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2(화)

교육뉴스
Home >  교육뉴스  >  칼럼평론

실시간뉴스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시니어투데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20-07-06
  • 사회적 거리 두기, 인천 활석교회도 실천에 앞장서
    [시니어투데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국민들이 정부의 방침에 잘 협조하고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감동하고 있다.   의료진들은 위험이나 피로감을 개의치 않고 대구, 경북 지역으로 달려갔다. 기부의 물결도 이어지고 있다. 어떤 지체 장애인은 자신이 모아둔 마스크를 부산의 한 파출소에 몰래 기부하기도 했다는 소식이며, 유명인들의 통 큰 기부에 이르기까지 코로나19의 어려움 못지않게 감동의 스토리가 이어지며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역시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임이 틀림없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온 민족이기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이다.   종교계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는 6·25동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예배를 스스로 잠정 중단하고 있다. 이런 대열에 동참하는 인천의 활석교회(담임목사 윤철영)를 들여다보았다.   윤철영 목사는 예배 순서와 설교원고를 작성하여 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하도록 돕고 있다. 윤 목사는 “이런 기회에 각 가정에서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다”며 “기독교인들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때 사회를 섬기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했다.   윤 목사는 “예배는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이면 어떠냐는 것이다. 삶의 총체적 의미로서의 예배를 실현하는 것이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런 일이 없는 평상시에는 공동체를 경험하며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활석교회 윤철영 목사가 이번 주 교인들에게 보낸 설교는 다음과 같다.   활석교회 담임목사 윤철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중국에서 발원한 ‘코로나19’의 명칭은 바이러스의 모양이 왕관(corona)과 같다는 데에서 붙인 말입니다.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질병입니다.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스페인 독감(스페인에서 발병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언론이 전시 보도 통제 없이 이 질병의 심각성을 심도 있게 다뤘다고 하여 스페인 독감이라 명명함)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군인들에 의하여 창궐한 스페인 독감에 2년 동안 5억여 명이 감염되었고, 그중에 5천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숨진 군인과 민간인의 수보다 두 배가 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를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는데, 당시 인구의 50%가량인 740만 명이 감염되어 무려 14만 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많은 질병이 극복되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질병이 인류에게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질병은 자연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래에 등장하여 지구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조류인플루엔자(Al), 사스(SARS), 메르스(MERS), 코로나19(COVID-19)는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입니다.   이외에도 홍역, 뇌염, 결핵, 천연두, 에이즈, 탄저병, 공수병, 광우병, 브루셀라 등 전체 질병의 75% 이상이 동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과 더불어 발전해온 만큼 이런 질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침범, 단백질 공급 수단으로 가축의 대량사육과 도축( 한 해 600억 마리 도축함), 반려동물의 증가, 농축산물의 교역 증대, 교통의 신속함이 어우러져 질병이 더욱더 심각하게 가속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에서 인류에게 큰 불행을 안겨준 질병은 페스트인데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529년 스페인이 침공한 아즈텍은 전쟁보다 천연두로 멸망하였고, 잉카제국의 8만 군대는 1531년 168명의 스페인 군대에 전멸당했는데 이유는 천연두였습니다. 영국군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도 그랬습니다.   질병은 전쟁보다 무섭습니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질병은 인간에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도시화 될수록 그 파괴력은 배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는 그의 작품《호모 데우스》에서 도시를 ‘병원균의 이상적 번식처’라고 꼬집었습니다.   함의 후예들에 의해 시작된 도시 문화가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문화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건설하는 현장에 개입하셔서 인간의 언어를 흩으셨고, 화려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여 흔적도 없이 지우셨습니다. 또한,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을 열 번의 재앙으로 응징하셨으며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성도 무너뜨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다시 조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 과학적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첨단화된 세상임에도 엄청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속수무책이 아닙니까?   우리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로 서서 사람과의 관계, 동식물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의 수단으로 전쟁과 질병을 사용하신 사건이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형태와 문화가 앞서 언급한 바벨탑과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 아닌지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반성하며, 비난과 다툼을 멈추고 사람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고 그분께 물어야 합니다. 삶의 방향도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렘애3:32,33)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 정보뉴스
    • 사회
    2020-03-16
  • 책과 도서관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가치혁신
