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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시니어투데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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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사회적 거리 두기, 인천 활석교회도 실천에 앞장서
    [시니어투데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국민들이 정부의 방침에 잘 협조하고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감동하고 있다.   의료진들은 위험이나 피로감을 개의치 않고 대구, 경북 지역으로 달려갔다. 기부의 물결도 이어지고 있다. 어떤 지체 장애인은 자신이 모아둔 마스크를 부산의 한 파출소에 몰래 기부하기도 했다는 소식이며, 유명인들의 통 큰 기부에 이르기까지 코로나19의 어려움 못지않게 감동의 스토리가 이어지며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역시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임이 틀림없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온 민족이기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이다.   종교계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는 6·25동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예배를 스스로 잠정 중단하고 있다. 이런 대열에 동참하는 인천의 활석교회(담임목사 윤철영)를 들여다보았다.   윤철영 목사는 예배 순서와 설교원고를 작성하여 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하도록 돕고 있다. 윤 목사는 “이런 기회에 각 가정에서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다”며 “기독교인들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때 사회를 섬기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했다.   윤 목사는 “예배는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이면 어떠냐는 것이다. 삶의 총체적 의미로서의 예배를 실현하는 것이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런 일이 없는 평상시에는 공동체를 경험하며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활석교회 윤철영 목사가 이번 주 교인들에게 보낸 설교는 다음과 같다.   활석교회 담임목사 윤철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중국에서 발원한 ‘코로나19’의 명칭은 바이러스의 모양이 왕관(corona)과 같다는 데에서 붙인 말입니다.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질병입니다.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스페인 독감(스페인에서 발병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언론이 전시 보도 통제 없이 이 질병의 심각성을 심도 있게 다뤘다고 하여 스페인 독감이라 명명함)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군인들에 의하여 창궐한 스페인 독감에 2년 동안 5억여 명이 감염되었고, 그중에 5천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숨진 군인과 민간인의 수보다 두 배가 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를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는데, 당시 인구의 50%가량인 740만 명이 감염되어 무려 14만 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많은 질병이 극복되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질병이 인류에게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질병은 자연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래에 등장하여 지구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조류인플루엔자(Al), 사스(SARS), 메르스(MERS), 코로나19(COVID-19)는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입니다.   이외에도 홍역, 뇌염, 결핵, 천연두, 에이즈, 탄저병, 공수병, 광우병, 브루셀라 등 전체 질병의 75% 이상이 동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과 더불어 발전해온 만큼 이런 질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침범, 단백질 공급 수단으로 가축의 대량사육과 도축( 한 해 600억 마리 도축함), 반려동물의 증가, 농축산물의 교역 증대, 교통의 신속함이 어우러져 질병이 더욱더 심각하게 가속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에서 인류에게 큰 불행을 안겨준 질병은 페스트인데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529년 스페인이 침공한 아즈텍은 전쟁보다 천연두로 멸망하였고, 잉카제국의 8만 군대는 1531년 168명의 스페인 군대에 전멸당했는데 이유는 천연두였습니다. 영국군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도 그랬습니다.   질병은 전쟁보다 무섭습니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질병은 인간에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도시화 될수록 그 파괴력은 배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는 그의 작품《호모 데우스》에서 도시를 ‘병원균의 이상적 번식처’라고 꼬집었습니다.   함의 후예들에 의해 시작된 도시 문화가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문화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건설하는 현장에 개입하셔서 인간의 언어를 흩으셨고, 화려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여 흔적도 없이 지우셨습니다. 또한,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을 열 번의 재앙으로 응징하셨으며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성도 무너뜨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다시 조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 과학적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첨단화된 세상임에도 엄청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속수무책이 아닙니까?   우리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로 서서 사람과의 관계, 동식물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의 수단으로 전쟁과 질병을 사용하신 사건이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형태와 문화가 앞서 언급한 바벨탑과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 아닌지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반성하며, 비난과 다툼을 멈추고 사람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고 그분께 물어야 합니다. 삶의 방향도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렘애3:32,33)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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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6
  • 책과 도서관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가치혁신
    책과 도서관의 관계를 사람과 비교해볼 때 책이 영혼이라면 도서관은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책과 도서관은 매우 긴밀한 관계다. 도서관과 지역사회 역시 매우 긴밀한 관계다. 공동체는 공간적이고, 공간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있다. 도서관은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지식이 교감하며 융합하여 사람들의 심연에서 잠자는 갈망이나 사명을 자극한다. 지적인 소통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하는 희망과 용기의 공급처다.   하지만 도서관이 여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적 갈증에 지친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에서 나아가 꿈과 용기를 창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마다 새로움을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서관이라는 샘들이 하나둘 모여서 가치혁신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런 조화가 일어나면 도서관은 엄청난 유익을 창출하는 시대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있다. 도서관은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먼저는 책과 도서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다른 각도, 새로운 생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와 같은 틀 안에서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도서관은 어느 정도 양적인 팽창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도서관의 사명이 흡족하게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드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과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지혜가 서로의 가슴에 심기게 하고 자랄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더해져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야 과거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인다. 이전까지의 방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황당하고도 어리석은 행위다. 