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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전과 핵무기를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5년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을 지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놀이로 설명한다.(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임경택 옮김,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2011, 98-99).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에서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원폭의 피해를 철저히 경험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하는 인기영합 정책(popul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정치·경제적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신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뗄 수 없는 인간의 터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창조주로 인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연을 유한 자인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며 파괴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는 창조주와 창조 섭리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들지 않는다. 유한이 무한을 계산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어마어마한 원전 사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안전한 식품을 먹어야 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땅은 인간의 놀이터(Spielraum·놀 수 있는 공간)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서 스스로 자연 안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을 모욕하고 맞서는 존재(Gegenstande)가 되는 동시에 기술을 통해서 자연에 도전, 도발하면서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의존하는 에너지 창출, 핵무기로 제압하려는 폭거는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삶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게 되면 수천 톤의 흙먼지가 발생하게 돼 소행성의 충돌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층권 대기에 쌓여 ‘핵겨울’(nuclear winter)을 초래함으로써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은 무조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도 핵을 보유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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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01
  • 노인의 지혜와 종교
      노인들이 종교에서 터득한 지혜를 젊은이들과 나누며 윤리와 영성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이해 능력과 자기를 성찰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노인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문화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낸다는 것은 그저 고루한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평을 통해서 관계를 조명하는 노인은 차원이 다르다. 공허한 말을 삼가고 사태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교양과 배움이 체득, 승화되지 않은 말과 행동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외형을 꾸민다고 해서 늙었다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의학적 기술과 체력적인 강화로 노년의 정신적 취약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노인이 될수록 육체적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노인의 정신적 건강과 지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노인으로부터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정신적, 영성적 가치를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경제적 부양에 대한 부담보다 정신적 유대와 대화에 대한 부담이 더 크다. 노인과의 소통의 부작용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대화를 피하게 된다.   노인은 가르치려 들고 젊은이들은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대화는 노인과 젊은이의 위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젊은이라고 해서 노인들이 배워야 할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령사회에서 노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노인의 권리만 생각할 때에 사회가 더 어려워진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고통분담을 위한 의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같이 고민해야 한다.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는 노인과 젊은이가 따로 없다.   이를 위해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인들이 종교에서 터득한 지혜를 젊은이들과 나누며 윤리와 영성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종교적 사유나 영성적 삶을 추구하기 위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경제적 획득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종교로부터 삶의 본질적인 해답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정신적, 영성적 가치를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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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5
  •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노인이 될수록 보수화되고 고루해지기 쉽다. 숱한 삶의 과정과 경험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그렇게 만들었다. 생물학적, 정신적 퇴행을 무기로 안정적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퇴행은 인정하더라도 시간의 흔적을 퇴행과 연관 짓는 것은 억측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젊게 산다는 논리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추하게 보일 수도 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과 멋이다. 이것이 영원한 현재를 누리는 카이로스적 삶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런 노년에게서는 내면의 깊이와 정신의 성숙으로부터 나오는 향기가 진동한다.   ▲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신 혹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래서 노년은 더 배워야 한다. 배움이 있었던 사람은 그 배움과 학문의 깊이를 사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연륜으로 더욱더 깊고 넉넉하게 숙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식이나 지혜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그 가치를 후세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근원으로부터 사유해야 한다. 자기 성찰이 되어야 타자를 가르치고 젊은이들에게 훈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자기를 성숙한 이성으로 바라보고 공동현존재적(Mitdasein)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는 노인이 될 때 자기의 외현이 더욱더 확장되고 설득력이 드넓어지는 것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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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3