    책과 도서관의 관계를 사람과 비교해볼 때 책이 영혼이라면 도서관은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책과 도서관은 매우 긴밀한 관계다. 도서관과 지역사회 역시 매우 긴밀한 관계다. 공동체는 공간적이고, 공간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있다. 도서관은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지식이 교감하며 융합하여 사람들의 심연에서 잠자는 갈망이나 사명을 자극한다. 지적인 소통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하는 희망과 용기의 공급처다.   하지만 도서관이 여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적 갈증에 지친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에서 나아가 꿈과 용기를 창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마다 새로움을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서관이라는 샘들이 하나둘 모여서 가치혁신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런 조화가 일어나면 도서관은 엄청난 유익을 창출하는 시대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있다. 도서관은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먼저는 책과 도서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다른 각도, 새로운 생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와 같은 틀 안에서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도서관은 어느 정도 양적인 팽창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도서관의 사명이 흡족하게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드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과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지혜가 서로의 가슴에 심기게 하고 자랄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더해져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야 과거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인다. 이전까지의 방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황당하고도 어리석은 행위다. 도서관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고 그에 따라 뜨거운 실천을 아끼지 않는다면 책과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가치를 혁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순히 책을 모아 두기만 한다고 해서 도서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은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지식이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감을 창출하게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기능만 가동해서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 교류하며 공감하게 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만남이 왕성하게 일어나 감사와 기쁨이 꽃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날마다 더욱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9-05-07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우리의 마음은 인생을 가꾸는 정원이다. 여기에 올바르고 진실한 생각의 씨를 뿌려서 성실하게 잘 키워야 한다. 이것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 보는 이들에게 소리 없이 기쁨을 전할 수 있다.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 오면, 추수에 대한 보람과 행복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 증거가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자신이 인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미 한 사람은 하나의 '사람책'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 공감, 평화, 행복, 나눔, 배려, 존중’ 이런 것들이다. ‘너’와 더불어 ‘나’를 통해 ‘우리’로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만 이런 가치들이 힘차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우리의 밭을 갈고 다듬어, 올곧음과 사랑으로 가득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잘 자라도록 좋은 환경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공유와 상생이 마음껏 호흡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결실을 이루어 가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나눔의 경제, 배려와 존중의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이런 평화와 공감의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누구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 증거가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가치관의 혼란과 첨예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하나가 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양성이 조화로움 가운데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어낼 때, 최적의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강제성에 의한 획일화나 전체주의 방식으로는 절대 이런 상태를 만들어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각각의 다양한 생각을 품고 해를 보고 달을 보아도 해와 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수평선과 지평선도 이와 같다.   과연 어떤 것이 아름다운 세상인가! 사람들의 다양성이 살아 숨 쉬고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나눔과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지혜에서 나온다. 지혜가 풍부해야 행복과 번영이 꽃을 피우게 된다. 지혜는 갈등을 치유하고, 이해의 가뭄을 해소하게 하여 준다. 지혜는 행복한 세상을 열 수 있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복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더 효율적으로 지혜를 창출하고 모으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벌들이 꽃 속에서 꿀을 모으듯이 사람들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지혜를 모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플랫폼(platform)이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다. 이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공유를 꿈꾸며 열람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인공지능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통해 수많은 연결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목받는 가운데 이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다.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니 인공지능을 아무리 발전시켜도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 바로 감성과 영성이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바로 이런 것을 나누며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꽃피울 것이다.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9-03-22