도서관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고 그에 따라 뜨거운 실천을 아끼지 않는다면 책과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가치를 혁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순히 책을 모아 두기만 한다고 해서 도서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은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지식이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감을 창출하게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기능만 가동해서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 교류하며 공감하게 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만남이 왕성하게 일어나 감사와 기쁨이 꽃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날마다 더욱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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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07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우리의 마음은 인생을 가꾸는 정원이다. 여기에 올바르고 진실한 생각의 씨를 뿌려서 성실하게 잘 키워야 한다. 이것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 보는 이들에게 소리 없이 기쁨을 전할 수 있다.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 오면, 추수에 대한 보람과 행복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 증거가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자신이 인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미 한 사람은 하나의 '사람책'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 공감, 평화, 행복, 나눔, 배려, 존중’ 이런 것들이다. ‘너’와 더불어 ‘나’를 통해 ‘우리’로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만 이런 가치들이 힘차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우리의 밭을 갈고 다듬어, 올곧음과 사랑으로 가득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잘 자라도록 좋은 환경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공유와 상생이 마음껏 호흡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결실을 이루어 가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나눔의 경제, 배려와 존중의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이런 평화와 공감의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누구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 증거가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가치관의 혼란과 첨예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하나가 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양성이 조화로움 가운데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어낼 때, 최적의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강제성에 의한 획일화나 전체주의 방식으로는 절대 이런 상태를 만들어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각각의 다양한 생각을 품고 해를 보고 달을 보아도 해와 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수평선과 지평선도 이와 같다.   과연 어떤 것이 아름다운 세상인가! 사람들의 다양성이 살아 숨 쉬고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나눔과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지혜에서 나온다. 지혜가 풍부해야 행복과 번영이 꽃을 피우게 된다. 지혜는 갈등을 치유하고, 이해의 가뭄을 해소하게 하여 준다. 지혜는 행복한 세상을 열 수 있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복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더 효율적으로 지혜를 창출하고 모으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벌들이 꽃 속에서 꿀을 모으듯이 사람들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지혜를 모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플랫폼(platform)이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다. 이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공유를 꿈꾸며 열람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인공지능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통해 수많은 연결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목받는 가운데 이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다.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니 인공지능을 아무리 발전시켜도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 바로 감성과 영성이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바로 이런 것을 나누며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꽃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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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2
  • 원전과 핵무기를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5년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을 지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놀이로 설명한다.(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임경택 옮김,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2011, 98-99).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에서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원폭의 피해를 철저히 경험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하는 인기영합 정책(popul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정치·경제적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신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뗄 수 없는 인간의 터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창조주로 인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연을 유한 자인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며 파괴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는 창조주와 창조 섭리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들지 않는다. 유한이 무한을 계산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어마어마한 원전 사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안전한 식품을 먹어야 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땅은 인간의 놀이터(Spielraum·놀 수 있는 공간)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서 스스로 자연 안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을 모욕하고 맞서는 존재(Gegenstande)가 되는 동시에 기술을 통해서 자연에 도전, 도발하면서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의존하는 에너지 창출, 핵무기로 제압하려는 폭거는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삶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게 되면 수천 톤의 흙먼지가 발생하게 돼 소행성의 충돌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층권 대기에 쌓여 ‘핵겨울’(nuclear winter)을 초래함으로써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은 무조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도 핵을 보유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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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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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와 시니어의 삶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우리 인간의 삶의 곁에 충실히 남아 있을 것이다. 종교가 젊은이들에게는 흥미가 다한 폐물에 지나지 않아도 시니어에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시니어들을 위한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사라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철학이나 심리학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남은 것은 종교다.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종교와 더불어 보내야 한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즐거움과 위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라 영원성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친구도, 돈도, 사교춤도 노년이 될수록 궁극적으로 사람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막연히 종교를 홍보하거나 선전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생명에 대한 욕망은 커지지만,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영원할 것 같은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생명의 시한도 젊은이들보다는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더 높여주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초월적 가치를 지향하게 해주니 삶의 욕망을 점점 더 내려놓게 한다.   