펼치는 제2의 인생 향연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올봄 남평리로 발걸음을 옮겨보면 좋을 것이다.   정선 이주형 시민기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1-11
  • 교사로, 장로로, 시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삶
      2015년 한국장로문인회 문학상, 시부문 수상자 강병원 장로   스승의 날인 15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서울 종로 5가)에서는 한국장로문인회(회장 김광한, 봉천교회) 제18회 장로 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시부문 수상자인 강병원 장로(광주대인교회)는 이날이 스승의 날이기에 더욱더 조명을 받았다.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강병원 시인은 평생 중·고등학교에서 국어 과목을 가르쳤다. 크리스천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겠다며 제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기에 그도 따랐다.   ▲ 스승의 날인 15일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서울 종로 5가)에서는 한국장로문인회 제18회 장로 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류를 변화시켰다. 강병원 장로는 항상 이런 정신을 마음에 담고 살았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마음으로 시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병원 시인이 쓰는 작품은 늘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삶과 자연을 조감한다. 신앙적으로 승화한 그의 작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애가 잔잔하게 스며있다. 그의 작품은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어느새 성경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또한, 그의 작품세계에는 자연 사랑이 녹아 있다.   이분법적 사고나 기준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언제나 유기적으로 숨을 쉬고 있다. 소박한 시골을 배경으로 억눌리고 찌든 삶을 정화하게 한다.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시골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그의 작품에서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의 아름다움,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저녁연기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 한국장로문인회 제18회 장로 문학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전하는 강병원 장로     그에게 암이라는 시련도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강병원 시인의 얼굴에는 그리스도인의 평화와 넉넉함이 배어 나온다. <들깨를 털며> <부활의 생명> <단풍꽃 길> 등 그의 작품집들은 교직과 신앙생활 그리고 고난과 인고의 세월을 통해 잉태한 것들이기에 더욱더 깊은 영감이 묻어나고 생명력이 넘친다. 계절이 전하는 메시지들이 그의 통찰과 직관을 통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광주대인교회(담임목사 정종주)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강병원 장로는 한 몸 공동체로서의 교회(에클레시아)를 강조한다. ‘너와 더불어 나’로서 함께하는 생명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의 몸이나 교회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 장로 문학상 시상식에 참여한 광주대인교회 교우 및 제자들     그는 “자신의 호흡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 늘 자신의 삶을 위해 준비해주시고 도우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이 스며있다”며 벅찬 감사를 억누르지 못했다.   “추사 김정희는 천 개의 붓을 다 쓰고도 편지를 쓸 줄 모른다고 했다며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격려하는 상으로 받겠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강병원 장로는 교사 재직시절 대통령표창 홍조근정훈장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상 등을 수상하면서 제자들의 본이 되었고, 제자들에게는 스승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청출어람을 강조했다. 지금까지도 제자들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강병원 장로는 기도하는 시인이요 스승으로 산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그의 삶 자체가 한 권의 시집이다.   시상식에 참여한 담임목사와 교우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이날이 스승의 날이기에 더욱더 의미가 깊다며 앞으로 더욱더 건강한 모습으로 사시며 좋은 작품도 많이 써주시기를 소망했다.   광주 박관식 기자 pgs@timesofkorea.com    
    • 인물이야기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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