  • 원전과 핵무기를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5년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을 지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놀이로 설명한다.(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임경택 옮김,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2011, 98-99).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에서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원폭의 피해를 철저히 경험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하는 인기영합 정책(popul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정치·경제적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신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뗄 수 없는 인간의 터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창조주로 인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연을 유한 자인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며 파괴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는 창조주와 창조 섭리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들지 않는다. 유한이 무한을 계산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어마어마한 원전 사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안전한 식품을 먹어야 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땅은 인간의 놀이터(Spielraum·놀 수 있는 공간)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서 스스로 자연 안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을 모욕하고 맞서는 존재(Gegenstande)가 되는 동시에 기술을 통해서 자연에 도전, 도발하면서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의존하는 에너지 창출, 핵무기로 제압하려는 폭거는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삶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게 되면 수천 톤의 흙먼지가 발생하게 돼 소행성의 충돌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층권 대기에 쌓여 ‘핵겨울’(nuclear winter)을 초래함으로써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은 무조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도 핵을 보유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6-03-01

실시간 칼럼평론 기사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시니어투데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20-07-06
  • 깨어서 꽃을 피우자
      [시니어투데이] 흐르는 세월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코로나19’의 기세도 봄이 오는 길목을 막을 수는 없다. 세월의 흐름은 진리의 불변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기쁨도 언젠가는 다 지나간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남녘에서부터 들려왔던 꽃 소식이 이젠 전국에서 한창이라고 바뀌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봄도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느라고 바쁘다. 땅 위에 있는 모든 동·식물도 제 할 일에 충실한 모습이다.   철을 따라 제 할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사람도 이 진리에 순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호흡할 때 보람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   앙상하던 나뭇가지들이 잎을 내밀고,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산수유, 목련은 벌써 한창이고 매화, 벚꽃이 앞다투어 피고 있다. 모두 추운 겨울이라는 시련을 이기고 철을 따라 깨어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코로나19’에 지친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다. 우리는 요즘, 산으로, 들로, 강변으로, 해변으로 가볍게 나섰던 꽃구경이 아무 때나 마음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 사이도 이렇게 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만나지 말라고 한다. 만나더라도 악수도 하지 말고, 마스크를 쓴 채로 대화하라는 것이다. 이럴 때 전화로라도 즐겁게 대화도 하고, 서로 격려하며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이 어렵고 답답한 시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요즘 나는 꽃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겨우내 동백꽃이 피었다가 지금은 다 시들었다. 그 옆에 있던 철쭉꽃은 1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반은 졌지만, 지금까지 피어 있다. 그러니까 겨우내 집에서 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설날 하루 전에 우리 가족은 서울식물원에 갔었다. 많은 꽃과 나무를 관찰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봉지에 싸여있는 튤립 뿌리를 보았다. 우리는 그 뿌리를 샀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설날 우리는 집에서 카드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들네가 돌아갈 때 튤립 뿌리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얼마가 지났다. 우리 집 화분에 심은 것은 추운 베란다에 두었더니 늦게 자랐고 손녀는 따뜻한 곳에다 화분을 두었기에 꽃이 빨리 피었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지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 집 서늘한 베란다에 둔 튤립은 이제야 두 송이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빨간 색깔을 띠고 부끄러운 듯 살며시 솟아오르려는 꽃망울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런데 철쭉 화분 옆에서 파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파는 사람들에게 꽃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그저 식자재로만 여겨진다. 그런 파인데 여기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니 하얀 꽃망울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파가 피운 꽃처럼 때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것에서 인정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꽃들을 보고 있노라니,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기쁘다. 나는 꽃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화도 해보았다. 꽃을 피우려면, 차가운 계절 또는 어두운 땅속이라는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 굳이 시기를 따질 필요도 없다. 일찍 피는 꽃은 일찍 지고, 늦게 피는 꽃은 늦게 진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앞서서 피는 인생도 있지만, 뒤늦게 피는 인생도 있다. 꽃을 피우는 시기도 천차만별이거니와 심지어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는 인생도 많다. 어떤 사람은 꽃은 화려해도 열매가 없는가 하면, 엉뚱한 열매, 못된 열매로 손해를 끼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슨 꽃이냐, 언제 피느냐보다, 제대로 피어서, 충실한 역할로 주변을 환하게 하며 향기를 퍼뜨리고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코로나19’에 대한 능동적이고 신속한 대처로 한국이 주목받고 있다. 심지어 미국도 진단키트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선별진료시스템도 모범이 되고 있다. 사재기도 없고, 봉사와 나눔의 물결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있다.   6·25동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가 뒤늦게 꽃을 피워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리며, 알찬 결실을 거두는 모습이다. 위기는 곧 기회이다. 이 시기가 지나가면 대한민국은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한 만큼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나눔과 봉사 그리고 사랑의 꽃을 피워 수많은 행복의 결실을 민들레 홀씨처럼 이웃으로, 다른 나라로 날려 보냅시다. 그리고 그 홀씨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모두 친구가 되어 손에 손을 잡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날을 기대합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03-26