  • 노년의 숭고한 의무와 공동현존재적 삶
      젊은이들에게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근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감정의 통제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젊은이들의 속도와 기계 문명의 변화에 잘 따라가지 못한다.   여유롭고 이해심이 많은 태도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삶의 연륜에서 비롯되는 지혜로 젊은이들과도 소통하고 삶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조그마한 일에도 서운해 하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젊은이들로부터 빈축을 사기 일수다. 아마도 어른이 되면 자신의 인격을 더 성숙시켜서 후세대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제는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한국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한 신경증이 젊은이들과의 관계나 사회 곳곳에서 투사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럴수록 노년의 이성과 감정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니 멋있어야 한다. 후세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곤과 억압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지하철에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서로 배려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나 교통 시설 등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노년의 움직임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공동현존재(Mitdasein)와 같은 인간 고유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이데거는 “함께 있음”(Mitsein), 곧 “함께”는 존재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직 인간만이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지금의 고령사회에서는 노인과 노인, 노인과 젊은이의 공동현존재의 더불어 있음의 삶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무색해지는 것 같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에만 몰입하다가 보니 인간의 인문적 교양(Bildung), 혹은 교양이 있는 인간상을 표방하는 계몽사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고 고통스러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자식들을 교육했던 세대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교양과 배려, 공동현존재를 자식들에게 교육하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급한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관계적 존재를 외면하게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 자체가 우리의 과거 역사가 안고 있었던 뼈아픈 시간과 경험으로서의 한계상황이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사회가 이렇게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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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2
  • 종교와 시니어의 삶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우리 인간의 삶의 곁에 충실히 남아 있을 것이다. 종교가 젊은이들에게는 흥미가 다한 폐물에 지나지 않아도 시니어에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시니어들을 위한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사라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철학이나 심리학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남은 것은 종교다.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종교와 더불어 보내야 한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즐거움과 위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라 영원성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친구도, 돈도, 사교춤도 노년이 될수록 궁극적으로 사람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막연히 종교를 홍보하거나 선전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생명에 대한 욕망은 커지지만,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영원할 것 같은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생명의 시한도 젊은이들보다는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더 높여주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초월적 가치를 지향하게 해주니 삶의 욕망을 점점 더 내려놓게 한다.   노년의 시기는 기존의 과욕이나 혈기를 버리고 비워, 그 자리에 여유와 평화를 채우는 시기이다. 물질적인 욕망이나 생명에 대한 집착, 혹은 사람에 대한 애착까지도 덜어내야 한다. 육체와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영원에 대한 지향이 더욱더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는 영혼과 육체를 관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적어도 건전한 종교라면 노년의 심약한 마음과 의식을 이용해 정신을 흐려놓으려고 들지는 않는다. 노인을 공경할 줄 알고 늙음에 대한 상식을 간파한 종교는 그에 걸맞은 의식과 정신, 그리고 영성을 깨우쳐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노년에는 한 가지 정도의 종교를 갖고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제와 사귐,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성과 정신적 향상을 꾀하며 그것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노욕이나 고집을 앞세우면 사회적으로 부조화를 만들어 낸다. 젊은이들을 배려하고 또 더욱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욕망으로 가득하고, 훈계만 일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그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증폭된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니어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시니어들이 삶에 있어 더 용기가 있고 더 성숙한 안목으로 인생과 사회의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니어들의 원숙한 인격과 여유로움, 삶의 식견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철학적인 시니어이자, 더불어 종교적인 시니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이제껏 숱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삶의 고비들을 넘겨왔는데, 무슨 또 영성과 정신을 소비하라는 말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종교를 더는 소비하지 않으니 제발 시니어들이라도 소비 좀 해달라는 부탁도 아니다. 이제는 종교나 영성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그 흐름을 역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니어들은 소비만 하고 남은 인생을 소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니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경쟁에 찌든 젊은이들이며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훌륭한 덕과 정신으로 힘을 실어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역할이야말로 종교가 있는 시니어들의 강점일 것이다. 노년에게 종교는 생애를 좀 더 생산적이며 깨어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시대와 우리 사회는 넓은 시야와 깊은 영성으로 곳곳에서 자신과 후세대들을 연결하는 통로로써 종교를 통해 아름다운 담론의 장(場)을 펼쳐가는 시니어들을 갈망하고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