노년의 시기는 기존의 과욕이나 혈기를 버리고 비워, 그 자리에 여유와 평화를 채우는 시기이다. 물질적인 욕망이나 생명에 대한 집착, 혹은 사람에 대한 애착까지도 덜어내야 한다. 육체와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영원에 대한 지향이 더욱더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는 영혼과 육체를 관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적어도 건전한 종교라면 노년의 심약한 마음과 의식을 이용해 정신을 흐려놓으려고 들지는 않는다. 노인을 공경할 줄 알고 늙음에 대한 상식을 간파한 종교는 그에 걸맞은 의식과 정신, 그리고 영성을 깨우쳐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노년에는 한 가지 정도의 종교를 갖고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제와 사귐,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성과 정신적 향상을 꾀하며 그것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노욕이나 고집을 앞세우면 사회적으로 부조화를 만들어 낸다. 젊은이들을 배려하고 또 더욱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욕망으로 가득하고, 훈계만 일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그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증폭된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니어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시니어들이 삶에 있어 더 용기가 있고 더 성숙한 안목으로 인생과 사회의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니어들의 원숙한 인격과 여유로움, 삶의 식견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철학적인 시니어이자, 더불어 종교적인 시니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이제껏 숱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삶의 고비들을 넘겨왔는데, 무슨 또 영성과 정신을 소비하라는 말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종교를 더는 소비하지 않으니 제발 시니어들이라도 소비 좀 해달라는 부탁도 아니다. 이제는 종교나 영성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그 흐름을 역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니어들은 소비만 하고 남은 인생을 소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니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경쟁에 찌든 젊은이들이며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훌륭한 덕과 정신으로 힘을 실어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역할이야말로 종교가 있는 시니어들의 강점일 것이다. 노년에게 종교는 생애를 좀 더 생산적이며 깨어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시대와 우리 사회는 넓은 시야와 깊은 영성으로 곳곳에서 자신과 후세대들을 연결하는 통로로써 종교를 통해 아름다운 담론의 장(場)을 펼쳐가는 시니어들을 갈망하고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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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5
  • 분노하는 민중과 함석헌 효과
      함석헌. 우리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련하게 기억한다. 한국 역사의 현대사적 인물로서 철학,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기술, 교육, 여성 등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독특한 철학을 우려냈던 분으로 알려졌다. 그에 비해 더는 그를 이 시대에 다시 만나야 할 사상가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서구 철학자의 세례를 받고 지난 반세기를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자양분을 그들로부터 찾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구의 사상이나 철학조차도 외면당하고 있다. 이성적 숙고를 통해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이성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 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누리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식과 진리, 그리고 지혜에 대한 욕구보다 물질적이고 향락적 욕망이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 현존재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것처럼, “자기 창조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인지, “자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실존”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다시 요청되는 까닭이다. 인간 현존재는 결단코 일상인(das Man)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근본 기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수행적 언어들이 넘쳐난다.   함석헌의 저서를 읽으라는 주문은 한가한 잡담으로 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할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함석헌의 언어, 그리고 언어적 행위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그의 발언적 진리를 인식하기에 앞서, 민중은 지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중이 전체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민중이 아니라 그것은 노예요 종이다. 현재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본과 체제, 이데올로기와 상품의 노예는 있을지언정 순수 의식, 순수 정신을 품은 민중을 만나보기란 매우 어렵다.   ▲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 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누리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30년 전 함석헌은, “사람은 감응(感應)하는 물건이다. 감응이란 곧 다른 것 아니요, 하나로 된 바탈[보편성, 통일성]이다. 사람이 전체와 내가 하나인 것을 느낄 때처럼, 전체가 이 나를 향해 부르는 것을 느낄 때처럼, 흥분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감응하면서 흥분하는 현존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전체를 지각하고 깨닫는 사람이 부족하다. 게다가 흥분이란 대상에 의해서 감각된 인간의 감정이 촉발되는 것일 텐데, 이성적인 것과 반대되는 부정적 태도와 반응인가. 아니다. 흥분은 민중이 살아 있다는 인식과 기분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한 인간의 근본 기분은 지루함이나 권태, 불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흥분이야말로 민중이 혁명할 수 있는 근본 기분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상상으로는 혁명 기분은 아니 나온다... 혁명은 혁명으로만 나온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미지(image)는 감정과 인식을 속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의 작용 없이 상상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상상(Einbildung)은 대상을 현시함이 없이 상(Bild)을 떠올리거나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상을 그리는 것만으로 혁명할 수 없다. 자칫 상상이 지나치면 망상이나 공상이 되기에 십상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분,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흥분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작용 때문에 이루어지는 감정이어야만 한다.   혁명은 전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혁명이 무슨 치기 어린 감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직관과 판단은 사태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획득한다. 지금 민중이 혁명의 근본 기분인 흥분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흥분의 물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트인다. 흥분의 의지, 흥분의 에너지가 매스미디어, 스포츠, 쇼핑 등으로 발현되고 있다.   민중의 흥분에의 의지는 전체, 즉 체제, 제도, 조직, 이데올로기, 자본 등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민중의 흥분 의지는 조작되고 통제당하면서 그 흥분이라는 근본 기분마저도 박탈당하고 있다. 혁명에의 근본 기분이 흥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 기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촉발되고 있지 못하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민중이 혁명하려면 혁명 기분을 새롭게 일구어야 한다. 혁명 기분이 인간 현존재의 변화와 세계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 『생태영성의 이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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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7
  •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탓하라!