  • 사회적 거리 두기, 인천 활석교회도 실천에 앞장서
    [시니어투데이]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한국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국민들이 정부의 방침에 잘 협조하고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에 감동하고 있다.   의료진들은 위험이나 피로감을 개의치 않고 대구, 경북 지역으로 달려갔다. 기부의 물결도 이어지고 있다. 어떤 지체 장애인은 자신이 모아둔 마스크를 부산의 한 파출소에 몰래 기부하기도 했다는 소식이며, 유명인들의 통 큰 기부에 이르기까지 코로나19의 어려움 못지않게 감동의 스토리가 이어지며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역시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임이 틀림없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온 민족이기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것이다.   종교계에서도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는 6·25동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예배를 스스로 잠정 중단하고 있다. 이런 대열에 동참하는 인천의 활석교회(담임목사 윤철영)를 들여다보았다.   윤철영 목사는 예배 순서와 설교원고를 작성하여 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하도록 돕고 있다. 윤 목사는 “이런 기회에 각 가정에서 진정한 교회 공동체를 경험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다”며 “기독교인들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때 사회를 섬기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했다.   윤 목사는 “예배는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이면 어떠냐는 것이다. 삶의 총체적 의미로서의 예배를 실현하는 것이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런 일이 없는 평상시에는 공동체를 경험하며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활석교회 윤철영 목사가 이번 주 교인들에게 보낸 설교는 다음과 같다.   활석교회 담임목사 윤철영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중국에서 발원한 ‘코로나19’의 명칭은 바이러스의 모양이 왕관(corona)과 같다는 데에서 붙인 말입니다. 인류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질병입니다.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에서는 스페인 독감(스페인에서 발병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언론이 전시 보도 통제 없이 이 질병의 심각성을 심도 있게 다뤘다고 하여 스페인 독감이라 명명함)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군인들에 의하여 창궐한 스페인 독감에 2년 동안 5억여 명이 감염되었고, 그중에 5천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숨진 군인과 민간인의 수보다 두 배가 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를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는데, 당시 인구의 50%가량인 740만 명이 감염되어 무려 14만 명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많은 질병이 극복되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질병이 인류에게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질병은 자연 생태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래에 등장하여 지구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조류인플루엔자(Al), 사스(SARS), 메르스(MERS), 코로나19(COVID-19)는 모두 인수공통전염병입니다.   이외에도 홍역, 뇌염, 결핵, 천연두, 에이즈, 탄저병, 공수병, 광우병, 브루셀라 등 전체 질병의 75% 이상이 동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과 더불어 발전해온 만큼 이런 질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침범, 단백질 공급 수단으로 가축의 대량사육과 도축( 한 해 600억 마리 도축함), 반려동물의 증가, 농축산물의 교역 증대, 교통의 신속함이 어우러져 질병이 더욱더 심각하게 가속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에서 인류에게 큰 불행을 안겨준 질병은 페스트인데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529년 스페인이 침공한 아즈텍은 전쟁보다 천연두로 멸망하였고, 잉카제국의 8만 군대는 1531년 168명의 스페인 군대에 전멸당했는데 이유는 천연두였습니다. 영국군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도 그랬습니다.   질병은 전쟁보다 무섭습니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질병은 인간에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도시화 될수록 그 파괴력은 배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는 그의 작품《호모 데우스》에서 도시를 ‘병원균의 이상적 번식처’라고 꼬집었습니다.   함의 후예들에 의해 시작된 도시 문화가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문화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건설하는 현장에 개입하셔서 인간의 언어를 흩으셨고, 화려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여 흔적도 없이 지우셨습니다. 또한,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애굽을 열 번의 재앙으로 응징하셨으며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성도 무너뜨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다시 조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 과학적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첨단화된 세상임에도 엄청난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속수무책이 아닙니까?   우리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로 서서 사람과의 관계, 동식물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의 수단으로 전쟁과 질병을 사용하신 사건이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형태와 문화가 앞서 언급한 바벨탑과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 아닌지를 성찰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겸손해야 할 때입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반성하며, 비난과 다툼을 멈추고 사람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시선을 돌리고 그분께 물어야 합니다. 삶의 방향도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렘애3:32,33)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 정보뉴스