    • 칼럼평론
    2016-01-05

실시간 칼럼평론 기사

  • 원전과 핵무기를 누구도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2011년 3월 11일)이 일어난 지 5년이 되었다. 다른 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망각의 사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에서는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면서도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전을 지으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그것을 정치·경제적 놀이로 설명한다.(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 임경택 옮김, 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 동아시아, 2011, 98-99).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에서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원폭의 피해를 철저히 경험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선거에서의 표를 의식하는 인기영합 정책(populism)은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로 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정치·경제적 권력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은 신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뗄 수 없는 인간의 터전이며 생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창조주로 인해서 존재하고 있는 그 자연을 유한 자인 인간이 주인 노릇을 하며 파괴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는 창조주와 창조 섭리가 깃들어 있다. 이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서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려고 들지 않는다. 유한이 무한을 계산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어마어마한 원전 사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할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나 안전한 식품을 먹어야 하고 생명을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 지구촌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원전과 핵무기는 이념과 경제의 문제를 넘어 무조건 모두 안전하게 폐기해야 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땅은 인간의 놀이터(Spielraum·놀 수 있는 공간)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과학기술을 통해서 스스로 자연 안에서의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점점 더 자연을 모욕하고 맞서는 존재(Gegenstande)가 되는 동시에 기술을 통해서 자연에 도전, 도발하면서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의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전에 의존하는 에너지 창출, 핵무기로 제압하려는 폭거는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제라도 우리는 모두 원전과 핵무기를 거부하고 삶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이를 위한 생태적 삶과 영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과학자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는 전쟁으로 핵폭탄이 터지게 되면 수천 톤의 흙먼지가 발생하게 돼 소행성의 충돌과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상층권 대기에 쌓여 ‘핵겨울’(nuclear winter)을 초래함으로써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북한은 무조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도 핵을 보유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빼앗을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
    • 칼럼평론
    2016-03-01
  • 노인의 지혜와 종교
      노인들이 종교에서 터득한 지혜를 젊은이들과 나누며 윤리와 영성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이해 능력과 자기를 성찰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노인이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문화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낸다는 것은 그저 고루한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평을 통해서 관계를 조명하는 노인은 차원이 다르다. 공허한 말을 삼가고 사태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교양과 배움이 체득, 승화되지 않은 말과 행동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 외형을 꾸민다고 해서 늙었다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의학적 기술과 체력적인 강화로 노년의 정신적 취약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노인이 될수록 육체적 건강을 챙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노인의 정신적 건강과 지혜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노인으로부터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정신적, 영성적 가치를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이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경제적 부양에 대한 부담보다 정신적 유대와 대화에 대한 부담이 더 크다. 노인과의 소통의 부작용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대화를 피하게 된다.   노인은 가르치려 들고 젊은이들은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진정한 대화는 노인과 젊은이의 위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젊은이라고 해서 노인들이 배워야 할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령사회에서 노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노인의 권리만 생각할 때에 사회가 더 어려워진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고통분담을 위한 의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같이 고민해야 한다.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서는 노인과 젊은이가 따로 없다.   이를 위해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노인들이 종교에서 터득한 지혜를 젊은이들과 나누며 윤리와 영성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종교적 사유나 영성적 삶을 추구하기 위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경제적 획득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종교로부터 삶의 본질적인 해답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줄 수 있는 정신적, 영성적 가치를 올바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 교육