      산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산’이라는 시이다. 산은 자신의 존재를 열어 밝힌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권태를 모른다.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명체를 끌어안고 있는 산은 늘 물음을 제기하고 동시에 답을 제시한다. 산은 그 자리에서 자연의 신비를 품고 있어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존재론적 해답을 발견한다. 말하지 않는 해답, 그것은 산만이 줄 수 있는 고유성이다. 그러니 탓할 일도 아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 속에서 거주할 세계로 인식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만남조차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산을 향해 조소도 심지어 정복과 지배도 마다치 않는다. 그러나 어디 산이 끄떡이래도 하던가? 산, 즉 자연(physis)은 “모든 본질적 존재자가 그 현존 상태로 나타나고 그 부재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산의 들고 나감은 흔적도 없다. 흔적조차도 없는 산을 향해 조소를 보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의 존재는 늘 그러한 상태로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 차라리 허허로운 웃음으로 날 마주 대하듯, 산을 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시인이 산을 의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의심이란 이미 존재 안에 가정된 확신과 뒤섞인 신념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에 드는 이성의 자기 경계요, 비판이다. 산을 의심한 것은 산의 존재를 인간실존 본질의 현존과 기댐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산의 존재를 의심해도, 산은 산으로서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보아도 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의심은 오히려 사태에 붙잡혀 있고, 몰두해 있는 것이다. 산에 붙들린 상태, 그것이 곧 시인의 의심이다.   자신의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큰 산의 존재는 이성과 감성을 압도하고 실존을 파괴하려는 듯이 서 있다. 산에 대한 감정과 기분이 지속할수록, 산은 더는 ‘그것’(It)이 아니라 너, 당신, 그대(Thou)로 다가온다. 산 앞에서, 산 옆에서, 산 뒤에서, 산 안에서, 산 위에서 우리는 지루할 틈도 없다.   그대를 만나는 것이기에 예의와 설렘, 회귀와 귀속의 본능으로 다가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이제 닮고 싶은 마음과 표정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의 몸, 특히 나의 눈은 그대, 곧 산에 내맡기며 산에 의해서 포섭된 눈길로 나를 보고 산 그 자체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산은 도구와 수단이 되지 않고 내가 가진 호기심은 산의 호기심이 되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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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9
  • 상호주관적 도덕 공동체와 시대적 참뜻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국론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가 공동체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함석헌은 이미 국가 공동체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국가에 대한 정의는, ‘악과 투쟁하는 공동체’로서 규정된다. 국가, 함석헌의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나라는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민중의 재산과 안녕과 질서를 보장(담보)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함석헌은 그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라는 도덕적 존재들이 모여서 구성한 집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42쪽).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도덕 공동체, 상호주관적 윤리 공동체는 타자를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따라서 나라는 민중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도구적 행위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어떤 의식과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을 민중에게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행위자 혹은 정치적 행위 가능자에게까지 해당되는 강한 주체 인식과 행위를 요청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을 모든 행동의 표준을 삼고 살고자 하는 것이 윤리”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나라는 유기체이며 동시에 윤리 공동체, 사람 노릇을 하는 공동체이다(함석헌, 위의 책, 42쪽).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함석헌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윤리적 공동체의 범위는 일개 나라를 초월하여 범국가공동체, 세계운명공동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3-44쪽).   그런 의미에서 세계 국가는 기능적 명령이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륜 공동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국가들은 각각의 이기적인 추구를 넘어서 도덕적 인간을 토대로 물질적 실존을 소외시키거나 파괴하지도 않고, 상호주관적 민족 공동체의 분열도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추상적 인간의 실존을 공적 도덕성으로 묶는 역할도 해야 한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86쪽).   이러한 도덕적 실존, 윤리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통일을 생각해보면 경제적 우월성, 경제적 성장을 통한 국가의 통합보다 “정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정신으로 국가 공동체의 의식이 고양되어 있어야 경제적 삶, 경제적 부흥도 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신으로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력이나 폭력은 있을 수가 없다. “비폭력혁명으로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45쪽). 비폭력은,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시적-조물주적”이다. 그것도 “역사적 진리들의 조물주적 작품화”이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개인들의 실천이라는 혁명적 기획투사”(J. Habermas, 앞의 책, 371쪽)라고 말할 수 있다.   ▲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     하나의 생활세계, 하나의 소통되는 세계, 하나의 공통된 일상실천이 가능한 세계, 서로 돕는(상호부조의 철학) 세계, 상호 참여가 가능한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자기희생 없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적 실천, 즉 비(무)경쟁성, 비(무)지역성, 비폭력성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함석헌, 위의 책, 47-48쪽).   거듭 말하지만 비폭력주의는 경쟁이 아닌 자기희생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좋은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9쪽).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의 구현이다.