    • 사회
    2020-03-16
  • 책과 도서관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가치혁신
    책과 도서관의 관계를 사람과 비교해볼 때 책이 영혼이라면 도서관은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책과 도서관은 매우 긴밀한 관계다. 도서관과 지역사회 역시 매우 긴밀한 관계다. 공동체는 공간적이고, 공간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있다. 도서관은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지식이 교감하며 융합하여 사람들의 심연에서 잠자는 갈망이나 사명을 자극한다. 지적인 소통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하는 희망과 용기의 공급처다.   하지만 도서관이 여기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적 갈증에 지친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에서 나아가 꿈과 용기를 창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마다 새로움을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서관이라는 샘들이 하나둘 모여서 가치혁신을 이루게 해야 한다. 이런 조화가 일어나면 도서관은 엄청난 유익을 창출하는 시대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의 지혜가 모여 있다. 도서관은 지혜의 샘터와도 같다.     먼저는 책과 도서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 다른 각도, 새로운 생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와 같은 틀 안에서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도서관은 어느 정도 양적인 팽창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도서관의 사명이 흡족하게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드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과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지혜가 서로의 가슴에 심기게 하고 자랄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더해져야 한다. 발상을 전환해야 과거에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인다. 이전까지의 방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황당하고도 어리석은 행위다. 도서관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고 그에 따라 뜨거운 실천을 아끼지 않는다면 책과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가치를 혁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단순히 책을 모아 두기만 한다고 해서 도서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은 다양하고 많은 정보와 지식이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감을 창출하게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기능만 가동해서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 교류하며 공감하게 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만남이 왕성하게 일어나 감사와 기쁨이 꽃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날마다 더욱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9-05-07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우리의 마음은 인생을 가꾸는 정원이다. 여기에 올바르고 진실한 생각의 씨를 뿌려서 성실하게 잘 키워야 한다. 이것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 보는 이들에게 소리 없이 기쁨을 전할 수 있다.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 오면, 추수에 대한 보람과 행복도 맛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 증거가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자신이 인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이미 한 사람은 하나의 '사람책'이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 공감, 평화, 행복, 나눔, 배려, 존중’ 이런 것들이다. ‘너’와 더불어 ‘나’를 통해 ‘우리’로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만 이런 가치들이 힘차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우리의 밭을 갈고 다듬어, 올곧음과 사랑으로 가득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잘 자라도록 좋은 환경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서 공유와 상생이 마음껏 호흡하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풍성한 결실을 이루어 가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나눔의 경제, 배려와 존중의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주저 없이 이런 평화와 공감의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누구라도 다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 증거가 자신과 모든 것이 똑같은 또 하나의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만큼 가치관의 혼란과 첨예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하나가 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양성이 조화로움 가운데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어낼 때, 최적의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강제성에 의한 획일화나 전체주의 방식으로는 절대 이런 상태를 만들어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각각의 다양한 생각을 품고 해를 보고 달을 보아도 해와 달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바라보는 수평선과 지평선도 이와 같다.   과연 어떤 것이 아름다운 세상인가! 사람들의 다양성이 살아 숨 쉬고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나눔과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지혜에서 나온다. 지혜가 풍부해야 행복과 번영이 꽃을 피우게 된다. 지혜는 갈등을 치유하고, 이해의 가뭄을 해소하게 하여 준다. 지혜는 행복한 세상을 열 수 있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복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욱더 효율적으로 지혜를 창출하고 모으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벌들이 꽃 속에서 꿀을 모으듯이 사람들의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지혜를 모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플랫폼(platform)이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다. 이 도서관에는 수많은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공유를 꿈꾸며 열람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인공지능과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통해 수많은 연결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목받는 가운데 이에 대한 부작용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다.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니 인공지능을 아무리 발전시켜도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 바로 감성과 영성이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바로 이런 것을 나누며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꽃피울 것이다.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9-03-22