    • 칼럼평론
    2016-02-15
  •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노인이 될수록 보수화되고 고루해지기 쉽다. 숱한 삶의 과정과 경험들이 한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그렇게 만들었다. 생물학적, 정신적 퇴행을 무기로 안정적이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인 퇴행은 인정하더라도 시간의 흔적을 퇴행과 연관 짓는 것은 억측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나 노력을 젊게 산다는 논리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추하게 보일 수도 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과 멋이다. 이것이 영원한 현재를 누리는 카이로스적 삶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길이다. 이런 노년에게서는 내면의 깊이와 정신의 성숙으로부터 나오는 향기가 진동한다.   ▲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신 혹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성의 외현으로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좌표가 되어주는 인도자가 노인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래서 노년은 더 배워야 한다. 배움이 있었던 사람은 그 배움과 학문의 깊이를 사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연륜으로 더욱더 깊고 넉넉하게 숙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m) 사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식이나 지혜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그 가치를 후세대에게 알려주기 위해서는 자신을 근원으로부터 사유해야 한다. 자기 성찰이 되어야 타자를 가르치고 젊은이들에게 훈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자기를 성숙한 이성으로 바라보고 공동현존재적(Mitdasein)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는 노인이 될 때 자기의 외현이 더욱더 확장되고 설득력이 드넓어지는 것이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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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3
  • 노년의 숭고한 의무와 공동현존재적 삶
      젊은이들에게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근력은 약해지고 이성과 감정의 통제 능력도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런 이유로 젊은이들의 속도와 기계 문명의 변화에 잘 따라가지 못한다.   여유롭고 이해심이 많은 태도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삶의 연륜에서 비롯되는 지혜로 젊은이들과도 소통하고 삶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조그마한 일에도 서운해 하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젊은이들로부터 빈축을 사기 일수다. 아마도 어른이 되면 자신의 인격을 더 성숙시켜서 후세대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제는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한국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한 신경증이 젊은이들과의 관계나 사회 곳곳에서 투사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럴수록 노년의 이성과 감정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니 멋있어야 한다. 후세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연하며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곤과 억압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지하철에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서로 배려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공의 장소나 교통 시설 등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노년의 움직임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공동현존재(Mitdasein)와 같은 인간 고유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하이데거는 “함께 있음”(Mitsein), 곧 “함께”는 존재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직 인간만이 서로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지금의 고령사회에서는 노인과 노인, 노인과 젊은이의 공동현존재의 더불어 있음의 삶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무색해지는 것 같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에만 몰입하다가 보니 인간의 인문적 교양(Bildung), 혹은 교양이 있는 인간상을 표방하는 계몽사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고 고통스러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자식들을 교육했던 세대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교양과 배려, 공동현존재를 자식들에게 교육하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매우 급한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관계적 존재를 외면하게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 자체가 우리의 과거 역사가 안고 있었던 뼈아픈 시간과 경험으로서의 한계상황이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사회가 이렇게 지속하여서는 안 된다.   노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깨어나고 현실을 직시하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돕고 이끌어야 할 숭고한 의무가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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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12
  • 대학과 실존적 삶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언젠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고민하면서 이 사회의 메커니즘과 체제에 저항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점점 더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존적인 허무만을 느끼고 있다.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대학의 개념이 수명을 다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기야 진리가 아닌 이상 모든 것에서 기준이며 가치, 개념은 사회적 실천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난날의 대학 개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린다면 이 또한 타당하다고 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진정한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 이름만 대학이지 취업률로 순위가 매겨지는 현실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도 놓아버리기 어려운 것 대학에서 학문적 기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 가치와 목적이 학생들에게 돈벌이 수단을 가르치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이 범주 안에 직업을 찾아 사회로 진출하게 하는 교육도 들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물드는 원인이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도 ‘사유’를 가장 확실한 실존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사유’마저도 자본주의의 목적 실현에 시중드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생각하기는 하되, 기껏해야 자본주의에 예속된 노예적 범주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포의 관리, 공포의 정리정돈과 공포의 재활용 공장’”(Z. Bauman, 조형준 옮김,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새물결, 2014, 221쪽)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깊이 생각하는 인간은 쓸모가 없다. 