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 인권의 옹호와 확대,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이에 반해 평화 없음(peacelessness)은 기아, 영양실조, 질병, 환경오염 등이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행위는 평화 없음의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   개인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경제적 부를 향유하기 위해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평화 없음의 파괴적 현실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진출, 확장, 정복, 지배, 순치, 주입의 시스템”이 아니라 “경청, 배움, 섬김, 자율, 상생, 평화를 위한 우정과 연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박성준, “인문학의 희망, 우정의 공동체를 열다”, 장동석 지음, 살아있는 도서관, 현암사, 2012, 137-144쪽).   이 모든 행위들 속에서는 물론 생활세계적 삶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이성적, 의사소통적 간섭, 상호이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의 타당성의 요청은 관념으로만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적 합의는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는 참여자들의 의지와 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J. Habermas, 앞의 책, 375쪽).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와 비폭력의 철학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타당한 말(씀)을 가져야 한다. 함석헌은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뜻”이라고 말한다(함석헌, 앞의 책, 51쪽). 시대가 원하는 뜻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고, 공존재적 삶을 만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언어, 즉 뜻이 있어야 한다. 뜻이 없으면 시대도 없다. 시대를 가리키고 시대를 선도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말-알이기 때문에 말 속에 이미 그 참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내뱉을 때는 단순히 소리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알, 즉 말의 지극한 뜻을 세계 앞에 내놓는 것이다. 세계로 내던지는 말-알은 말을 둘러 싼 속 알맹이이므로 그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말이 가식과 포장이 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은 말이 되고자 한다면, 말은 영원성과 초월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설령 사태가 변한다 하여도 말의 진정성마저도 변한다면 말(씀)을 통한 의사소통과 비폭력을 통한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치언어니 일상언어니 서민의 언어니 시정잡배의 언어니 구분을 하지만 그 언어의 밑바탕에는 참뜻만이 존재해야 한다.   참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는 죽은 언어나 다름이 없고 언어 이면의 초월의 뜻이 성립할 수 없으니 말의 순수성이나 말의 진중함과 신중함조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언어(言語)가 기능적으로 사람의 소리[言]와 함께 나의[吾] 말[言]을 통해서 생각을 전하는 매개체일지라도, 말은 말의 속 알맹이, 즉 말-알로서 본질적으로 그 속에 있는 참뜻의 교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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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22
  • ‘사람책도서관’이 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인가
      사람에서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노인이 한 사람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각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그것이 담고 있는 경험과 의미는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의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아프리카 가나 판티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나 제7대(1996~2006)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타 아난(Kofi Atta Annan)도 한 연설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강조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여도 지구촌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들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다.   ▲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사람이 배제되는 일은 사람을 위한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존재적 가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사람에게 답이 있다. 무인도에는 길이 없다. 삶의 현장에 길이 생기는 법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 본래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그 핵심이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때 진정으로 사람 사는 멋과 의미를 깨닫고 누리게 된다.   소통은 단순한 전달(transmission)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통에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일어나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community)와 친교(communion)라는 의미가 합성된 말이다. 따라서 소통은 메시지를 보내고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동체적 의식을 공유하고 친밀한 교제까지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경청은 상대에게 신뢰감을 쌓아 놓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사람책도서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스마트폰도 전화기이지만, 수없이 개발되어 제공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전화기를 뛰어넘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앱스토어이다. 이런 것과 같이 경험과 지혜의 장터가 필요하다.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바로 이런 플랫폼이다.    ▲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더욱더 아름답고 유익한 경제를 만들어 가려면 창의적인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사람이 중심이다. 핵심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융·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촉진되어야 새로운 일자리와 시장도 창출되는 것이다. 창의적인 발상은 혼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만나고 부딪치면서 예측하지 못 했던 결과도 만들고, 그것이 또 다른 발상과 결과를 낳기 위한 씨앗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런 일의 플랫폼이 되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된다는 것이다.   1418년에서 1450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정치는 인재경영에 기인한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발상과 그 실행을 위한 인재 등용과 연구의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휴먼 위즈덤 북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1443년(세종 23년) 반포된 훈민정음이 개발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임기간 동안 2천여 번의 경연(經筵)을 열었다고 하니, 한 달에 6회 정도를 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소통이 일어났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같은 노비 출신도 고위 관리로 등용했다. 