  • 원전과 핵무기를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5년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을 지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놀이로 설명한다.(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임경택 옮김,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2011, 98-99).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에서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원폭의 피해를 철저히 경험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하는 인기영합 정책(popul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정치·경제적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신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뗄 수 없는 인간의 터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창조주로 인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연을 유한 자인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며 파괴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는 창조주와 창조 섭리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들지 않는다. 유한이 무한을 계산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어마어마한 원전 사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안전한 식품을 먹어야 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땅은 인간의 놀이터(Spielraum·놀 수 있는 공간)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서 스스로 자연 안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을 모욕하고 맞서는 존재(Gegenstande)가 되는 동시에 기술을 통해서 자연에 도전, 도발하면서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의존하는 에너지 창출, 핵무기로 제압하려는 폭거는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삶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게 되면 수천 톤의 흙먼지가 발생하게 돼 소행성의 충돌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층권 대기에 쌓여 ‘핵겨울’(nuclear winter)을 초래함으로써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은 무조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도 핵을 보유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6-03-01
  • 노인의 지혜와 종교
      노인들이 종교에서 터득한 지혜를 젊은이들과 나누며 윤리와 영성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이해 능력과 자기를 성찰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노인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문화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낸다는 것은 그저 고루한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평을 통해서 관계를 조명하는 노인은 차원이 다르다. 공허한 말을 삼가고 사태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교양과 배움이 체득, 승화되지 않은 말과 행동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외형을 꾸민다고 해서 늙었다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의학적 기술과 체력적인 강화로 노년의 정신적 취약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노인이 될수록 육체적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노인의 정신적 건강과 지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노인으로부터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정신적, 영성적 가치를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경제적 부양에 대한 부담보다 정신적 유대와 대화에 대한 부담이 더 크다. 노인과의 소통의 부작용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대화를 피하게 된다.   노인은 가르치려 들고 젊은이들은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대화는 노인과 젊은이의 위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젊은이라고 해서 노인들이 배워야 할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령사회에서 노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노인의 권리만 생각할 때에 사회가 더 어려워진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고통분담을 위한 의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같이 고민해야 한다.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는 노인과 젊은이가 따로 없다.   이를 위해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인들이 종교에서 터득한 지혜를 젊은이들과 나누며 윤리와 영성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종교적 사유나 영성적 삶을 추구하기 위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경제적 획득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종교로부터 삶의 본질적인 해답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정신적, 영성적 가치를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6-02-15
  •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노인이 될수록 보수화되고 고루해지기 쉽다. 숱한 삶의 과정과 경험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그렇게 만들었다. 생물학적, 정신적 퇴행을 무기로 안정적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퇴행은 인정하더라도 시간의 흔적을 퇴행과 연관 짓는 것은 억측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젊게 산다는 논리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추하게 보일 수도 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과 멋이다. 이것이 영원한 현재를 누리는 카이로스적 삶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런 노년에게서는 내면의 깊이와 정신의 성숙으로부터 나오는 향기가 진동한다.   ▲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신 혹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래서 노년은 더 배워야 한다. 배움이 있었던 사람은 그 배움과 학문의 깊이를 사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연륜으로 더욱더 깊고 넉넉하게 숙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식이나 지혜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그 가치를 후세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근원으로부터 사유해야 한다. 자기 성찰이 되어야 타자를 가르치고 젊은이들에게 훈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자기를 성숙한 이성으로 바라보고 공동현존재적(Mitdasein)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는 노인이 될 때 자기의 외현이 더욱더 확장되고 설득력이 드넓어지는 것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6-02-13