죽을 때까지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몸과 영혼을 팔며 충성을 다하는 기계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며 올바른 인간을 육성하고 바람직한 사회인을 길어내는 곳이다.     실존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일까?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타자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일까? 지금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이런 사유의 기회마저 배제해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자정능력을 잃은 하천처럼 심각하게 오염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든 직장이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으로 들어가 잘 적응할 수 있기를 바라는 학생들에게 실존이니 존재니 하는 말들이 더 상처받게 할 것이고 고통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실존의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이 잘 굴러가도록 조처를 하고 관리 감독하는 그들도 똑같이 기계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그것이 생산해내는 제품은 늘 동일하다. 규격, 수치, 무게, 색깔 모든 것이 같아야 한다. 같지 않으면 불량품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동일성의 잣대로만 판단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의 실존, 인식, 존재, 본질, 삶, 사랑, 화해, 환대 등을 숫자로 저울질할 수 있을까?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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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5
  • 종교와 시니어의 삶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우리 인간의 삶의 곁에 충실히 남아 있을 것이다. 종교가 젊은이들에게는 흥미가 다한 폐물에 지나지 않아도 시니어에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시니어들을 위한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사라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철학이나 심리학이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남은 것은 종교다. 종교는 노년 생활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유년시절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종교와 더불어 보내야 한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즐거움과 위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 스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라 영원성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친구도, 돈도, 사교춤도 노년이 될수록 궁극적으로 사람의 정신 건강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막연히 종교를 홍보하거나 선전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생명에 대한 욕망은 커지지만,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다 보니 영원할 것 같은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생명의 시한도 젊은이들보다는 그만큼 짧을 수밖에 없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더욱더 높여주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초월적 가치를 지향하게 해주니 삶의 욕망을 점점 더 내려놓게 한다.   노년의 시기는 기존의 과욕이나 혈기를 버리고 비워, 그 자리에 여유와 평화를 채우는 시기이다. 물질적인 욕망이나 생명에 대한 집착, 혹은 사람에 대한 애착까지도 덜어내야 한다. 육체와 마음이 가벼워질수록 영원에 대한 지향이 더욱더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종교는 영혼과 육체를 관조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적어도 건전한 종교라면 노년의 심약한 마음과 의식을 이용해 정신을 흐려놓으려고 들지는 않는다. 노인을 공경할 줄 알고 늙음에 대한 상식을 간파한 종교는 그에 걸맞은 의식과 정신, 그리고 영성을 깨우쳐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노년에는 한 가지 정도의 종교를 갖고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교제와 사귐,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성과 정신적 향상을 꾀하며 그것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노욕이나 고집을 앞세우면 사회적으로 부조화를 만들어 낸다. 젊은이들을 배려하고 또 더욱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욕망으로 가득하고, 훈계만 일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그에 대해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증폭된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니어들의 의식과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   시니어들이 삶에 있어 더 용기가 있고 더 성숙한 안목으로 인생과 사회의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시니어들의 원숙한 인격과 여유로움, 삶의 식견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깝지 않은가? 철학적인 시니어이자, 더불어 종교적인 시니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철학과 종교적 삶에 자신의 정신과 인생을 담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시니어들의 지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이제껏 숱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삶의 고비들을 넘겨왔는데, 무슨 또 영성과 정신을 소비하라는 말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종교를 더는 소비하지 않으니 제발 시니어들이라도 소비 좀 해달라는 부탁도 아니다. 이제는 종교나 영성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 그 흐름을 역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시니어들은 소비만 하고 남은 인생을 소진하는 시기가 아니라, 더 많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니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경쟁에 찌든 젊은이들이며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훌륭한 덕과 정신으로 힘을 실어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역할이야말로 종교가 있는 시니어들의 강점일 것이다. 노년에게 종교는 생애를 좀 더 생산적이며 깨어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시대와 우리 사회는 넓은 시야와 깊은 영성으로 곳곳에서 자신과 후세대들을 연결하는 통로로써 종교를 통해 아름다운 담론의 장(場)을 펼쳐가는 시니어들을 갈망하고 있다.     김대식 박사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의 저자, 시니어투데이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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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5