모든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세종대왕은 특히 인재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지도자였다.   이 시대에도 이런 리더십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 필요하다. 블루오션(Blue Ocean) 이론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가치혁신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끊임없는 창출이 필요하다. 그 해답 또한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해답이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을 만들어내야 한다. 곳곳에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이런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감으로써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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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9
  • 사람이 곧 책이고 도서관이다
       단 한 번의 일생으로만 살게 되는 수많은 책이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영원히 사라지고 있다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이며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는 정서는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아프리카 작가 아마두 앙파데바(Amadou Hampate Ba),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타 아난(Kofi Atta Annan)은 물론, 우리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인생을 책과 도서관에 비유한다.   책이라는 것도 결국 인생에서 얻게 되는 많은 경험과 지식이 활자화되어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모아 놓고 빌려주는 곳이 도서관이다. 그러니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책이라는 것도 결국 인생에서 얻게 되는 많은 경험과 지식이 활자화되어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모아 놓고 빌려주는 곳이 도서관이다. 그러니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으며 그것을 확대해 나간다. 우리나라의 두레와 향약에서도 이런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도제식(徒弟式) 교육이나 멘토링(Mentoring)도 ‘사람을 한 권의 책이고 하나의 도서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일생으로만 살게 되는 수많은 책이 제대로 읽히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영원히 사라지고 있다. 세상에 주어진 가장 귀중한 가치가 소중한 유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이것을 공유하면서 섞고 뭉치는 가운데 발효함으로써 함께 있음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창출해 보자.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인생’이야말로 함께 가야하는 먼 길이다. 함께 가려면 무엇보다도 동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해야 한다. 서로에 대해 공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의 지혜를 나누며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살아 숨 쉬는 지혜를 모아 꿈의 지도를 만들어 보자. 혼자 간직한 외로운 꿈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공유하여 아름다운 현실로 만들자. 이런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휴먼 위즈덤 북이고 라이브러리이다.    ▲ 사람책도서관은 사람이 가진 경험이나 지식을 책과 같이 만들어 대출하는 도서관이다.     도서관에는 책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사람책도서관’에는 ‘사람책’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사람이 도서관의 책꽂이에 꽂힐 수 있겠는가. 서가에 사람을 진열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가진 경험이나 지식을 책과 같이 만들어 대출할 수 있도록 게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한 권뿐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이 될 수도 있다. ‘사람책’은 ‘사람책도서관’에다가 대출 가능한 일시를 정해 등록해야 한다. 이것을 보고 원하는 사람이 대출을 신청하면 된다.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사람책”과 대출 신청자는 정해진 일시에 만나게 된다. 이때 ‘사람책’은 자신이 정한 제목과 목차에 따라 30분 정도 내용을 이야기한다. 대출한 사람은 이것을 듣고 궁금한 내용에 대해 20분 정도 물어볼 수도 있다. 이것이 꼭 기계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운영하면 된다.   운영하는 주체의 취지나 목적에 따라서 다양한 성격과 방향이 가능할 것이며, 해당하는 명칭도 각양각색이 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진로 상담이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는 통로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에서는 지식경영의 가치 혁신적 차원에서도 다양하게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각각의 성격과 목적에 따른 천차만별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사람책도서관’이라는 것도 그만큼 다양한 모양과 방법으로 존재하고 활동하게 될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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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7
  • 비폭력의 철학과 희망의 정치
      비폭력의 정신은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비폭력은 단순한 정치 수사학이 아니라 정치의 근본정신이자, 정신의 극치입니다.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수사학적 형식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이 되기를 갈망”(F. Moretti, 조형준 옮김, 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429쪽)합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수사학이란 “상호 주체적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체계에 대해 지지를 요청하는 것이 목적”(F. Moretti, 위의 책, 397쪽)입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은 비폭력의 철학적 가치 체계를 민중이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정치적 형식이자 동시에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폭력의 정치 수사학은 시대정신, 시대가 요구하는 민중의 정신이요, 세계의 정신입니다. 비폭력의 정신은 바로 그러한 토대에서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비폭력이 아닌 “힘의 철학, 폭력의 정치”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죽이고 타자를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는 힘에 의지하는 철학은 상처와 술수와 치졸과 거짓만이 난무할 뿐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36쪽).   