  • 노년의 숭고한 의무와 공동현존재적 삶
      젊은이들에게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근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감정의 통제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젊은이들의 속도와 기계 문명의 변화에 잘 따라가지 못한다.   여유롭고 이해심이 많은 태도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삶의 연륜에서 비롯되는 지혜로 젊은이들과도 소통하고 삶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조그마한 일에도 서운해 하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젊은이들로부터 빈축을 사기 일수다. 아마도 어른이 되면 자신의 인격을 더 성숙시켜서 후세대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제는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한국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한 신경증이 젊은이들과의 관계나 사회 곳곳에서 투사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럴수록 노년의 이성과 감정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니 멋있어야 한다. 후세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곤과 억압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지하철에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서로 배려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나 교통 시설 등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노년의 움직임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공동현존재(Mitdasein)와 같은 인간 고유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이데거는 “함께 있음”(Mitsein), 곧 “함께”는 존재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직 인간만이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지금의 고령사회에서는 노인과 노인, 노인과 젊은이의 공동현존재의 더불어 있음의 삶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무색해지는 것 같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에만 몰입하다가 보니 인간의 인문적 교양(Bildung), 혹은 교양이 있는 인간상을 표방하는 계몽사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고 고통스러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자식들을 교육했던 세대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교양과 배려, 공동현존재를 자식들에게 교육하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급한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관계적 존재를 외면하게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 자체가 우리의 과거 역사가 안고 있었던 뼈아픈 시간과 경험으로서의 한계상황이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사회가 이렇게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6-02-12
  • 대학과 실존적 삶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언젠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고민하면서 이 사회의 메커니즘과 체제에 저항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점점 더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존적인 허무만을 느끼고 있다.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대학의 개념이 수명을 다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기야 진리가 아닌 이상 모든 것에서 기준이며 가치, 개념은 사회적 실천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날의 대학 개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린다면 이 또한 타당하다고 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도 놓아버리기 어려운 것 대학에서 학문적 기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학생들에게 돈벌이 수단을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이 범주 안에 직업을 찾아 사회로 진출하게 하는 교육도 들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물드는 원인이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도 ‘사유’를 가장 확실한 실존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사유’마저도 자본주의의 목적 실현에 시중드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생각하기는 하되, 기껏해야 자본주의에 예속된 노예적 범주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포의 관리, 공포의 정리정돈과 공포의 재활용 공장’”(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1쪽)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깊이 생각하는 인간은 쓸모가 없다. 죽을 때까지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몸과 영혼을 팔며 충성을 다하는 기계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실존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일까?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타자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일까? 지금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런 사유의 기회마저 배제해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자정능력을 잃은 하천처럼 심각하게 오염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든 직장이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으로 들어가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바라는 학생들에게 실존이니 존재니 하는 말들이 더 상처받게 할 것이고 고통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실존의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이 잘 굴러가도록 조처를 하고 관리 감독하는 그들도 똑같이 기계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그것이 생산해내는 제품은 늘 동일하다. 규격, 수치, 무게, 색깔 모든 것이 같아야 한다. 같지 않으면 불량품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동일성의 잣대로만 판단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의 실존, 인식, 존재, 본질, 삶, 사랑, 화해, 환대 등을 숫자로 저울질할 수 있을까?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뉴스
    • 칼럼평론
    2016-01-2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