  • 분노하는 민중과 함석헌 효과
      함석헌. 우리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련하게 기억한다. 한국 역사의 현대사적 인물로서 철학,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기술, 교육, 여성 등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독특한 철학을 우려냈던 분으로 알려졌다. 그에 비해 더는 그를 이 시대에 다시 만나야 할 사상가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서구 철학자의 세례를 받고 지난 반세기를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자양분을 그들로부터 찾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구의 사상이나 철학조차도 외면당하고 있다. 이성적 숙고를 통해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이성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 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누리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식과 진리, 그리고 지혜에 대한 욕구보다 물질적이고 향락적 욕망이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 현존재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것처럼, “자기 창조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인지, “자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실존”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다시 요청되는 까닭이다. 인간 현존재는 결단코 일상인(das Man)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근본 기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수행적 언어들이 넘쳐난다.   함석헌의 저서를 읽으라는 주문은 한가한 잡담으로 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할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함석헌의 언어, 그리고 언어적 행위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그의 발언적 진리를 인식하기에 앞서, 민중은 지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중이 전체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민중이 아니라 그것은 노예요 종이다. 현재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본과 체제, 이데올로기와 상품의 노예는 있을지언정 순수 의식, 순수 정신을 품은 민중을 만나보기란 매우 어렵다.   ▲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 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누리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30년 전 함석헌은, “사람은 감응(感應)하는 물건이다. 감응이란 곧 다른 것 아니요, 하나로 된 바탈[보편성, 통일성]이다. 사람이 전체와 내가 하나인 것을 느낄 때처럼, 전체가 이 나를 향해 부르는 것을 느낄 때처럼, 흥분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감응하면서 흥분하는 현존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전체를 지각하고 깨닫는 사람이 부족하다. 게다가 흥분이란 대상에 의해서 감각된 인간의 감정이 촉발되는 것일 텐데, 이성적인 것과 반대되는 부정적 태도와 반응인가. 아니다. 흥분은 민중이 살아 있다는 인식과 기분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한 인간의 근본 기분은 지루함이나 권태, 불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흥분이야말로 민중이 혁명할 수 있는 근본 기분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상상으로는 혁명 기분은 아니 나온다... 혁명은 혁명으로만 나온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미지(image)는 감정과 인식을 속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의 작용 없이 상상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상상(Einbildung)은 대상을 현시함이 없이 상(Bild)을 떠올리거나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상을 그리는 것만으로 혁명할 수 없다. 자칫 상상이 지나치면 망상이나 공상이 되기에 십상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분,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흥분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작용 때문에 이루어지는 감정이어야만 한다.   혁명은 전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혁명이 무슨 치기 어린 감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직관과 판단은 사태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획득한다. 지금 민중이 혁명의 근본 기분인 흥분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흥분의 물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트인다. 흥분의 의지, 흥분의 에너지가 매스미디어, 스포츠, 쇼핑 등으로 발현되고 있다.   민중의 흥분에의 의지는 전체, 즉 체제, 제도, 조직, 이데올로기, 자본 등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민중의 흥분 의지는 조작되고 통제당하면서 그 흥분이라는 근본 기분마저도 박탈당하고 있다. 혁명에의 근본 기분이 흥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 기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촉발되고 있지 못하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민중이 혁명하려면 혁명 기분을 새롭게 일구어야 한다. 혁명 기분이 인간 현존재의 변화와 세계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 『생태영성의 이해』등이 있다.    
    • 교육
    • 칼럼평론
    2015-04-27
  •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탓하라!
      산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산’이라는 시이다. 산은 자신의 존재를 열어 밝힌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권태를 모른다.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명체를 끌어안고 있는 산은 늘 물음을 제기하고 동시에 답을 제시한다. 산은 그 자리에서 자연의 신비를 품고 있어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존재론적 해답을 발견한다. 말하지 않는 해답, 그것은 산만이 줄 수 있는 고유성이다. 그러니 탓할 일도 아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 속에서 거주할 세계로 인식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만남조차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산을 향해 조소도 심지어 정복과 지배도 마다치 않는다. 그러나 어디 산이 끄떡이래도 하던가? 산, 즉 자연(physis)은 “모든 본질적 존재자가 그 현존 상태로 나타나고 그 부재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산의 들고 나감은 흔적도 없다. 흔적조차도 없는 산을 향해 조소를 보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의 존재는 늘 그러한 상태로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 차라리 허허로운 웃음으로 날 마주 대하듯, 산을 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시인이 산을 의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의심이란 이미 존재 안에 가정된 확신과 뒤섞인 신념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에 드는 이성의 자기 경계요, 비판이다. 