민중의 정신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정신이 세계철학의 지향이 되어야 하고, 정신이 민중의 사유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비폭력은 정치 현실(추악함, 비도덕, 조잡함)과 정치이론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존재(실존)와 정치적 현실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고 삶을 삶답게 하여주는 정치미학은 정치적 존재자들(정치적 행위자들)과 정치적 실존(민중)을 서로 편안하게 하는 비폭력으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권력은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 개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사용될 때 폭력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국가 체제, 정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위한 권력으로 작용하게 될 때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민중은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되레 그들 자신이 정치한답시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민중이 묵인하고 인종(忍從)하고 굴종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무식이요 무성의요 무책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7쪽).   ▲ 비폭력의 정신은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민중의 정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9쪽). 민중의 정신이 일어나야 세계가 삽니다. 민중의 정신이 광기에 사로잡히라는 말이 아닙니다. 망상에 사로잡히라는 말도 아닙니다. 민중의 정신은 세계를 고치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신과 의지(Wille)가 스스로 진보하고 사물이 사물 되게 하고 세계가 세계 되는 힘(A. Schopenhauer)이라면, 민중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각되거나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중의 정신이 없거나 우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지러운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 도덕’이 필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40쪽). 낡은 체제 속에서의 정신과 생각을 이끌었던 도덕은 이제 더는 소용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도덕적 분투만이 사회를 구할 수 있습니다. 폐단, 구태, 차악, 안일, 안주, 절망, 자멸로 이끄는 도덕을 도덕이라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도덕을 구현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도덕마저도 정치적 행위자들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깨이지 못한 민중이 부화뇌동하여 자신의 사적 이익에 도덕이라는 훈장과 초자아를 부르짖는 현실에서 도덕의 갱신은 필연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함석헌은 “낡은 체제에 속한 한, 너도 나도 다 악합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선은 특정인, 특정사상, 특정주의에 국한되기 마련입니다. 차별주의나 당파주의는 더 문제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40쪽). 정치적 무의식은 차별, 분리, 당파, 구별입니다. 통합하고 화해하고 치유할 줄 모릅니다.   정치적 무의식은 본능(id)과 현실적 자아(ego)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본능을 향해 치닫습니다. “이드와 현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서 자아는 너무나도 자주 아첨꾼이자 기회주의자, 거짓말쟁이가 되려는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정치가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위치를 대중들이 좋아하는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행위와 비슷하다.”(S. Freud, 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153-154쪽 재인용, F. Moretti, 앞의 책, 448쪽)   그러므로 정치적 실존,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덕을 구상해야 합니다. 함석헌은 좌우도 아닌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윤리,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궁극은 비폭력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비폭력은 “너 나와의 대립을 초월한 것입니다. 차별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생에 대한 절대의 존경을 그 도덕의 토대로 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40-41쪽)   정치는 이제 정치적 상투어를 파괴하고 정치의 상투적인 행위를 타파해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바탕에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좌우 진영논리, 좌우 이념이 아닌 비폭력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비폭력은 자아를 존중하듯이 타자를 환대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의 운동, 삶의 운동이라는 것을 통하여 외형의 형식과 가식을 뒤로하려고 노력합니다.   정부는 정치적으로 희생된 목숨의 안타까움과 진실을 외면하고 경제 부흥만을 부르짖습니다. 정치적 행위자들은 그저 형식과 가식, 체면, 가면만을 생각하고 민중을 짓밟으려고 합니다. 민중은 정신도 없고, 도덕도 없는 듯이 막 대합니다. 부흥도 민중 전체가 ‘감격’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감격하게 하지 않는 정치에는 쇼만 있을 뿐입니다. 감격은 앞에서 말한 타자에 대한 인식과 환대가 기초가 된 감정의 교환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41-42쪽).   산다는 것은 경제적 부흥이나 경제적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먹고 살 만큼 사는 우리입니다. 다만 극부와 극빈이 너무 심하니 그 둘을 조화롭게 하는 미학적 삶, 정치미학, 경제미학의 쾌감적 능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 전체가 일어나는 전체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민중 전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민중 전체의 정신은 “그동안 사회적인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고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른바 롤스의 ‘최대극대화의 원칙’(전재원, 앞의 책, 147쪽)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은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며, 자기의 욕구를 포기하고 타자의 욕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민중의 삶의 충동, 삶의 의지를 위해서 정치는 고통과 악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욕망을 단념하고 삶 자체를 관조하고 기쁨을 얻게 해야 합니다. 정치의 목적, 정치적 비폭력은 인간 앞에 있는 것들이 짓북새를 놓으며 우리를 기만하려고 하는 데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자아를 정확하게 보고 욕망의 동기들을 내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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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5