산을 의심한 것은 산의 존재를 인간실존 본질의 현존과 기댐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산의 존재를 의심해도, 산은 산으로서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보아도 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의심은 오히려 사태에 붙잡혀 있고, 몰두해 있는 것이다. 산에 붙들린 상태, 그것이 곧 시인의 의심이다.   자신의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큰 산의 존재는 이성과 감성을 압도하고 실존을 파괴하려는 듯이 서 있다. 산에 대한 감정과 기분이 지속할수록, 산은 더는 ‘그것’(It)이 아니라 너, 당신, 그대(Thou)로 다가온다. 산 앞에서, 산 옆에서, 산 뒤에서, 산 안에서, 산 위에서 우리는 지루할 틈도 없다.   그대를 만나는 것이기에 예의와 설렘, 회귀와 귀속의 본능으로 다가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이제 닮고 싶은 마음과 표정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의 몸, 특히 나의 눈은 그대, 곧 산에 내맡기며 산에 의해서 포섭된 눈길로 나를 보고 산 그 자체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산은 도구와 수단이 되지 않고 내가 가진 호기심은 산의 호기심이 되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교육
    • 칼럼평론
    2015-01-29
  • 상호주관적 도덕 공동체와 시대적 참뜻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국론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가 공동체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함석헌은 이미 국가 공동체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국가에 대한 정의는, ‘악과 투쟁하는 공동체’로서 규정된다. 국가, 함석헌의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나라는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민중의 재산과 안녕과 질서를 보장(담보)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함석헌은 그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라는 도덕적 존재들이 모여서 구성한 집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42쪽).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도덕 공동체, 상호주관적 윤리 공동체는 타자를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따라서 나라는 민중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도구적 행위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어떤 의식과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을 민중에게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행위자 혹은 정치적 행위 가능자에게까지 해당되는 강한 주체 인식과 행위를 요청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을 모든 행동의 표준을 삼고 살고자 하는 것이 윤리”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나라는 유기체이며 동시에 윤리 공동체, 사람 노릇을 하는 공동체이다(함석헌, 위의 책, 42쪽).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함석헌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윤리적 공동체의 범위는 일개 나라를 초월하여 범국가공동체, 세계운명공동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3-44쪽).   그런 의미에서 세계 국가는 기능적 명령이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륜 공동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국가들은 각각의 이기적인 추구를 넘어서 도덕적 인간을 토대로 물질적 실존을 소외시키거나 파괴하지도 않고, 상호주관적 민족 공동체의 분열도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추상적 인간의 실존을 공적 도덕성으로 묶는 역할도 해야 한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86쪽).   이러한 도덕적 실존, 윤리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통일을 생각해보면 경제적 우월성, 경제적 성장을 통한 국가의 통합보다 “정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정신으로 국가 공동체의 의식이 고양되어 있어야 경제적 삶, 경제적 부흥도 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신으로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력이나 폭력은 있을 수가 없다. “비폭력혁명으로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45쪽). 비폭력은,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시적-조물주적”이다. 그것도 “역사적 진리들의 조물주적 작품화”이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개인들의 실천이라는 혁명적 기획투사”(J. Habermas, 앞의 책, 371쪽)라고 말할 수 있다.   ▲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     하나의 생활세계, 하나의 소통되는 세계, 하나의 공통된 일상실천이 가능한 세계, 서로 돕는(상호부조의 철학) 세계, 상호 참여가 가능한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자기희생 없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적 실천, 즉 비(무)경쟁성, 비(무)지역성, 비폭력성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함석헌, 위의 책, 47-48쪽).   거듭 말하지만 비폭력주의는 경쟁이 아닌 자기희생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좋은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9쪽).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의 구현이다.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 인권의 옹호와 확대,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이에 반해 평화 없음(peacelessness)은 기아, 영양실조, 질병, 환경오염 등이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행위는 평화 없음의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   개인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경제적 부를 향유하기 위해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평화 없음의 파괴적 현실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진출, 확장, 정복, 지배, 순치, 주입의 시스템”이 아니라 “경청, 배움, 섬김, 자율, 상생, 평화를 위한 우정과 연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박성준, “인문학의 희망, 우정의 공동체를 열다”, 장동석 지음, 살아있는 도서관, 현암사, 2012, 137-144쪽).   이 모든 행위들 속에서는 물론 생활세계적 삶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이성적, 의사소통적 간섭, 상호이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의 타당성의 요청은 관념으로만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적 합의는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는 참여자들의 의지와 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J. Habermas, 앞의 책, 375쪽).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와 비폭력의 철학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타당한 말(씀)을 가져야 한다. 함석헌은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뜻”이라고 말한다(함석헌, 앞의 책, 51쪽). 시대가 원하는 뜻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고, 공존재적 삶을 만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언어, 즉 뜻이 있어야 한다. 뜻이 없으면 시대도 없다. 시대를 가리키고 시대를 선도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말-알이기 때문에 말 속에 이미 그 참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내뱉을 때는 단순히 소리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알, 즉 말의 지극한 뜻을 세계 앞에 내놓는 것이다. 세계로 내던지는 말-알은 말을 둘러 싼 속 알맹이이므로 그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말이 가식과 포장이 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은 말이 되고자 한다면, 말은 영원성과 초월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설령 사태가 변한다 하여도 말의 진정성마저도 변한다면 말(씀)을 통한 의사소통과 비폭력을 통한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치언어니 일상언어니 서민의 언어니 시정잡배의 언어니 구분을 하지만 그 언어의 밑바탕에는 참뜻만이 존재해야 한다.   참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는 죽은 언어나 다름이 없고 언어 이면의 초월의 뜻이 성립할 수 없으니 말의 순수성이나 말의 진중함과 신중함조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언어(言語)가 기능적으로 사람의 소리[言]와 함께 나의[吾] 말[言]을 통해서 생각을 전하는 매개체일지라도, 말은 말의 속 알맹이, 즉 말-알로서 본질적으로 그 속에 있는 참뜻의 교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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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9-22
  • ‘사람책도서관’이 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인가
      사람에서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노인이 한 사람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각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그것이 담고 있는 경험과 의미는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의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아프리카 가나 판티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나 제7대(1996~2006)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타 아난(Kofi Atta Annan)도 한 연설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강조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여도 지구촌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들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다.   ▲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사람이 배제되는 일은 사람을 위한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존재적 가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사람에게 답이 있다. 무인도에는 길이 없다. 삶의 현장에 길이 생기는 법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 본래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그 핵심이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때 진정으로 사람 사는 멋과 의미를 깨닫고 누리게 된다.   소통은 단순한 전달(transmission)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통에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일어나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community)와 친교(communion)라는 의미가 합성된 말이다. 따라서 소통은 메시지를 보내고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동체적 의식을 공유하고 친밀한 교제까지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경청은 상대에게 신뢰감을 쌓아 놓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사람책도서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스마트폰도 전화기이지만, 수없이 개발되어 제공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전화기를 뛰어넘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앱스토어이다. 이런 것과 같이 경험과 지혜의 장터가 필요하다.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바로 이런 플랫폼이다.    ▲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더욱더 아름답고 유익한 경제를 만들어 가려면 창의적인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사람이 중심이다. 핵심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융·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촉진되어야 새로운 일자리와 시장도 창출되는 것이다. 창의적인 발상은 혼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만나고 부딪치면서 예측하지 못 했던 결과도 만들고, 그것이 또 다른 발상과 결과를 낳기 위한 씨앗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런 일의 플랫폼이 되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된다는 것이다.   1418년에서 1450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정치는 인재경영에 기인한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발상과 그 실행을 위한 인재 등용과 연구의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휴먼 위즈덤 북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1443년(세종 23년) 반포된 훈민정음이 개발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임기간 동안 2천여 번의 경연(經筵)을 열었다고 하니, 한 달에 6회 정도를 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소통이 일어났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같은 노비 출신도 고위 관리로 등용했다. 모든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세종대왕은 특히 인재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지도자였다.   이 시대에도 이런 리더십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 필요하다. 블루오션(Blue Ocean) 이론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가치혁신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끊임없는 창출이 필요하다. 그 해답 또한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해답이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을 만들어내야 한다. 곳곳에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이런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감으로써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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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평론
    201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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