  • ‘사람책도서관’으로 열어가는 아름다운 세상
      ‘나’와 ‘너’ 사이에서 진실하고 성실한 대화를 회복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곧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살리고 빛나게 하는 길이다.   도서관의 새로운 변화뿐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대학들에서도 ‘사람책도서관’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말처럼 SNS의 활성화와 함께 소통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은 진정한 소통에 목말라 한다.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급속하게 번져나가는 것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제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모바일 기기(機器)들을 이용해 수많은 전자책(eBook)을 읽을 수도 있다. 이렇게 IT의 발전이 가져다준 신속과 편리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 방식인 ‘사람책도서관’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존재적 가치는 사회성(sociality)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자유론(On Liberty)》을 통해 인간의 개별성과 사회성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최선의 방법으로 조화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대단히 소중하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사회적 덕목과 부딪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별성과 사회성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극대화된 조화를 이루느냐가 그 사회의 건강성과 행복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도덕적 또는 이성적 존재라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독립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연결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는 것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폰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의 주장이다.   ▲ 도서관의 새로운 변화뿐만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대학들에서도 ‘사람책도서관’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사람은 각자 창조 본래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이 사회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이다. 한 몸과 같은 유기적 공동체 관계를 통해 창조 본래적인 존재 의미와 가치를 발현하는 것이다.   사회와 분리된 인간이라는 가정은 창조 본래적 목적과도 어긋나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도덕이나 지성도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과 함께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에서 인격적인 만남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공존성과 함께 인격 상호 간의 관계성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부버를 일컬어 ‘만남·관계·대화’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만남·관계·대화’와 같은 것들이 깨어진 세계에서는 ‘나’와 ‘너’를 말하는 기쁨도 상실하게 된다.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이 무너진 사회는 얇은 얼음판 위로 걸어가는 사람들처럼 불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와 ‘너’ 사이에서 진실하고 성실한 대화를 회복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곧 인간의 존재적 가치를 살리고 빛나게 하는 길이다.   삼각형이라는 것은 세 변이 세 개의 각을 이루어야 존재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세 개의 변으로 분리될 때에는 이미 삼각형이 아니다. 이것이 삼각형의 실존적 존재방식이다. 인간도 ‘너와 더불어 나’라는 ‘우리’를 통해서만 실존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세미나'에서 강의 하는 저자 박요섭 박사     컴퓨터를 작동시키려면 이미 운영체계(operating system)가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사람의 내면에 본질적으로 사회라는 구성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많은 사람이 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당위적인 가치와 미덕이라는 긍정 편향적 이해만큼은 경계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와 긍정 편향은 몰개성화의 초래와 전체주의적 오류를 불러올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책도서관’은 진심과 열정을 바탕으로 공감 가운데 조화를 이루며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을 안겨 주는 채널이 되어야 한다. ‘사람책도서관’이 만들어내는 메시지가 자기중심주의에서 발로하는 이데올로기의 관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을 안겨주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향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책도서관’이 구현하고 발전시켜야 할 자세는 어떤 것인가.   ⑴ 상승적 적극성이 필요하다. 일방적 요구나 비난적 자세가 아닌 ‘더불어’와 ‘상생’을 힘차게 이루어 가야 한다. 나눔과 공감을 만들어 내는 열망으로 모두를 설레게 해야 한다.   ⑵ 언제나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탐색이나 장벽이 필요하지 않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날마다 편협한 자기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제거해야 한다. 인간 사랑에 기반을 둔 넓은 세계관, 포용, 배려, 존중이 숨 쉬는 나눔과 공감의 능력이 날마다 성장하게 해야 한다.   ⑶ 확신성이 필요하다. 예측 가능성은 신뢰에서 비롯된다. 신뢰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교통 법규 준수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면, 운전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야말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반면에 신뢰를 줄 수 있다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혁신을 위한 자산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확신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진실하게 가꾸어 나가면, 땅과 자연의 모든 것이 농부의 가치가 되어 준다. 착하고 성실한 농부라면, 자연과 땅이 베풀어 주는 결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죄의 습성으로 기울어진 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소망대로 듣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바람직한 의사소통은 이런 욕구를 봄에 눈이 녹는 것처럼 소리 없이 변화시켜 새로운 희망으로 채워간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양성이 아름답게 용해되는 넓은 세계관 속으로 행복하게 젖어들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소개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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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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